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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강의록 녹취입니다,
세대와 세대 간의 갈등도 심각하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가 더 심해지고, 우리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서 나가고 있다는 그 확신이 없죠. 그걸 찾아야 한다, 이정표를 세워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방향을 설정하는가, 왜 얘기해요? 나 자신의 삶의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대안들도 찾아내야 되겠죠. 근데 이슬람의 일부는 완전 테러 리스트들이고, 완전히 중세기 여성관에 머물러 있어서 대화가 안 돼요. 뭐 이렇게 해서는 세계 평화는 요원한 거죠.
다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중국 종교의 학자들과, 또한 세속 이데올로기의 학자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그 구성을 심화하고 확대했다. 그리하여 로마와의 충돌이 있은 지 10년 후인 1990년, 마침내
인류의
갑자기 현생 인류가 이 지구에 나온 건 아니잖아요? 그
맞는 이야기죠. 우리나라 정치가 나아졌나요? 모든 윤리는, 윤리를, 정치 윤리도 포함되고 쟁 윤리도 여기 포함되는 거죠. 윤리를 공산주의는 집단이 나와요.
공산주의는 윤리를 당의 이익으로, 공산당 그리고 자본주의는 경제 이익, 생 재물로 바쳤다. 이제 많은 세계 종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묻고 있다.
이것은 한스 요나스가 이미 1979년에 그의 강령적 저작 "책임 원칙"에서 개진한 바 있다. 그동안 너무 일방적으로 칭송받아 온 시장, 과학 기술, 대중 매체의 세계와는 이 세 가지를 정리해 보아야 한다. 시장, 사고 팔고 하는 시장, 이익을 남기는 것, 시장과 과학 기술, 그리고 대중 매체, 과학 기술 대중 매체, 매스 미디어, 인터넷과 유튜브 등으로 인해서 이제는 훨씬 더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훨씬 더 사적인 영역으로 치우치게 됐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결과적으로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그런 문장에 딱 들어맞는 세상이 될까요? 그 사이에 한탄스럽게 우리에게 금융 시장의 혼란과 에이즈,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열병 같은 새로운 전염병, 범죄, 마약, 테러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들을 세계와도 안겨주었다. 그리고 예측 못할 일이 전혀 아니었던 2008년 발발한 세계 경제 위기는 나에게 다음 같은 통찰을 확정해 주었다.
세계화가 비인간적 결과를 낳지 않으려면 세계와 그렇잖아요, 중국에서 싸게 만든 물건을 우리가 그냥 다 직매입 하고 하잖아요. 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버리잖아요. 인터넷에 대해서는 더 그렇습니다.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지 않으려면 윤리의 세계화도 꼭 필요하다. 제가 최근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세 권의 책을 말씀드렸잖아요. 마르쿠스 가브리엘, "두 개인가 하나인가", 이 사람의 "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뇌가 아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 책을 쓴 이 사람도 윤리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에는 윤리 학자가 꼭 있어야 한다, 정치나 기업 활동이나 모든 분야에서 이 윤리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지금 한스 킹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관점에 윤리의 세계화가 있습니다. 세계를 같이 묶어주는 거예요, 윤리적 아 후대들을 같이 나누는 거죠.
전쟁할 때도 적군은 적이죠, 전쟁시에 적군이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야 된다고 하는 것이 적십자, 무슨 회 이런 데서 세계가 공통으로 동의한 것들입니다. 그런 게 이제
전 세계적인 정치, 경제, 금융 체제의 문제점들을 고려하는 데 일종의
오늘날의 세계는 사실 속성과 종교성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꼭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은
이걸
그러니까 포스트 모던 상태에서는
교회의 많은 남자들처럼 그 과정을 그저 타락이나 탈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측면으로만 보는 것은 나와는 거리 다이단어가 이상이 번역이 이상해요. 교회의 많은 남자들, 남자처럼 교회의 많은 남자들이 그 과정을… 근데 그건 남자라고 번역한 독일화가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원소가 있으면 찾아볼 텐데, 즘에 교회의 많은 그 신부들이 가르칠까요, 사제들? 그럴 것 같은데요.
