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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13일 저녁 8:00-9:00, 유튜브 '정용섭' 채널에서 라이브로 행한 강독, 강의안은 아래와 같다.
15강
은총에 관해서
솔라 그라티아
개신교 신자 중에서 마틴 루터가 제시한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라는 신앙 구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루터는 그 이외에도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솔라 피데(sola fide)라는 매우 중요한 개신교 신앙의 특징을 제시했다. 루터는 무슨 생각으로 솔라 그라티아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구성 요소로 생각했을까? 이 명제는 16세기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과 개신교회의 구원론 사이에 놓인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최근에 이런 차이를 좁혀내려는 신학적 시도들*이 양측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문제를 일단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업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지만, 루터는 여기서 인간의 업적을 배제하고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믿음에 관해서”와도 연결된다. 인간의 의로움이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에 의한 사건인지 아닌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은총론이나 칭의론 문제에서의 관건은 인간의 행위, 인간의 업적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있다. 인간의 의로움과 구원 사건에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완전히 배제되는가의 문제이다.
*1999년 10월31일 로마 가톨릭 쪽의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교황청 교회일치위위원장)과 루터교 세계연맹 크리스티안 카라우저 감독은 독일 남부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예배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사랑’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공동선언문은 각기의 전통을 수호하면서도 서로의 신앙적 지평을 넓힘으로써 일치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루터교회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와 소교리문답서만을, 로마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앙적 기초로 주장했었다. 이제 이 공동선언으로 인해서 지난 5백년간의 종교적 갈등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단초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기독교 사상 2000년 1월호, 217쪽 참조)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은총이라는 건 어떤 물건처럼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이 세계와 우리 인간의 삶을 해석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어떤 사람은 성서가 대답다고 주장하겠지만 성서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런 불확실성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일 뿐이지 우리에게 정답을 제공해주는 정답지는 아니다. 성서에는 우리 개신교회가 주장하는 솔라 그라티아에 상응하는 부분도 있지만, 인간의 업적을 강조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가장 손쉬운 예로 야고보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까지 말했으며, 그 이외에도 기독교인의 행위를 강조한 성구는 흔하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인간의 행위와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의 문제에서 루터가 말한 솔라 그라티아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각을 제시해준다.
오직 은총으로 구원이 발생한다는 이 솔라 그라티아 개념은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다. 여기에는 구원 개념의 심층적 이해가 토대하고 있다. 즉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구원이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인지, 그래서 오직 은총이라고만 말해야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업적도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생활습관을 고치는 것도 구원과 연결된다면 당연히 인간의 업적은 포기될 수 없다. 교회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이웃에게 봉사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업적에 속한다. 이런 일들은 곧 율법의 관심 사항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범이라 할 율법을 따르는 것은 곧 우리의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 삶을 함께 어떤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업적에 속한다. 우리의 변화된 그런 모습들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율법적 구도로 성취된 인간의 업적이라는 건 아무리 괜찮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늘 상대적인 가치밖에는 얻을 게 없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도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 된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구원을 절대적인 생명 사건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구원은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는 율법을 통해서 괜찮게 개량된 바리새인들보다는 그들이 죄인이라고 치부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기본적으로 예수의 삶과 율법과는 어떤 방식으로도 연결해서 생각해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는 율법을 폐기한 것일까? 이미 예수 당신 자신이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율법의 존속이냐, 폐기냐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까?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의 배타적인 사건이지만, 그래서 인간의 업적이 여기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과정과 수단으로써 그런 인간 삶을 규정해야 할 율법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는 정확한 대답을 끝내지 않았다.
은총 개념
위에서 말한 대로 은총론은 곧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론과도 매우 깊숙이 연관된다. 구원론, 인간론, 은총론은 인간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가에 대한 견해를 다룰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은혜)을 말한다는 것은 은총(카리스)이라는 언어가 가리키고 있듯이 인간 스스로 달성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따라서 우리는 “보편적인 창조와 유지와 통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조금만 눈여겨보더라도 아주 확실하다. 예컨대 우리의 우주는 1조의 1조 배에 이르는 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에 지구와 같이 생명이 있을 만한 별은 거의 무에 가깝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구의 생명 사건은 그 어떤 우연에 의한 사건이기보다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격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20명의 연주자가 자기 마음대로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 소리가 갑자기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으로 울려 퍼질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이 피조의 세계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세계이다.
