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해석학과 성서

기독교해석학 조회 수 7752 추천 수 213 2004.06.30 22:18:45

1장
해석학과 성서

-성서 해석의 유형론적 연구-

유럽에서 해석학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에 연원을 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뿌리가 오래 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성서 주석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에르마허가 신학자라는 사실은 이에 대한 반증이다. 그런데도 신학은 해석학의 기독교 전통을 상실한 채, 즉 해석학의 지평이 열리기 이전의 교회 권위 안에 안주하거나 단순히 도그마에 묶인 채, 또는 사회과학 이론에 치우친 채 그런 해석학적 성격을 방기하고 있다. 특히 신학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설교는 해석학적 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번 학기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이 과목 ‘기독교 해석학’에 들어가기 앞서 성서해석학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모든 신학 작업은 기독교인의 영성을 조명해주어야 할 설교에 직면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학이 직접 설교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설교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을만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현실성을 놓치고 말 것이다. 아래는 2004년 2월1일 ‘샘터교회’에서 행한 설교 “구름 타고 오십니다”(계 1:4-8)의 일부분인데, 이 설교가 성서 해석의 바람직한 방향을 약간 잡아줄 것으로 기대한다.  

<전략>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가 현재, 과거, 미래와 연관해서 설명되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특히 미래의 차원에 관심을 갖습니다. 요한이 7절에서 구약 다니엘을 인용하면서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미 과거에 계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분은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입니다. 현대 학문을 어느 정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구절 앞에서 매우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오공인가, 구름을 타고 다니시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승천 당시의 광경에 대한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에 싸였다고 합니다. 흰옷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이런 전승과 다니엘 전승에 기대서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이 요한의 편지를 읽고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 구름을 실제 구름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상징으로 생각했을까요? 이런 질문은 그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성서를 읽는 오늘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아주 일부의 사람들은 실제 구름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의 연장선 속에서 하늘나라를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매우 신앙심이 깊은 것 같지만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무조건 믿는 거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설득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강도만 따진다면 이단과 소종파가 한 수 높습니다. 제가 현풍에서 목회를 할 때 통일교 신자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2,3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떠났습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목사님의 설교나 가르침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꿈을 꿀 때마다 문선명 선생이 나타나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통일교로 가야겠습니다.” 자기 교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은 거꾸로 믿음이 상실될지 모른다는 불안의 역반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안을 쉽게 처리해버리려는 편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그런 분들의 소박하고 열광적인 신앙을 무조건 백안시하거나 비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보도를 단순히 고대인들의 무지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무시하는 가벼운 현대주의보다는 그들이 비교적 낫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나쁘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와 자연과학적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요한계시록의 ‘구름’을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보도들은 성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보다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부각시켜야만 기독교가 살아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보다 문자주의자들이 그래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이런 문자주의자들에게는 기독교 전승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바르게 해석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텍스트가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주의자들에게는 그런 기독교의 전승과 텍스트 자체가 상실되고 말기 때문에 훨씬 위험합니다.
<중략>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신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어떤 리얼리티를 담고 있습니까? 궁극적인 생명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게 바로 이 전승이 담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리얼리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건에서 이런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드러났던 생명 사건은 다시 은폐되었습니다. 그게 곧 예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이 곧 사도신경에 적시되어 있듯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이제 때가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생명의 세계로부터 오시기 때문에 그 방식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구름타기의 방식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화적 방식으로, 묵시사상이라는 장르의 방식으로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생명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구름 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런 기독교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며, 따라서 승천한 그가 다시 와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 옳습니까? 물론 옳다고 믿으니까 기독교인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기초에 충실하려면 이런 신앙 형식과 연관된 문제들을 훨씬 깊이 있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의 우리에게 온다는 이 생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생명에 대한 질문이라는 차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또한 사회이념이나 사회과학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중략>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런 신앙의 상상력이 결정적으로 부족합니다.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드러내려 했던 그런 생명의 상상력 말입니다. 상상력은 단지 없는 것을 억지로 꾸며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 너머를 생각하는 게 곧 상상력입니다. 그것이 아무런 논리도 없고 이기적인 것이라면 망상이 될 것이고, 참된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기껏해야 교회를 크게 짓는다거나 선교사를 보낸다거나 아니면 복지회관을 짓는 정도, 훨씬 긍정적인 차원에서는 생태학적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완성시키시는지, 우리의 의식에 불을 켜고 기다려야 합니다. 부활로 궁극적인 생명을 선취하신 예수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위의 설교에서 구름 표상에 대한 오해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양측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 문제를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룬 다음에, 대안을 제안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강단이 이러한 극단적 성서해석으로 인해 엄청나게 훼손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양측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기독교 해석학’이 서야 할 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의 성서해석을 이렇게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로 양분할 수는 없다. 알레고리칼 해석, 실존주의 해석, 해방신학적 해석, 교리적 해석, 여성신학적 해석 등등, 다양한 신학의 숫자만큼 해석의 다양성도 그에 비례한다. 그렇지만 기독교 성서해석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로 구분하는 게 과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참고적으로 윤철호 교수는 기독교 성서해석의 전통을 아래와 같이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양분하고 있다.

