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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 10:11-14, 19-25, 창조절 12주(추수감사절), 2024년 11월 17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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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 10:11-14, 19-25, 창조절 12주(추수감사절), 2024년 11월 17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설교복기: 성소에 들어갈 담력
성소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10장 11절에서 14절, 그리고 19절에서 2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청소에 들어갈 담력" 그걸 복기하겠습니다. 이번 설교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소, 영어 성경은 주로 "홀리 플레이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소 하면 성경에 저게 나올 때, 성전을 주로 생각하게 되잖아요.
성전이 아닙니다, 템플이 아니에요, 템플도 아니고, 시나고그, 회당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기오스"라는 헬라 성경에 보면 "하기온"으로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건 어겹 변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원래의 단어는 "하기수",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지성소는 말을 많이 들어봤습니다, 홍소, 회막 있고요 이런 명칭들이 상당히 복잡하게 고대 유대 역사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지금 정확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성소는 단어로는 많이 많이 들었어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지성소가 따로 있어요. 설교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1년에 한 번에는 들어가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의식을 치르는 거죠. 이 성소가 예루살렘 성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 이자는 어떤 뜻으로 이 성소라는 단어를 썼을까? 아, 바로 이 설교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거예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간단하게 해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성소, 거룩한 것, 하나님의 계신 곳이겠죠. 구원이 발생하는 것이겠죠
성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그런데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시킨 핵심이기 때문에 성소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 그렇게 얘기했을 예수 그리스도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는 구원 사건이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그 하늘이다, 그건 말이죠, 여러 가지 용어와 연결되는 거예요. "하기우스"라는 단어는 구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들도 성도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구별된 무리들을 가르쳐요. "다 하우스"라는 단어와 연결됩니다.
구별된 거예요. 이러한 정도로는 우리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별된, 거룩한 곳이 하늘인가? 그 하늘이 어딘가, 하나님의 우편이라 했는데, 거기가 어딘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성소, 지성소 하니까 구체적인 자리를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 그냥 막연하게 "아,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천국" 혹은 "천당, 하나님이 계신 곳" 그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그게 오늘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다가오겠습니까? 하, 데서는 좀 문제가 있는 거죠.
성소, 성소, 혹은 지성소는 뒤에도 이제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게 어떤 건지를.
이야기가 사실은 만만치 않은 거죠. 그 모세가 호렙산에서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선다, 그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그 땅 자체가 거룩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있는 곳 자체가 다른 데와 구별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예, 이사야의 그 스랍들이, 천사 필압, 스랍 천사들의 합창 소리에도 나온 거고 같은 거죠. 어떤 특별한 구원 경험, 생명 경험,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성소 혹은 지성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까마득하고, 보통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우주의 규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게 문제인 거예요. 우주가 얼마나 큰지, 그건 이렇게 설명을 했죠. 은하계 안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천억 개, 그리고 은하가 우주에 천억 개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태양과 같은 별들이 우주에 1천억 곱하기 1천억 있다는 뜻이죠.
0그건 이것도 어린 짐작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더 큰 거예요. 근데 그게 너무 까마득해서 실감이 안 나요. 아득한 거리인 겁니다.
근데 그거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확실하게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실감을 하지 못할 뿐이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이 어떤 거룩함에 대한 경험과 다 있어요.
"소피의 세계"라는 책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스웨덴인 철학 교수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와요.
거대한 몸집의 동물이 있습니다. 코끼리라고 해 봅시다. 그 코끼리의 피부에 작은 세균들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세균들은 그 코끼리의 살, 그게 모든 세계예요. 털들이 많이 났잖아요. 그게 마치 밀림 숲속에 있는 것처럼, 세균들은 그게 자기들의 전체 세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세균 한 마리가 그 털을 타고 올라왔어요.
털 끝에 올라서서 보니까 세계는 다른 모습이에요. 것들이 이렇게 구름처럼, 이렇게 쭉 파도처럼, 아니면 너울처럼, 그렇게 곡선을 그리면서 계속 무한정 있는 겁니다. 이게 '뭐지? 내가 왜 전혀 그 털 밑에 있는 세계와 이렇게 다른 거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런 걸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가르쳐서 철학자라고 얘기한다는 말이 나와요. 이 어마어마한 세계에 대한 실체를 놓치지 않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아니, 뭐 그게 지금 우리가 측정하고, 돈 벌고, 아니면 뭐 사업하고, 아니면 목회하고, 아니면 전업주부로 가정 살림하고 하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지금 하기에도 바쁜데, 그런 거실 세계, 우주, 그런 걸 늘 생각으로 살아야 하냐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뭐 하라 말라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나갑시다. 그게 자기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그게 있다는 건 분명하잖아. 배추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두 가지 이 예가 저에게 굉장히… 인생이 깊었습니다. 하나의 배추 이야기를 들 했던 이야기입니다. 씨앗 하나를 뿌렸는데, 예, 한 5km 크면 그렇게 되거든요.
