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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주현절 조회 수 2490 추천 수 0 2023.01.22 19:51:27
설교보기 : https://youtu.be/NrgejrsJovw 
성경본문 : 마태복음 4:12~23 

가버나움 사람

4:12~23, 주현 후 셋째 주일, 2023122

 

 

마태복음 4:12, 13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관한 간략한 보도입니다. 그 보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체포 이후에 예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즈음에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으로 거주지를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그곳에서 살려고 왔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미 앞에서 예수 가족이 애굽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로 돌아왔으나 헤롯의 뒤를 이은 아켈라오 왕이 두려워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았다고 짚었습니다.(2:23) 나사렛에서 살았다.’라는 헬라어 카토케센’(κατκησεν)영어로 ‘he dwelt’, 그는 (거기서)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버나움 이야기에도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살았기에 나사렛 사람이라는 호칭이 붙었다면 가버나움에서 살았으니까 가버나움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됩니다. 정리하면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고, 고향은 나사렛이며,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거주지는 가버나움이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지역은 예루살렘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으로 불린 근거를 사 11:1로 보았듯이 가버나움이라는 지역도 사 9:1, 2절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 구절(4:15, 16)은 예수의 소명 및 운명에 직접 연결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여기에 언급된 스불론, 납달리는 열두 지파의 명칭입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에서 볼 때 변방이며 오지입니다. 이를 총칭하는 이름이 갈릴리입니다. 예수께서 어릴 때 자란 나사렛도 갈릴리이고, 새롭게 거처를 마련한 가버나움도 갈릴리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근거로 갈릴리 지역에 생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겁니다. 그 빛은 가버나움에서 살기 시작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자리한 어촌입니다. 예루살렘의 시각으로 변방이긴 했으나 인근에서 가장 번창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유대인 회당이 있었고, 로마 세관도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마 4:18절 이하를 따르면 가버나움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대표적입니다. 9:9절에는 세관원이었던 마태를 부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룟 유다 외에 나머지 제자들 모두 가버나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얼마나 오래 사셨는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잠깐 지나가듯이 머문 게 아니라 그곳에서 상당 기간 실제로 사셨을 겁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곧 제자들이 어부 일을 즉시 때려치우고 따른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친구처럼 지냈겠지요. 평소에 예수께 많은 이야기를 이미 들었고, 그들의 마음이 천천히 동요되었을 겁니다. 어느 순간에 자신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결단이 서서 출가한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순전히 추정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일용직 목수로 생활하셨을지 모릅니다. 외지인으로 그곳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가버나움에 사는 친구나 지인이나 친척에게서 집 방 한 칸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신 적이 있을 것으로 보아(1:21) 가버나움에서 랍비로 사셨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겠지요. 가능성이 작긴 하지만, 예수 가족이 함께 가버나움으로 이사 온 경우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어떻게 생활하셨는지를, 즉 사생활에 관해서는 복음서 기자들은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마태복음 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가버나움으로 이사 온 예수님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빛이 왜 필요한지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어둠이 아니라 이미 빛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기껏해야 사업이 망했다거나 암에 걸렸다거나 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정도로 여깁니다.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평안하면 흑암과 그늘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깁니다. 저는 앞에서 나사렛과 가버나움이 유대 지역에서 볼 때 변방이요 오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은 2등 시민이고, 유대와 예루살렘 주민은 1등 시민입니다. 우리나라도 큰 틀에서 수도권, 특히 서울을 1등 시민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지방 대학교가 모집 인원을 채우기 힘든 이유는 젊은이들이 온통 인 서울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상이냐 아니냐 하는 건 접어두고 지방을 변방으로 보는 건 분명합니다. 일전에 경남 산청군보건의료원이 연봉 36천만 원을 받는 내과 의사를 10개월째 구하지 못했다는 보도를 읽고, 믿기지 않기는 하나 어쨌든지 오늘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는 거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나사렛과 가버나움 같은 변방에 사는 사람들을 촌놈으로 보았습니다. 흑암이요, 사망의 땅이요, 그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이 오히려 흑암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나 나사렛에 사는 사람 사이에 근본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이나 가버나움의 랍비나 모두 똑같은 하늘 아래서 똑같은 땅에 두 발을 딛고 삽니다. 모두 똑같이 하루 두세 끼 밥을 먹고 일정하게 배설해야 합니다. 똑같이 사랑하고 미워하며 즐거워하고 힘들어합니다. 서울 일류 카페에서 비싼 돈 내고 마시는 커피나 시골 다방에서 반값 내고 마시는 커피나 커피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다를 게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에 산다고 해서 더 재미있다거나 사람이 뜸한 시골에 산다고 해서 외로운 게 아닙니다. 가끔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베리아 툰드라 같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큐멘터리로 나옵니다. 그런 곳에서는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닙니다. 나름 럭셔리하게 사는 오늘 우리의 눈에 그들은 불행하게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무조건 문명과 담을 쌓고 척박하게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사는 방식과 우리가 사는 방식이 크게 차이가 나는 듯이 보이겠으나 근본에서는 별로 다를 게 없다는 뜻입니다. 화려한 대형 교회당에서 많은 교인이 예배하나, 우리처럼 반지하 작은 교회당에서 적은 수의 교인이 예배하나 본질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듯이 말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모릅니까.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는 실감이 안 된다는 데에, 또는 어느 정도 실감해도 그걸 뚫고 나갈 힘이 크게 부족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끌이라는 신조어에서 확인하듯이 실제로는 흑암과 사망의 땅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삽니다. 그런 삶이 익숙해지면 빛을 빛으로 느끼지 못하고 빛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이나 자녀가 세상에 푹 빠져서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으로 사는 게 좋은지, 가난해도 예수를 인생의 빛으로 바르게 잘 믿고 사는 게 좋은지를 선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마태복음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중에 빛이라는 메타포를 명시적으로 묘사한 복음서는 요한복음입니다. 1:9,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명과 진리를 보고 깨닫고 느끼게 하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인 리얼리티, 즉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알아야 우리 영혼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위암 수술을 앞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수술에 관해서 자세하게 알면 겁은 나겠지만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수술대에 눕습니다. 전후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의사가 칼로 자기 배를 연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낍니다. 명의가 두려워하는 환자에게 수술에 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 주듯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로 선포했고, 자기 운명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내용이 바로 그것을 압축적으로 가리킵니다.

