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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나라 (골 1:1~14)

성령강림절 조회 수 2805 추천 수 0 2022.07.11 08:45:52
설교보기 : https://youtu.be/ge3HPFAb2CY 
성경본문 : 골로새서 1:1~14 

아들의 나라

1:1~14, 성령강림 후 5, 2022710

 

 

아들의 나라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골로새서는 아주 적은 분량의 문서에 속합니다. 4장밖에 되지 않으나 그 무게감은 상당합니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가 혼합된 이단의 위협으로 시달리던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향한 가르침이라서 신학적인 성격도 강합니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이단이 내세운 특징은 예를 들어서 할례(2:11), 먹고 마시는 절기 지키기(2:16), 특정한 음식 먹지 않기(2:16), 금욕적인 삶(2:20~23) 등등입니다. 이런 조건들은 표면적으로 그럴듯하고 나름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이런 비본질적인 일에 기울어지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위태로워지기에 정통 교회는 이를 경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대목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1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이 문장의 골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입니다. ‘아들의 나라는 헬라어 βασιλεία τοΥοῦ’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나라’(바실레이아)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 갈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그 나라가 하나님의 다스림이듯이 아들의 나라는 영토가 아니라 아들의 다스림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의 그 영생도 어떤 우주 공간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주 어디를 가도 천국, 즉 하늘나라라는 공간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한 공간적인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오해도 벌어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거주하는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장소와 세속적인 장소를 분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언젠가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 도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가리켜 시오니즘이라고 합니다. 이를 실현하려고 그들은 그 지역에서 지금도 영토 분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아들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그 아들의 사랑, 아들의 생명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요즘 땅이나 집을 사듯이 돈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등기 절차를 거쳐서 우리의 완전한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나라에 우리가 참여할 뿐입니다. 평화나 기쁨과 안식을 우리가 돈으로 사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비유적으로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물고기들은 바닷물을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바다가 오염되었다면 물고기는 죽거나 병에 걸릴 겁니다. 바다가 살아있다면 물고기는 당연히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은 우리가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서, 마치 오염된 바다에서 깨끗한 바다로 옮겨진 물고기처럼,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즉 구원을 얻은 겁니다. 여러분에게 아들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영혼의 자유를 짧게라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종의 나라

아들의 나라와 대립적인 개념은 종의 나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라고 말했습니다. 종은 주인과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 증서를 기준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유대인에게 그 계약 증서는 율법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토라라고 합니다. 모세오경만이 아니라 여러 구전 율법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율법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들입니다. 삶의 기준을 율법에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대인의 정신문명이 상당히 고급스럽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21세기도 율법 중심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요즘 용어로는 법치 사회라고 합니다. 헌법과 법률이 율법입니다. 법치 사회는 통치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기분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법에 따라서 결정되니까 상당히 고급스럽고 합리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법이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해서 법을 바꾸고 유권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도 그렇습니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지, 억울한 피해자가 생겼을 때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를 법이 다 다루지 못합니다. 민사재판으로 들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부모가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식들 사이에 재산 분쟁이 종종 벌어집니다. 심지어 교회 문제가 세속 법정에서 다뤄지기도 합니다. 이런 법치 사회가 곧 본문이 말하는 종의 나라입니다.

종의 나라에서는 계약이 작동원리이기에 참된 만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해의 충돌을 계약과 거래 메커니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봉 액수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최저임금을 얼마로 해야 할까요? 기업가는 가능한 한 낮추려고 하고, 직원은 높이려고 할 겁니다. 거꾸로 작동하는 회사가 없으란 법은 없겠으나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각자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니까 종의 나라에서는 삶 자체에 대한 만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정 욕구만 기승을 부립니다.

요즘 날씨가 보통 더운 게 아닙니다. 웬만한 가정에는 에어컨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지낼 만합니다. 이외에도 현대인은 인생을 즐길만한 좋은 환경 가운데서 삽니다. 휴가를 떠날 수도 있고, 손쉬운 방식으로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조건이나 환경으로 인해서 행복을 얻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져도 거기에 쉽게 익숙해져서 더 좋은 환경을 찾습니다. 재미있고 편안한 환경을 끝없이 찾고 있으니 어떻게 행복을 얻겠습니까. 젊은 분들은 제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도 이해해주세요.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단칸방에서 지낸 기억이 생생합니다.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도 없었습니다. 부채 하나로 한증막 같은 집에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지금 쪽방촌에서 어렵게 지내는 분들보다 당시 형편이 더 나빴습니다. 요즘 우리 사는 모습을 보면 거지에서 왕자로 신분이 바뀐 겁니다. 그런 정도로 똑같이 행복감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종의 나라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교양을 갖추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위치에 올라가도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유로운 삶