배추로 잘한다는 거 아닙니까? 무게를 비교한다면 수십만 분의 1 될까 말까 할 겁니다. 배추는요, 그 나중에 다 잘난 배추에 비해서요, 크게도 마찬가지죠.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과 존재의 비밀은 무엇일까?
만약에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처음 와서 씨앗 하나를 보고, 그다음에 배추를 또 나중에 따로따로 이렇게 본다면, 씨앗에서 이런 배추가 나온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수천, 수만 배, 수십만 배로 뭔가 진 거예요. 이게 완전히 마술의 세계와 같습니다.
이게 기적이죠. 기적이에요. 이게 왜 이래야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씨앗이 몇 날 지나면 물과 땅 속에서 뭐가 돼서, 이런저런 영양분하고 등등이 돼서 싹이 트고, 한 달 지나면 어떻게 되고, 그런 설명을 할 수 있어요. 근데 왜 그래야만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르는 거예요.
이란 말은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다 있습니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이렇게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 존재하는 것과 무, 이게 왜 이래야만 되는가, 그걸 모릅니다.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 철학 그런 책들이 있잖아요.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그런 책을 썼고요. 또 어떤 다른 철학자들은 "세계는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 근원적인 비밀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 세계가 성소 혹은 지성소라는 단어가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도 그게 틀린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의 비밀, 그 신비한 것들은 하나님의 행위이니, 거룩한 곳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있습니다.
이 배추 씨앗에서 배추가 자라는 이 놀라운 현상 앞에서 우리는 거의 신적인 경험을 하는 겁니다.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 경험도 못 해요. 그건 이제 또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 설명했는데, 궁극적인 미래라고 생각해 보자, 그 미래를 생각해 보자.
우주, 거시 세계와 배추, 그 일상의 세계. 더 작게 들어가면 양자의 세계, 미시의 세계. 이게 그냥 어떻게 현상하고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지, 왜 그래야만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설명하면 그다음에 또 질문이 나오고, 또 질문이 나오고 그래요. 이런 이야기는 제가 여러 번 했습니다. 근데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 분들이 많아요.
지금 하는 일이 바쁘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혹은 너무 골치 아파서,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하다가 죽겠죠.
시간이 되면 이런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문제 의식을 느끼고 한다고 해서 당장 삶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여전히 고민되고 힘들고 그런 것들은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걸 붙들고 있어야 돼요, 그 화두라고 합니다.
이건 뭐 불교, 선승 불교의 깨우침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요, 화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 태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뭐 늘 기도하라, 뭐 감사하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뭐 등등이 다 여기 연관되는 겁니다. 음, 그러한 신앙의 내용들이 실용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별로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근데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성가가 되는 겁니다, 신학자가 되는 거고요. 신학 박사 하기를 받지 못했다고 안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으로 생각하면 그 신학적인 거죠.
궁극적인 미래 쪽으로도 생각해 보자, 지성소를 말할 때 그런 설명을 한 겁니다. 우주의 크기, 너무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실감이 안 나지만, 그건 분명한 것처럼. 그리고 그쪽으로 우리의 영적인 촉수가 각 받게 되면,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에 완전히 집배 당하지 않은 거잖아요.
그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죠. 하나님, 우주 전체를 창조했다고 얘기하잖아요. 어마어마한 이야기 아니에요? 그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생각해야지, 안 그래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 믿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어떻게 신앙이 자리를 잡겠습니까? 예, 백만 년도 금방 지나가 버리잖아요.
그러면 100년도 못 사는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100년이라는 인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 역사, 생명 통치에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 거기에 사로잡혀야 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100년 동안, 어린 시절 빼고, 늙은 시절 빼고, 한 50년, 60년 열심히 뭐 내고 살아봤자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얘기하면서 하나님 나라 선포의 전복성 얘기했어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로마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 죽은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복성 있는 거예요, 체제를 뒤집는 거예요.
뭐, 꼴지가 첫째 된다, 뭐 그런 얘기 비슷한 것도 있죠. 늦게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라든지, 가난한 자가 부요하다는 말씀, 뭐 그 외 모든 사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다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겁니다.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때려서 엎어버리자, 그게 그런 얘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관이 완전히 새로워진다는 거예요.
한국 교회가 지금이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됩니다. 전복은 커녕 이제 체제 유지할 경우가 많죠. 그걸 좋은 뜻으로 시민 종교라고 합니다.
시민 종교가 되는 거야, 부르주아 종교가 되는 거예요.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좋은 시민을 양성하는 종교가 되는. 겁니다.
그럼 말 잘 돼야지, 헌법 전수 잘해야지, 아직 기존에 있었던 나라의 모든 체제, 이런 것들을 인정해야지, 그리고 서로 노력하고 착하게 저렇게 해야지, 좋은 시민 되는 거, 여기 전 복숭아 들어갈 수 없어. 아주 옛날에 릭 워렌 목사 설교를 봤을 때, 미국에 전형적인 부르주아와 종교의 모습이 거기 나타났더라. 그리고 한국 교회도 완전히 유치하게 기복주의 신앙으로 [음악] 떨어지든지, 아니면 은사주의 떨어지든지, 또는 이렇게 시민 종교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신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시민종교 아니라 복을 붙들고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빈부격차와 신앙의 자유는 어떤 관계인가?