교회의 많은 사제들이 그 과정을 이건 타락한 거야, 이건 탈 그리스도교 문제야, 이렇게 보는 것과 거리가 말다. 나는 세속적인 포스트 모던한 사람들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는 그런 입장인 거죠. 이 과정들은 물론 방향 성실을 심화시킨 것은 더라도, 우리에게 개인적 자유의 엄청난 증대를 가져다주지 않았는가? 예, 개인주의가
이 방상에서 심리학과 심리 요법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1987년에 그쪽 심리학과 심리 요법까지 나와요. 예, 그런 것도 필요하긴 하겠어요.
현대인들이 어떤 데 심리적으로 치우쳐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면, 사이코 세라피, 심법 이런 걸 좀 알 필요가 있겠죠. 1987년에 깊이 공감하며 지금은 또 프로이트 연구의 몰도 했고, 바각 다시 한 사람이에요. 저 사람 그 덕분에 그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니까 그런 좋은 점도 많이 있죠.
그 덕분에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주는 상까지 받았다. 아무튼 윤리 문제의 농구는 여러 정신분석 학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그저… 억압적인 초자라는 표지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양심은 단지 그릇된 교육에 의해 생성된 억압하는 통제 기구인 듯, 노이로제를 유발시키는 원인인 듯 말이다.
분석이 그렇게 그런 쪽으로만 봤다는 거죠. 다른 한편, 인간의 모든 윤리 문제와 관련하여 그저 양심의 자유와 주관적 판단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편파적이다, 그렇죠? 양심의 자유는 무슨 주관적 전을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교육뿐 아니라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실로 유연한 양심은 어떠한 척도를 따라야 하는가는 물음이 되게 된다.
그러면 내가 이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유롭게 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최고야. 그래서 잘 교육시키고 계몽시키면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 이제 한계가 있는 거죠.
어떤 척도가 있어야 되는 거죠. 자기가 생각대로 모든 걸 마음대로 하는 게 공동 사회에서는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조망할 수 없는 인터넷상의 정보 바다 앞에서, 과연 나의 내심의 나침반을 어떤 좌표에 맞추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가? 너무 복잡한 원하던 세계 속에서 좌표 없이 이리저리 부유할 수 있는 거죠. 유례없는 과학 기술의 진보는 흔히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인류의 윤리적 진보에 대한 물음을 쓸모 없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새로이 불러일으켰다.
윤리에 문제가 과학 기술의 진보로, 기술이 많이 발전했지요. 끝나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다음과 같은 체험을 갈수록 절실해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성취하지만, 자기 자신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 가운데 갈수록 많은 사람이 이렇게 묻고 있다. 윤리적 방향 설정은 어디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냐? 윤리적인 방향을 무엇에 근거해서 우리가 설정하는가는 거죠.
돈을 벌 때도 윤리 문제잖아요. 어느 정도로 벌어야 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세금을 낸다면 얼마나 어떻게 내야 되는지, 의사들의 의료 행위와 수입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성과 근거가 필요한 거죠.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관찰되고 이루어져야 하는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는 많은 선택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과연 어디에서 삶의 길을 찾고 꿋꿋이 걸어가야 하는가? 실패하는 거죠.
특히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연극을 통해서라도 대박을 꿈꾸고자 하죠. 자기 윤리의 방향성을 어디서 찾는지가, 오늘 시대에도 절박한 질문이 됐다는 거죠. 맞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사실 고려하면 물음들은 더 제기되어야 한다. 우리는 개방된 사회에서 개방됐다, 오픈됐다는 거예요. 결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즉, 미확정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학습과 미래에 대한 것으로. 있어서도 개방된, 또 따라서 진리에 있어서도 개방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다행이 다하겠다.