아들의 나라는 종의 나라와 다릅니다. 계약과 거래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온갖 정략과 권모술수가 무의미해집니다. 의무감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영혼의 자유로 삽니다. 종은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아들은 허락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허락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평가받으나 아들은 평가받지 않습니다. 이미 아들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먹지 말아야 할 부정한 음식을 세심하게 가려냈으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문제에서도 자유로웠습니다. 안식일 문제가 예수 당시에 뜨거운 이슈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안식일에는 그 어떤 노동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바꾸면 주간 노동시간을 강제하는 법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강제하지 않으면 인간은 노동의 노예가 됩니다. 문제는 안식일 법이 도그마로 작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장애인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예수가 고발당했습니다. 아들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계약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삶에 대한 태도와 직결됩니다. 아들의 나라로 옮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겁니다. 사람이 만든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허락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자유를 얻은 겁니다. 이 자유는 소극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될자유이고, 적극적으로는 해도 되는자유입니다. 사람에게서 심사받지 않을 자유라는 뜻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비슷한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인생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100명 직원이 있는 회사가 있다고 합시다. 신입사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직원과 똑같이 직장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을 배우기 위해서 입사한 사주의 아들, 또는 딸입니다. 이 사람은 사주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내색을 보이지 않고 다른 이들과 똑같은 태도로 일합니다. 이 사람은 연봉 계약에 묶여서 일하는 게 아니라서 영혼이 자유롭습니다. 종에서 아들이 된 것입니다. 삶의 차원이 의무가 아니라 허락받음이 차원으로 올라선 겁니다. 책임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겁니다.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고 말했습니다. 계속 당근과 채찍으로 강요당하고 세뇌당하는 세력에서 벗어난 겁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흑암의 권세에 놓인 삶을 당연하다고, 혹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그런 방식의 삶 말고는 배운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량이나 개혁이 아니라 혁명에 가깝습니다. 계약문서를 폐기함으로써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 방향 전환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아들 안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는 사실을 14절이 조금 더 풀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 속량(redemption)은 종의 신분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돈을 내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속량에 필요한 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종의 신세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 속량은 곧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은 담이 해체되었다는 뜻입니다. 노골적인 비유를 들면, 연봉 1억 원은 벌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강박에서 연봉 1천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비약입니다. 이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비현실적인 주장일까요? 요즘 말로 정신승리에 불과할까요?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해도 그러려니 하라는 게 아니니, 오해는 없기 바랍니다.

여기서 그 아들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이 어머니 배속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아니듯이 우리가 문자적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 안은 예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다스림은 예수가 경험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예수가 인식하고 경험한 하나님은 기계적인 작동원리가 아닙니다. 옥황상제가 아닙니다. 진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세상 너머에서 자신들끼리 희로애락을 만들어가는 신이 아닙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말로밖에는 더 마땅한 말이 없을 정도로 예수의 인격과 깊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여기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는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질 수 있으며, 율법도 폐기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운명을 지켜줄 수 있는 대상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율법도 아닙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고 동생들도 아니고, 친인척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께만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죽음마저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감람나무가 많다 하여 감람산이라고도 부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마지막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가능한 한 십자가 처형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십자가 죽음은 그야말로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자신의 확신마저 부정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다 그런 생각으로 삽니다. 그런데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자기 생각과 확신마저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절대적인 신뢰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이제 예수처럼 하나님만을 믿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선포가 그들에게 생생하게 경험되었습니다.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지금 다시 살아서 자신들과 함께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더 정확하게는 예수의 믿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더는 율법의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종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들의 나라는 곧 믿음의 나라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유와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겁니다. 믿음을 세상의 과학이나 지식이나 재물보다 수준 낮거나 모양이 빠지는 것으로, 또는 우리 삶과 관계없는 순수 이데아로만 보면 크게 착각하는 겁니다. 믿음은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는 참된 능력입니다. 흑암과 허무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바로 그런 믿음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종의 특징인 의심의 삶에서, 아들의 특징인 믿음의 삶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예수의 믿음 안에서 여러분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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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4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8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0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3
»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5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6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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