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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8:33-38, 창조절 13주(왕국주일), 2024년 11월 24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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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8:33-38, 창조절 13주(왕국주일), 2024년 11월 24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녹취입니다.
[음악] 오늘 교회일 마지막 주일인데,
그고 여러분, 그 화면에 나와 있죠. 내 나라라고 할 때는요, 바실레야, 바실레이아, 그리고 내 나라는 해석은 뭐죠? 정확하게 잠깐만요. 제가 이거
네가 유대인의
내 나라는 이
그게
뭐, 너무 이제 그게 당연한 표현이긴 한데,
그런데 실레는 손에 딱 잡히는 게 아니라서 도대체
요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그런 것들이 복됩니다. 근데 그게
이 바실레이아와
한반도에 남북 대치 상황이라서 만약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걸 일단 눈치를 채야 돼요. 음, 그건 뭐 다 알고 계시긴 할 겁니다. 음, 근데 그냥
음,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그런 표현들이 있잖아요. 그 까이이 세계의
또 이렇게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오늘 이제
그래서 누구나다 이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데요, 그게 이제
네, 그게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따뜻한 시원한 물 한 잔 주는 행위가 이게 바실레이아에서는 더 뛰어난 거죠. 그게 인정받는
네, 바실레이아와
그러니까
그건 이제 누룩이 그런 일을 하잖아요. 음, 그런 점으로 하나 좀 일단 생각해 보시라는 얘기입니다. 근데, 뭐 그런 것들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그걸 이제 붙이는 이야기예요. 당연히, 당연히 그거는 다른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냥 어머니 아버지에게 군말 없이 달라고 하고, 철부지처럼 그렇게 지내요.
만약에 다 가난한 집안인데, 그런데도 철없는 아이들은 무조건 돈 달라고 하고, 용돈 달라고 하고, 뭐 사 달라고 하고 저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게 있고, 그렇지 않고 그런 아이들을 좀 근근히 생각하면서. 도와주고 감사하는 그런 방식의 삶이 있는 거잖아요.
근데 이 또 하나 중요하게 우리가 설교 전체를 놓고 볼 때 약간 역발상이기도 한 어떤 대목을 좀 생각해 봅니다. 설교 시간에 그런 얘기까지 다 했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핵심은
그게 잘 연결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까 그런
그러니까 여기서
그
거기 전편과 후편, 이번에 나온 건 후편이 영화관에서 본 거. 후편에 전편은 그 뭐예요, 어디 그 영화 이런 거 볼 수 있는, 뭐 뭐 있죠? 그 뭐죠? 거기서 제가 들어가서. 이제 본 거고요, 영화관에서는 "글래디에이터 2편"을 본 겁니다.
근데 전편과 후편 전체에 그 어면면에 흐르는, 그 흐르는 아사사상, 철학 아니면 뭐 그런 게 뭐가 있어요. 근데 그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형제의 어록입니다, 여러 개 나오더라고요. 그 감독이 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 영화에 '
그러니까 그 옆에서 그 참모 역할 한 사람이, 그 참, 그 사람도 야망이 컸죠. 자기가 결국에는 황제가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렇게 조언합니다. "황제, 황제요, 만약에 그렇게 공주를 죽이게 되면, 그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게 십자가를 죽이고 죽이는 사람들은 어떤, 아주 그 정확한 단어는 생각 안 나네요, 어떤 집단과
설교 시간에 간단하게 얘기했습니다. 이제 포로들이 국 검투사가 되는데, 평범했던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서 삶이 무너지잖아요. 그리고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은 그 검투사들의 목숨, 그 유명한 거 있잖아요, 죽여라 살려라.
이제 마지막 검투사가 검투하다 싸움해서 자기가 항복하면, 이제 이긴 사람이 그 항복한 사람의 목숨을 빼냐 안 빼냐 하는 것은 황제가 결정합니다. 제가든 그 검투장에서 최고 높은 사람이 결정해요. 근데 결정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는 하지 않고, 거의 뭐 어떤 청중들이 뭐 살려라 죽여라, 뭐 그런 외침에 따라서 하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로마 시민들이 가학적 쾌감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콜로세움 가보신 분들 계시죠? 예, 거기, 그거는 뭐 로마 시대, 그 건축 공학의 꽃이다, 뭐 할 정도로 대단한 건물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자랑할 건 못됩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인류
되게 그 아주 유명한 그 관광지에 있는 오래된 건물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다 그 권력자의 야망이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놀이로서의 삶,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는
참여한 아이들 중에 부잣집 아이도 있고, 가난한 집 아이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놀이에 하나가 되면 전혀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놀 뿐이에요.
충만하게 노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놀이로서의 삶이, [음악] 실현된다면, 모든 사람이
그 어디 문헌을 찾아보면 그런 것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근데 그게 안 되죠. 안 돼요.
뭐, 공산주의 혁명도 사실은 이런 꿈이 있는 거죠. 근데 그게 실현이 안 됩니다. 비교적으로 얘기하면 이제 죄 때문에 그런 거죠.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살아 있음 자체, 예, 비라고 할까, 존재하는 거 자체. 지금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거, 책을 읽는 거, 누구하고 대화하는 건, 그 자체를
그래서 이런 정답을 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정답이 필요하긴 한데, 그 정답을 아는 것에 머무르지, [음악] 말고, 그 정답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게 다른 겁니다.
두 가지가 정답을 아는 거하고, 그 정답 세계 안에 들어가는 건 다른 거예요. 수영하고 비슷합니다. 수영을 어떻게 하면 잘하는지를 교본을 많이 읽고 설명을 들으면 알아요.
수영 잘하는 정답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아는 거하고 실제로 수영을 하는 것은 좀 다른 거죠. 물 안에 들어가서 그 수영을 직접 자기가 해야만, 그 수영 어 세계에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 있음 자체가
우리에게 가장 크고 놀랍고, 어, 결정적인
이잖아요,
다른 게 뾰족한 게 없어요. 억지로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예배되게 드리고, 좋은 신학 책을 읽고, 그리고 그런데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좋은 교제, 성도의 교제가 있고, 그런 거를 수행의 차원에서 꾸준하게 해나가는 겁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예요.
십자가의 죽음 음과 같은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을 자기 운명으로 드러내신 그
이런 놀라움이 우리
수고하셨어요, 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