2)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는 그의 선택과 약속의 은혜로 집약된다(사 54:10참조).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그 어떤 업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약속 때문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이들이다. 이런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확장된다. 우리의 모습만 본다면 구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에 이끌려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약속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3)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죄와 용서와 구원의 은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기독교인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은혜, 즉 창조 세계 안에 있는 생명의 영과 유대인들에게 임한 선택과 약속만이 아니라 더욱 결정적으로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일반적으로 포괄적이던 은혜가 구체적이고 확실한 은혜로 집중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고,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그 사죄가 보증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 사건으로 끌려들어 가게 되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은혜는 있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은혜는 기독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카리스마)로 나타난다. 은사가 곧 은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은혜(카리스)는 은사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구원받은 자는 그런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그에 해당하는 은사를 통해서 그 은혜를 증명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가 늘 우리가 예상하는 은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어떤 도덕주의나 업적주의처럼 이런 은사를 은혜보다 상위에 놓으려는 생각은 은혜를 상대화시킬 염려가 있다. 그런데도 은혜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증명할만한 은사가 뒤따른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운다(롬12:15).
5) 그리스도를 뒤따름이 없는 은총은 값싼 은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피조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이다. 본회퍼는 이 값비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도록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 값비싸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을 희생하기 때문에 값비싸다. 이리하여 그것은 비로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에 은혜이다. ... 무엇보다도 은혜는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아들의 목숨을 희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값을 비싸게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 우리에게 값싼 것이 될 수 없으므로 값비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그의 아들이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그를 내어주었기 때문에 은혜이다. 값비싼 은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나흐폴게 크리스티, 15). 즉 본회퍼가 말하려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복 받기 위한 것이라거나 자기가 살아가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또한 종교적 위로를 받기 위한 것만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곧 값비싸게 치른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값싸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전 존재를 모두 던져 넣어야 할 가장 궁극적인 사건이다.(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3권 참조).
*한국교회가 값싼 은혜에 기울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울 ‘명성교회’의 새벽기도회가 교회 이름 그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주일 예배 참석 숫자보다 많은 5만 명 이상이 새벽 기도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에 앞서 ‘사랑의 교회’가 새벽기도회 열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노후보장”(?)이라는 슬로건으로 이 새벽기도회가 치러졌다. 또 최근에는 서울 시청 앞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라이즈 업 코리아’ 대회에 5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이벤트는 한국교회에 매우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모이기를 힘쓴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의 영적 에너지가 막강하다는 실증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임에서 과연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값싼 은혜’라는 신학 개념을 통해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 모임에 ‘라이즈 업 코리아’라는 슬로건을 내 건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국가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어떤 종교적 성과를 얻어 보겠다는 의도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교회와 국가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한 신학적 미숙의 결과이다. 그들은 청소년들이 신앙적으로 각성함으로써 코리아가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리고 그게 곧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 자체가 매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일종의 국가 종교, 일종의 시민종교로 전락할 위험성을 말한다.
은총론의 왜곡 현상
하나님의 은총과 이에 직면해 있는 인간을 생각해보자. 오늘처럼 정치, 경제, 과학 등에서 거의 무한한 인간의 능력이 주창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는 것은 과연 어느 정도나 설득력이 있을까? 인간의 전능이 칭송되고 있는 오늘의 자리에서 우리는 이런 은총론의 자리를 좀 더 주도면밀하게 제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광신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독단론으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 은총이 몇 가지 부분에서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선 살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은총 편의주의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으며, 교회 밖에서는 은총 무용론이 그렇다.
1) 은총 편의주의
오늘 교회 현장에서 일컬어지는 은총은 그야말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아니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 앞에서 그것을 쉽게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자기가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면서도 사업이 잘되거나 자녀들이 잘되면 그게 곧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의 모든 삶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무게를 은총이라는 말로 쉽게 벗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다. 일종의 요행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앞에서 본대로 본회퍼는 기독교인들이 쉽게 값싼 은혜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신앙을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다 보면 이 세상에서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마련이다. 따라서 세상과 교회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교회는 순전히 종교적인 관심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본회퍼는 삶의 주변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곧 그의 비종교적 해석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비롯해서 한국교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설교는 복음의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의 설교에 대한 졸고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에서 본회퍼의 비종교화 개념과 연결된 대목을 여기 인용하겠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도, 아마 많은 사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는 게 곧 구원 사건이며, 그것이 곧 복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개인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는 곧 복음 사건 앞에서 개인이 책임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다. 그 복음은 우리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60년 전에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주장한 본회퍼는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우리는 성실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야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산다.(옥중서간, 원래 이 책의 원제는 ‘항거와 순종’이다.)