그 간단하게 한 가지만 [음악] 얘기하면, 빈부격차를 줄여야 되는 거죠. 빈부격차, 그런 쪽으로 교회가 힘을 모아야 되죠. 그리고 차별하는 시스템을 고쳐 나가야 되는, 그래서 차별 금지법 같은 건 기독교가 먼저 앞장서서 해야 되는, 주장해야 되는 겁니다.
근데 그 지금 반대하자는요 [음악] 동성애는 죄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 차별 금지법을 만들면 결국 동성애가 용되는 거고, 동성 부부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과 배치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성소에 들어갈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얻느냐면, 예수에서 자유로운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죄책감, 내가 사회에서 인정받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지이 이렇게 걱정하는 거, 그게 죄책감, 그게 악한 양심이 열등감이라고 할 수 있었고요. 큰 경쟁에서 낙오자가 되면 큰일 나지, 이러면 내 인생이 완전히 망했어, 그런 생각들이 감입니다.
아주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느 사회에서나 낙오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 샬라 수가 없어요.
근데 그 낙오가 되는 사람 것도 어느 수준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음악] 사랑이 더 앞선 사람 못지 않게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교 신앙의 핵심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죄책감에 묶여 있는 거는, 그 성소, 거룩한 곳, 하나님의 생명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없는 거죠. 그런 거고는 그냥 거칠게 얘기해서, 그래 내가 노숙자가 돼도 걱정하지 않는다.
0거기에도 태양빛을 받을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자유가 있다, 이 생각한다면 그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 자유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재단당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진다면 그거 바로 성소에 들어간 사람인 거예요. 네, 그게 이제 예수의 피로 된다고 말씀해요.
뭐 그거는 여기서 다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문제 시인의 유모차라, 시 음인을 전문을 제가 읽어 드렸어요. 아고 집이 바로 제 옆에 있었는데 안 보이네, 잠깐 보입니다요.
시집이에요, 맞죠? 혼자의 넓이가 2021년도에 샀습니다. 여기 유모 잘라는 시, 나 인상 깊었습니다. 유모차의 유모가 없다, 아기도 없다.
쭉 그렇게 되죠, 맨 나중에. 마지막 연이 막힌 세 줄로 되어 있습니다. 막힌 실, 짤막한 면이에요.
유모차 줄 바꿔서 손 넣으면, 거기가 운도 좀 살렸네요. 유모차 손 넣으면 거기가, 거기가 뭐라는 얘기일까요? 거기가 거기가 죽음이라는 뜻일까요? 지옥이라는 뜻일까? 불행이라는 뜻일까? 거기가, 혹은 유모차 손 놓으면 거기가 천국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자유라는 뜻일까요? 예, 그 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실을 고기서 끝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 참 불행한 인생이다, 그런 뜻으로 이 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면 이 사회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인생이에요. 그러나 이 시인이 그런 뜻으로 이 시를 썼겠죠. 동종 심을 불러일으켜서 그런 사람들 돌보자, 그런 뜻으로 이 실을 썼겠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유모차 손 놓으면 거기가 불안,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죠. 설교 시간에는 그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설교 핵심에서 약간 옆으로 벗어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이 유모차 안에 빈병, 박스, 휴지 박스 이런 걸 끌고 가는 기억자로 꺾인 허리, 등이 꺾인 노파의 모습이 그렇게 불행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아니, 불행하지 불행한 건데, 아 근데 아주 삶의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그는 그렇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어요. 우리는 지금 그런 일을 못 하잖아요? 근데 그 그림처럼 그려지는 그 장면에 그분은 그 일을 감당하고 있어요. 좀 비하되는 말인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비슷한 모습들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죽을 때 사람들이 다 조롱했고, 예수도, 아 난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거다, 나를 버리십니까? 그렇게 절규해 있어요. 그 어떤 사람도 저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그 노파도 어떤 한 생명의 차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요. 그림 좋은 인생도 있고, 우리가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데 그건 우리의 판단이 그 노파가 유모차를 끌고 가면서, 우리보다 더 생명의 깊이를 경험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히부 수 있겠습니까? 거꾸로 가장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 저기 운전 기사까지 대동하면 재밌는 대로 모두 다니는, 그리고 여기저기 이름도 내고, 뭐 자선기금도 내고 하면서 완전히 존경받는다고 하는 그 사람의 영혼이 병들어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마지막 대목에 이런 얘기 있어요.
성소와 신앙의 자유는 어떤 관계인가?
성소의 현재성, 그 성소 삶의 아득한 깊이, 하나님이 미 계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깊이, 그게 죽음 이후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역사적으로 일어난 그 사건이 이 가리키고 있는 그 구원의 아득한 깊이를 안다면,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자유가 추수 감사절의 핵심 가치가 아닐까, 이렇게 말을 마쳤습니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우, 여기까지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