 

이 때부터 (가버나움에서 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하라.”라는 헬라어는 메타노에이테입니다. 명사는 메타노이아(회개)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걸 의미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쪽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그걸 우리의 일상 용어로 바꾸면 사랑입니다. 때로는 정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쁨이나 평화나 안식이기도 합니다. 태양 빛이 프리즘을 통해서 일곱 색깔로 보이듯이 하나님의 다스림도 각각 다르게 인식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사람의 영혼이 그렇게 풍요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영혼의 풍요로움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인생에 있을까요? 그리스도인 치고 이 사실을 모르거나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면 머리로 알아도 실제로는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당시에 유대민족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종교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나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지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종의 고소공포증과 같은 그 지배 메커니즘을 근근이 버텨내면서 살았습니다.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운명입니다. 안식일에는 오백 걸음 이상 걷지 말아야 하고, 불을 피워서 요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에 환자를 고친 예수 행위는 자신들의 그런 율법 전통을 위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지배 메커니즘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안식일 전통을 해체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걸 알면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여러 모양의 허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성경이 무엇인지 알며, 사도신경의 내용을 알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나요? 제가 조금 더 안다고 해서 아는 체하는 게 아니라 모르면서, 또는 대충 알면서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커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모르는 정도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잘못 아는 걸 확신할 때, 속된 표현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태가 훨씬 심각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은 지옥에 가는 게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머리에 그려진 지옥은 유황불과 구더기와 악마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줘야 예수 잘 믿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목사들도 있긴 합니다. 성경에 그런 표현이 가끔 나오지만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반어법이지 실제로 그런 지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일정한 사람을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떨어지게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거꾸로 천국에 가서 큰 상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천국에 무슨 상이 따로 있겠습니까. 천국 자체가 상인데요. 다른 이보다 더 큰 상을 받을 욕심이 있다면 그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가 있는 겁니다. 지옥이 두렵거나 천국 상급이 갈급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흑암에 갇힌 사람입니다. 빛을 못 본 사람입니다. 가버나움 사람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선포한 하늘나라를 향해서 회개(메타노이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빛으로 경험하는 게 무엇인지를 오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개인 주택에 한밤중에 전기가 나갔다고 합시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합니다. 전기를 잘 아는 사람이 고치자 전기가 들어와서 집안이 밝아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천천히 그 세계가 눈에 들어옵니다. 전깃불보다는 보일락말락 하는 작은 촛불로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그 촛불이 두 개가 되고, 다시 세 개가 되면서 주변 사물이 조금씩 분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촛불보다는 반딧불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합니다. 한여름 밤 숲속이나 개울가에서 반딧불을 보셨는지요. 아니면 어떤 사람이 비가 쏟아지는 캄캄한 들판을 방향 감각 없이 걸어가는 중에 번개가 쳐서 방향을 잠시 잡는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천천히 길이 보입니다. 사물이 조금씩 분명하게 보입니다. 아주 천천히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다시 보이지 않는 순간도 경험할 겁니다. 포기하지 않고 빛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점점 더 그 빛을 크게 느끼고, 따라서 자기의 삶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8:38) 따르면 그는 하나님을 본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다른 건 좀 부족해도 좋으니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일만은 양보하지 말고 꾸준히,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붙들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모를까 빛 자체이신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니까요.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쫓기기에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어려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그물을 버려두었듯이 우리도 일상의 일정 부분을 버려둘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연봉을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러 줄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연봉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는 일을, 즉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말아야겠지요. 그래야만 우리는 생명의 빛을 환하게 경험하는 데까지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 올 한해 영혼의 눈이 더 밝아져서 우리 삶의 근원을 더 깊이 더 시원적으로 풍성하게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빛이신 예수께 더 가까이 가야겠지요. 안심하고 그분께 접근해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를, 그가 자기의 삶을 왜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겼는지를, 왜 제자들을 부르셨는지를 실감해보십시오. 어둠이 천천히 거치면서 생명의 빛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멘.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January 23, 2023
*.118.81.227