내가 보기에 워렌은 본회퍼가 지적한 하나님이라는 ‘작업가설’의 구도에 철저하게 묶여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자동판매기처럼 청중의 사적인 종교적 요구를 자동으로 해결해주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복음적인 설교자는 결코 아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고귀한 삶을 파괴한 미국의 부시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워렌도 물론 이런 유형의 목사인데, 우리는 복음을 사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설교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03 쪽)
2) 은총 냉소주의
다른 한편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인의 은총 편의주의와 대립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전형적인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원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바른길이라고 주장한다. 일종의 역사 진보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외면상 매우 탄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은총 편의주의처럼 부실하다. 일단 이런 은총 무용론은 인간의 업적과 능력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교만하게 되고 인간 사회를 오직 경쟁적인 구조로만 형성해나간다. 우리가 2001년 9월11일 미국 무역센터 테러 사건을 보았듯이 인간의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이 일순간에 쓰레기로 변해버리는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생명의 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자기 혼자 애를 쓰다가 삶을 소진해 버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은총의 본질을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해서 그것이 교회 안에서만 일종의 비의(秘儀)적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구원의 방편으로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 은총이 없으면 인간 구원도, 세계 구원도, 그 자유와 해방도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인 지평에서 회복해야 한다. 이제 구원과 연관해서 은총의 몇 가지 차원을 살펴보자.
이원론적 은총과 일원론적 은총
전통적인 루터교회의 구원론은 이원론적 형태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진노와 은총이 계시되고, 인간에게는 죄와 신앙이 계시된다. 이러한 이원성으로부터 이원론적인 칭의론이 발생한다. 이런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성서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율법을 명령하기도 하며 복음으로 위로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노를 내리며 동시에 죄를 없다고 인정하는 은총도 내려주신다. 율법과 진노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통해서 죄를 멀리하게 만들고, 복음과 은총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 기쁨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어쨌든지 루터교는 이런 이원론적 구도를 아주 명백히 밝힘으로써 복음이 우리 삶을 전폭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길을 방해했다.
이에 반해 개혁주의 신학자인 바르트는 전형적인 일원론적 구원론을 대표한다. 이것은 곧 그의 계시 일원론에 의한 귀결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의 형식’, 즉 복음의 구성요소이지 복음의 대립요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은총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하나님이 거룩한 분으로 말씀하든지 사랑하는 분으로 말씀하든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사실은 ... 이미 그 자체로서 은총이다.”
이 두 입장을 다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은총은, 즉 그의 구원은 심판 없는 은총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일원론적인 이해이며, 심판과 은총이, 즉 율법과 복음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이원론적 이해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곳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이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생명과 의미에 집중할 기회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성격을 담지하고 있어서 심판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늘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서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를 때 심판이 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주적 은총과 개인적 은총
-만인 구원과 선택적 구원-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인지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마틴 루터는 개인의 구원을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불트만도 역시 그렇다. 이에 반해 틸리히, 떼이야르 드 샤르뎅, 쉬츠 등은 우주적 구원론을 대변한다. 숄, 콕스, 메츠, 몰트만 같은 이들에게서는 우주적 구원론이 사회 혁명적 지평으로 발전했다.