기독교 해석학의 전통의 역사는 두 양극 사이를 움직여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성서해석학은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문법적 해석방법의 전통을 따르든지, 아니면 보다 교리적인 관심과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지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의 특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형태의 성서해석학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변형이다. 교회적인 규범과 해석전통에 따라 성서의 영적 의미를 중요시했던 전근대적인 교리주의적 해석학은 대체로 알렉산드리아적인 해석학 전통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안디옥 학파의 특징을 더 많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인식론과 해석학, 한국장로교출판사, 86).  

위와 같은 구분은 근대 신학 이전의 형태만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신학의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근대 이후,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문자적 전통이나 교리적인 관심, 또는 알레고리적인 성격이 모두 경우에 따라서 근본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일단 그런 해석 전통을 접어두고 오늘 한국 교회 강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서해석의 성향을 크게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앞으로 자연스럽게 설명되겠지만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를 구별하는 잣대는 성서의 ‘역사비평’이다.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반면에, 현대주의는 그것을 절대화한다. 역사비평을 거부한 근본주의는 성서를 법궤 안에 든 모세의 돌판으로 삼았고, 반면에 현대주의는 성서를 컴퓨터 안에 든 게임 프로그램 정도로 간주했다. 한쪽은 성서를 형해(形骸)화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이미지화(化)했다.  

근본주의 해석
기독교 안에는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아는데도 짐짓 모른 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역사에 의존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역사비평적인 방식이 아니면 어떤 사실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들은 성서의 역사비평을 무시하고 진술된 사실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선 그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직접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인간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비평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들은 성서가 그 시대의 과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소위 ‘창조과학회’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은 노아의 방주를 찾겠다고 터키의 산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며, 또는 이스라엘이 아모리와 전쟁할 때 여호수아의 기도에 의해 태양과 달이 멈춘 현상을 몇 가지 우주 물리학적 증빙을 통해서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우리가 성서의 보도 중에서 무엇이 역사적 사실이고 무엇이 신앙적 고백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만 다루는 게 문제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역사비평 작업을 거부한다는 것은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결과를 빚을 우려가 많다. 왜냐하면 오늘 성서를 읽는 기독교 신자들은 이미 합리주의적 훈련을 충분히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서의 역사적 한계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바는 근본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첫째, 그들은 성서무오설을 강조한다. 둘째, 그들은 현대신학이나 방법론 및 비판적 성서연구의 결과나 해석을 반대한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견해와 일치하지 않은 자들을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정죄한다. 사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를 살리는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훼손시키는 길에 적합하다. 성서무오설은 성서를 절대화함으로써 성서에 대한 참된 공부를 외면하게 한다. 무오한 성서를 단순히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기만 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신학적 접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얼마나 게으른가 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실은 아주 자명하다. 현대신학의 신학방법론과 그런 연구를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성서를 살아있는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골동품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곧 성서가 죽은 말씀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열광적인 상태에서 성서읽기나 성서쓰기, 또는 성서와 관계된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제시될 수 있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서연구는 가능하지 않게 된다. 오늘 한국 교회가 소위 ‘큐티’와 비슷한 성서공부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끝으로 이런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함으로써 교회 분열의 단초를 생산해낸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파분열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이 근본주의적 성서해석은 한국 교회 강단에 아주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형편이다. 본인들 스스로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주의자로 자처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근본주의 성격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근본주의적 성서해석이 이렇게 막강한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는 우리 한민족의 정서가 주술적이고 무속(巫俗)적이라는 데 있는 것 같다. 역사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선교사들이 미국의 근본주의 교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첫 단추를 근본주의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런 신앙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가 이런 근본주의 성서해석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한 활동 무대는 점점 축소되고, 결국은 자기 고립화를 면치 못한 것이다.  

