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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강의 녹취입니다
여기에 나온 문장이 이렇습니다: 적인
구체적인
그렇다면 인간이 해방되는 거죠. 근데 거기서
가능하면 일을 안 하려고 그러죠, 능력이 있어도 능력 없는 것처럼 합니다. 그런
주범에 치우치는 것을 주범
그게 그런
뭐 그런 식으로만 떨어지게 되면 그건
근데 극단적인
근데 개인이 이렇게 똑바로 [음악] 판단하나요? 예, 묵인 사회라는 단어가 또 나왔어요. 사람들이 가능하면 어떤 문제 거리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아 그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다 받아들이는 사회의 특징을 가르쳐서 무긴 사회. 미시브 소사이티라고 얘기했네요, 퍼미지브 소사이티라고요.
이런 사회건 이제 된 겁니다. 그래서 길거리나 공원이나 이런 데 가서 젊은 사람들이 이상한 행태를 보일 때, 기성세대가 웬만해서는 거기에 이렇쿵 저렇쿵 말을 못합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이제 입을 댔다가 "알지도 못하는 늙은 사람이 왜 저러냐?" 이런 식으로 반발할 거거든요.
그리고 또 위험을 당할 수도 있고요. 그냥 "아이, 귀찮다. 나 모르겠다." 그런 식의 사회가 된 겁니다.
그거를 시브 소사이티라고 해요. 그게 지금의 세계예요. 그리고 그 거의 뒷부분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방향 설정은 정말 새로운 가치들, 필요한 것 가치들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이것은 옛날처럼 억압적인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 억압적이지 않고, 해방적 작용을 해야 한다. 이 지난 시간에도 잠깐 비쳤습니다.
자, 오늘 31번째로는 우리가 앞서 이야기가 이어져요. 지금 삶의 여정에서 핵심은
모든 일을 위한 삶을 긍정하는
그리고 가능합니다. 문제는 자기 세계에 딱 갇혀서 오픈 마인드가 되지 않고, 상대방을 자기 생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너무 강하다는 거죠. 열어놓고 대화를 해야 되는데, 합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거, 이게 문제입니다.
그리고 '삶을 긍정하는' 이 책의 전체에 주제를 끌어가는 단어인 '삶', '생명', 생명을 긍정하는 허무주의,
나의 책, "세계
이게 큰 역할을 하신 분이네요. 그 일은 나에게 대단한
그런
거기서 뭐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없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런 표현을 가르치는 겁니다. 광주에 떨어지게 되면, 성도들이 되게 편의로 해석합니다. 독단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거죠.
신자들은 그렇게 손동해 가는 교회 지도자들을, 아, 믿음 좋은 우리 목사님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추정합니다. 악스 아닌 거죠. 한국 교회는 이게 유별히 강합니다.
그 일은 나에게 대단한
세계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정신적으로 극히 까다로운 그 과제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사실 그 과제 때문에 다음 학기 강의 계획도 조정되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 몇 조간 되는 텍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며칠, 몇 달을 들이면 애를 쓴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작업은 나를, 나와 나를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종교 간 수의와 많은 토론과 수정을 동반한 오랜 과정이었다. 종교 간이라고 했어요. 종교, 유대교, 이슬람교,
마침내 우리의 세계
봅시다.
체가, 이 대표적입니다. 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 잠원식의 그 문장으로
일리가 있긴 하거든요. 뭐, 책을 아주 옛날에 도서관에서 대충 훑어보긴 했을 것 같은데, 건 사야겠습. 제가 미리 떠벌리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회구원"이라는 책을 내는도 집필할 생각이에요.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좀 인용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그
[음악] 했다, 18세기 19세기 체 활동할 때에, 1840-44년 출생했다. 그 사람이 유럽의
물론 내가
적대적이지 않거든요. 그거는 중세기 때 교회 안에서 나타났던 하나의 현상일 뿐이에요. 그게 성서적인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행동들의 근거에서 보면 오히려 적극적인 거죠. 결혼식장, 결혼식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 표상을 잔치로 말씀하시기도 하잖아요. 세례 요한은 좀 금욕적인 메시지를 선포했어요.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과는 다른
찾아내면서 그 방향을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히려 그
옛날에는 여성주의 신학은 발을 못 붙이죠. 새롭게 그 방향이 신학 안에 들어온 겁니다. 실현하게 해주는 이정표가 돼야 된다, 이정표, 이정표가 목표는 아니에요.
이정표지,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정표는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는 거잖아요. 이쪽으로가는 손가락이에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흔히는 수천 년이나 묵은 우리의 종교적이고
특히 모든 인간과 각 개인에게 통용되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정치, 경제, 학문, 종교의 지도층도 충실히 따라야 하는 확고한 기준들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무도 지하지 않는 이를 위한 근본
그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있잖아요? 그런 게 매매춘, 유럽에서는 그게 직업이 됐어요, 인정받아요. 그래서 세금도 돼요. 그렇고, 아마 제가 알고 있기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매매춘이라는 그 행위에 대한
그런 문제 갖고 스키가 고민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적으로 떠오르는, 하 예를 들면, 이 있다면 해야 하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종교를 내세워 다른 모든 종교를 반대할 수 없다. 둘째, 우리는 결코 중세나 종교 개혁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차별 금지법 얘기할 때,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 얘기하면 안 된다. 그럼 창피한 거예요.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대두한 것이 뭐냐.
다음이요. 오늘날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과연 무엇인가. 지금 한스님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이 고민을 해야죠.
한국 교회도 정말 그걸 고민해야 됩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