억압적인 가부장적인 질서에서는 벗어난 거죠.
이번 단락이 좀 양이 있어서 빨리, 그 30분 안에 속도를 해서 읽겠습니다. 그냥 천천히 들어보시고, 꼭 필요한 설명은 나중에 달겠습니다. 오늘날 도덕주의적 선과 악의 저편을 니체가 쓴 어떤 그 책의 목에, 선을 공공연하고 원칙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이것은 사실 어린이들, 아니 심지어 유아들에 대한 성추행까지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악을 떠나서 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그러나 예전에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확정된 윤리적 척도들이 흔들리고 있지 않나요? 2009년, 범 나는 영제 대학생들 한 모임, 남과 같은 충격적인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했다. 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고래의 옛날부터 내려온 살해 금령을 위반하는 첫 세대다.
아이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학생이 선생을 살해하고, 청소년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우리 여러모로 폭력에 평범을 경험하고 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죠.
폭력의 문턱이 특히 학교에서 더 낮아졌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도 증가하고 있으니, 큰데 의식을 잃을 때까지 폭음을 하는 데, 자기 자신에 학대를 하게 되는 연령대가 가수로 낮아지고 있다. 물론 이런 비판을 자기 비판 없이 제기하면 안 된다.
칼 발렌틴의 말을 상기하자, 아이들은 교육되고 않으니, 어차피 우리가 행하는 것을 그대로 한다. 젊은 세대는 걸핏하면 부모 세대에는 본보기 인물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에 다르다. 만일 어른들에게 팔꿈치가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가 된다면, 청소년들은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터이고, 그걸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을 갈망하는 많은 정치가의 온갖 중대 거짓말과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인들이 있어요. 상당수 경영자의 지독한 사기와 기만, 그리고 가짜 폭력 범죄와 맹목적 전쟁은 그 자체를 넘어 부정적 본보기로 자한다. 그런 걸 보고 청소원들이 잘...
했으니까요, 이 대물림되는 거죠. 아무튼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삶에서의 수많은 불가피한 결단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는 더는 예, 근데, 근데 초기에 고리 대금 허용 문제에서 윤리 신학자가 그랬듯이, 하늘에서 혹은 축자적 이해한 성경에서 "성경이 이렇게 기록했어" 하는 확고한 윤리적 해답을 가져올 수 없다. 다른 한편, 우리는 더는 피임이나 인공 수중 문제에서 20세기의 교황들이 그랬듯이, 이른바 불변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서 자연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자연법에서 [음악] 인간이라면, 뭐 어떻게 해야지 하는 자연법이 있어요,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날 그 모든 복합적인 문제와 갈등과 관련하여, 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 상황에 맞는 세분화된 해결책들을 거듭하여 다시 모색하고, 또 자주 다양한 전문가들의 공동작업을 통해 찾아내야 됩니다. 이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127 한국 교회, 무슨 무슨 뭐, 200만 어쩌고저쩌고 하는 모임 있잖아요. 이 사람들의 의견을 제가 100%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이 잘못된 거예요. 고민이 없어요, 전문가들의 말도 듣지 않고요.
"성경이 이렇게 기록됐다는" 말로 하는 겁니다. 그
그런 세대가 됐어요. 윤리적 규범들이 역사적 발전 과정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상황에 따라서 저가 알아서 판단하면 되지, 무슨 규범은 무슨 규범이냐?" 이런 것. 아무튼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여겨지고, 진짜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며, 누구나 무엇이든 해도 되는 일종의 묵인 사회, "per soci" 이렇게 돼 있네요. 묵인 사회, 그런 단어는 저도 외워 줘야 되겠습니다.
어, 미시 여기에 직면하여,
손쉽게 많은 세력을 끌어모아서 대중 보유 주식의 어떤 이벤트 퍼포먼스는 방법이 아닌 거예요. 그건 한국 교회가 여전히... 그런데 매달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일종의 맹목적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