이 문제는 만인 구원인가, 아니면 선택 구원인가에 연관된다.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고 유기당하게 되는 경우는 물론 인간의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책임도 간과될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완벽하게 창조했더라면 죄, 멸망 같은 게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완벽하게 창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이런 논리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이에 대한 해결책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인형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관해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제공했기 때문에 멸망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인데, 만약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국 불의하게 사용될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이런 주장이 약간 억지스러운 논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아마 이런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닿지 못하는 그 어떤 은폐의 세계에 해당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개인과 인류, 그리고 나아가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가 총체적인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사실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임하는 구원의 세계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 차원의 은총 사건이며, 그것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개인적인 차원의 은총 사건이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만의 구원이 아니라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구원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 궁극적 비밀을 알 수 없지만, 개체와 전체의 상호 연관성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은총과 예정
은총이나 멸망까지도 이미 처음부터 확고하게 이중적으로 예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칼빈의 이중 예정론으로 결집하여 개신교 신학에서 매우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예정론은 원래 어거스틴에 의해서 체계화됐다고 한다. 어거스틴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죄인이 은총의 역사를 통해서 자유인으로 변화되는 것에 있었다.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은총뿐이라면 그것은 곧 영원한 시간에까지 소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초가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 하나님의 선택을 훨씬 강조해서 이중 예정으로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1) 예정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예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에 있다. 2) 예정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다. 3) 예정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4) 예정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어났다. 칼빈은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변론했다. 1) 선택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2) 선택론은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하지 않는다. 3) 선택론은 하나님을 편파적인 분으로 보는 게 아니다. 4) 선택론은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하지 않는다. 5) 선택론은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개혁교회의 예정론은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수정되었는데, 바르트의 예정론에 의하면 영원한 예정은 “이중 예정”이지만, 전통적으로 칼빈주의가 뜻한 대로 한 부류의 인류가 영원부터 선택되었고 또 다른 부류가 영원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록 모든 인간이 예수가 없는 한 모두 버림받았지만,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선택되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일하게 선택된 인간이요, 유일하게 버림받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브룬너는 이중 예정을 배격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만인 구원론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일치되지 않는다고 했다.
푈만은 이중 예정 표상은 보편적 은총에만 배치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에도 배치되기 때문에, 또한 비인간적인 방자한 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했다. 예정은 결코 이중 예정이 아니라 단지 구원을 위한 예정일뿐이라고 한다.
은총과 인간의 협동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으로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인간의 어떤 협동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오래되고 진지한 질문이다.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가 신인협동설과 반(半)펠라기우스주의를 대변한다고 종종 비판한다. 그런 비판은 일방적인 관점이니까 조심해야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일어나지만, 인간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을 배제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은총만으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구하지 않는데도 은총을 베풀지는 않는다. 오직 우리가 구할 때만 은총을 베푼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서 거부될 수 있는 모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구원 사건에서 인간의 협동이 필요한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협동이 없이 하나님이 단독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면 정말 인간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며, 인간의 협동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협동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를 구하기 위해서 구명튜브나 밧줄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붙드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몫이다. 이처럼 인간 구원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인간에게 접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책임과 결단이 전혀 무시된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가 문을 두드리지만 억지로 문을 열지 않고 그 안에서 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신앙과 행위
구원 사건을 언급할 때 신앙과 행위의 문제는 위에서 다룬 협동 문제와 연관된다. 우리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진다는 명제를 철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것은 방종주의적이고 반율법주의적이라고 매도했다. 요즘도 가톨릭 신학자들은 심심치 않게 “오직 믿음”을 오해하는 말을 한다. 후흐(Ricarda Huch)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믿음’이나 ‘오직 은총’이라는 말은 대개의 인간이 기꺼이 선한 행위를 뿌리치고, 그러한 안심이 가져다준 쾌감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게끔 했다. 그들은 매우 게으른 자의 품에 축복이 내려앉는 놀고먹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루터의 ‘오직 믿음’은 모든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고 순수한 정신세계만을 추구하자는 게 아니다.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앙만이 의롭게 하지만, 이 은총의 상태는 열매를 보여주어야 한다. 푈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은 구원의 사실근거(Realgrund)이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인식근거(Erkenntnisgrund)다. 예수님도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변화와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있는 것처럼 존재와 인식은 같은 사건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가지가 늘 완전하게, 그리고 늘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므로 어디에 강조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그 견해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은총론은 구원론, 인간론과 연결된다는 점을 앞서 짚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이 발생할 때 어떤 기준이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가 여기서 다루어졌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주어진다. 구원의 또 다른 차원이라 할 칭의(Rechtvertigung)는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면서(Gerechtsprechung) 동시에 의화(Gerechtmachung)이기도 하다. 그래서 칭의는 일회적인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점진적인 과정이다. 이는 곧 은혜에는 은사가 뒤따른다는 말과 비슷한 차원이다. 여기서 루터가 말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명제는 선험적 명제가 아니라, 오로지 후험적 체험 명제일 뿐이다. 즉 의인과 죄인이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현상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구원의 근거(Heilsgrund)만이 아니라 구원의 보화(Heilsgut)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만드는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다.
은총도 예정 되어있고 멸망도 예정 되어있다는 것이 이중예정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