poco poco


조금 조금, 야금 야금


말씀으로 기도하여

영 안으로 들어가면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된다.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되면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러

그분과 동일한 형상이 된다.


조금 씩 조금 씩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에 이르러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인격과 형상에서 주님과 같이 된다.


말씀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조금 조금, 야금 야금 죄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 간다.


낙타 코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낙타가 춥다고 방안에 코만 넣겠다고 하여 주인이 허락하였다.

낙타는 코만 따뜻한 방안에 대더니 차츰차츰 들어와 주인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베짱이 다리를 경계하라.”는 말도 있다.

베짱이가 여름 내내 놀다가 겨울을 맞았다.

개미집에 와서 너무 추우니 다리만 들어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개미는 불쌍하여 허락하였다.

베짱이는 처음에는 다리만 개미집에 넣었다.

그 후에 조금씩 더 들어오더니 개미집을 점령하였다.

황제의 금수저를 조심하라.”는 말도 있다.

어느 황제가 금수저로 식사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한 충신이 황제 곁을 떠나려 하였다.

 

왜 떠나려느냐고 다른 신하가 물었다.

금수저를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저 황제는 이제 끝장이다.

곧 금띠를 달라고 할 것이고, 금 그릇을 사용하고 싶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을 금으로 바꾸고 싶어 할 것이다.

사치의 시작이다. 저 황제가 망할 징조다.

그리고 그 충신은 황제 곁을 떠났다.


주님은

조금 조금 야금 야금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올까

조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나

말씀으로 기도하여 영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3, 2023
*.151.5.10

포코 포코!!

브니엘남 님의 기도문대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도 조금씩 앞으로, 또는 깊이로 

들어가는 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소나무 뿌리를 뽑는 식으로는 장사꾼은 될지 몰라도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바울의 그 영적 체험에 이르기가 어렵겠지요.

남은 설 연휴 잘 보내세요.

profile

[레벨:41]새하늘

January 27, 2023
*.126.124.2

[신학수다방17탄 크리마스의 어둠]에 소개된 

흑백 영화 마태복음(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이 생각 납니다.

영화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데 마주쳐 오는 행인들에게 소심하게 혼자 중얼거리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을 보고 크게 웃었습니다.

이 장면이 저에게 크게 다가 왔습니다.
영화이지만 예수님을 참 소심하게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카리스마의 절정에 있는 분이 있다는 것에

다시 고민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의 아들로서 갖는 약자들이 겪는 고통, 번민, 소심한 모습 등을 생각하면

더 친근히 다가온다고 봅니다.

영웅의 서사 즐기기를 내려 놓고,

엉클어진 머리와 초라한 모습의 시골 촌뜨기의 소심한 듯한 예수님 상상하면

어부, 세관원, 간음한 여인, 병자, 과부 등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시는 주님,

이렇게 한번 그려 봅니다.

그렇다고 신성모독은 아니겠지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7, 2023
*.151.5.10

'소심하게 혼자 중얼거리는 예수' 상은 우리에게 낯설기는 하나

새하늘 님의 설명을 듣고나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서사와 결을 달리하는 예수 상이 

오히려 실제 예수와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새하늘 님의 설명이

신성모독은 전혀 아닙니다.

이런 부분을 저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오늘밤 유달리 별빛이 강렬하네요.

중천에 뜬 상현달도 눈이 부실 정도네요.

역시 밤하늘은 겨울이 제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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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8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20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13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34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68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8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6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75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1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2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78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37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55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57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9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43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40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56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94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91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10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9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50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70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70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11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04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92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45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34
»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9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68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34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43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97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64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87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81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10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71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01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7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41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45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28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9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80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63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9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73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03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01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77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5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16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03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25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15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9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52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0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1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75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8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68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27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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