현대주의 해석학
근본주의 해석학 못지 않게 현대주의 해석학도 역시 성서해석에서 많은 문제를, 또는 훨씬 위험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역사비평을 통해서 성서의 절대성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는 성서나 기독교 전통 자체보다는 교회 밖의 주장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변증해야겠다는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쉴라이에르마허가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은 더 이상 기독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19세기 지성인들에게 이런 낭만주의적 해석을 통해서 기독교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낭만이라는 말이 단순히 감정적이라거나 현실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과 유한의 신비로운 합일을 의미한다.
18,19세기에 기독교가 이 사회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외면당했는지, 그럴 위험성에 노출되었는지를 감안한다면 이들의 노력을 일단 인정해야만 한다. 이미 오래 전에 지동설 논쟁을 겪으면서 교회의 권위가 한풀 꺾인 마당에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서 교회가 거의 결정타를 맞아 거의 그로기 상태의 권투선수 입장에 처했었다. 그런데다가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에 의해서 기독교의 약점들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니체는 기독교가 인간의 나약한 도덕심을 자극함으로써 인간을 지배했다고 공격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생명을 약화시키는 주범이라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이라고 했다.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마르크스의 주장도 역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들렸다. 이들의 비판이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는, 그리고 실제 신앙생활에는 그런 요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흡사 늪에 빠진 것과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이 선택한 길은 위에서 언급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경험’, 또는 리츨의 ‘윤리’,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 트릴취의 ‘종교사’, 또는 라가쯔의 ‘종교사회주의’ 운동 등이었다. 이런 신학과 교회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은 그 동안 기독교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사회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던 ‘인간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의 권위나 연역적 도그마에 머물지 않고 철저하게 인간학적 접근을 필요로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기독교를 문화의 한 현상으로 인식해보자는 것이었다. 아마 이런 현대주의적 접근은 19세기라는, 일종의 기독교 위기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세기 초 바르트의 ‘말씀실증주의’적 해석학은 앞서의 인간학적 해석학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인간학적 인식론보다도 하나님의 계시론을 신학의 상수로 삼자는 것이었다. 바르트의 이런 신학적 착상으로 인해서 현대주의적 성서해석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다시 20세기 중후반부터 해방신학, 정치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탈모더니즘 신학 등등, 또 다른 방식으로 변형된 인간학적 신학이 세계 신학의 중심으로, 특히 제삼세계 신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 한국도 역시 제삼세계신학의 한 지류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신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는데, 한편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근본주의 신학이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하나의 운동으로서는 이런 제삼세계신학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현대주의 신학은 단지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같은 제삼세계 신학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어쩌면 불트만의 탈신화화 논쟁이나 몰트만의 정치신학 처럼 유럽의 중심신학도 역시 여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여러 관계망으로 읽혀 있는 이런 제반 신학적 흐름을 현대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대개가 인간의 삶과 그 상황의 진보적 개혁을 신학의 핵심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그 삶이 모든 신학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탈신화화 논쟁도 역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명제의 술어라는 점에서 인간해방을 부르짖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들의 인간적 연대감에 대해서 깊이 동조하기도 하고, 신학의 다양성이 성서해석의 다양성을 불러올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의 극단화는 문제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그런 극단적인 신학은 신학의 역사에서 정상적인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모르겠다. 현대주의적 극단화는 세 가지 형태로 등장했다.
첫째, 인간 사회의 경제적 불균형을 정의롭게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을 경제적인 소외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해방신학은 어떤 면에서 마르크스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기독교가 등한히 하거나 또는 반동적인 입장을 보여온 사회의 경제적 왜곡 현상에 대한 반성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복음을 그런 것에 한정시킨다는 것은 인간 구원의 물적 토대에서 모색하려는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에 종속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해방’은 이미 성서의 핵심적인 구원 개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역사해석을 나름대로 수용해서 기독교의 구원론을 확대시키는 일은 필요한 작업이다. 다만 우리의 역사 개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견인해 낼 수 있다는 일종의 감상주의적 해석은 경계해야만 한다. 이미 현실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현대 역사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해방신학과 거의 맥을 같이 하는 우리의 ‘민중신학’도 역시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역사를 민주사관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관으로 머물 뿐이지 이 세계 전체의 현실성에 대한 유일한, 또는 비교적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중은 때로 자유와 해방의 견인차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중으로 변함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한다. 민중 개념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을 여기서 굳이 조목 별로 검토할 필요는 없다. 다만 민중이라는 협소한 틀에 한정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우주론적 구원을 지향해야 할 기독교의 구원론에 타당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셋째, 가부장적 정통신학의 성서해석학을 해체하고 여성의 시각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신학도 역시 현대주의의 극단화라 할 수 있다. 그들인 간과하고 있는 것은 비록 정통신학이 가부장적 형식을 띄고 있긴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에 대한 해명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에 대한 현대주의적 접근은 위에서 언급한 해방과 민중을, 또는 정치와 여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는, 유행하는 신학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 강단에 몰아치고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현대주의를 지적하려고 한다. 그것은 곧 무늬는 근본주의이지만 내용은 현대주의인 ‘신근본주의’이다. 원래의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전통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순박하며, 현대주의는 역사변혁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지만, 이 신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전통에 충실한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시대사조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왜 그럴까?

신근본주의 해석
요즘 서울에서 소위 ‘뜨는’ 교회의 특징에는 몇 가지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복음의 내용을 인간적 성취감으로 채워나간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복음의 전달방식을 매우 현대적 감각으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 이 두 가지 특징이 각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결국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의 신근본주의적 성서해석은 여전히 전통적인 근본주의의 기복신앙을 내면화하면서도 동시에 이 시대의 지적, 문화적 교양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변형된 현대주의*라 할 수 있다. 약간 거칠게 표현해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깊이에 천착하기보다는 인간학적 현상과 그 욕구에 치중하는 사유방식인 현대주의가 이런 성향과 궤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온누리 교회, 사랑의 교회, 높은뜻 숭의 교회, 삼일 교회 등등의 교회는 지난날 전형적인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중앙교회,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 또는 김홍도, 김선도 형제 목사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약간 그 성격을, 더 정확히 말해서 그 무늬를 달리한다. 지난달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거의 가부장적인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일방적인 설교를 한 반면에, 요즘의 잘 나가는 교회 목사들은 비교적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행태를 그 안에 깔고 설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각각의 설교자들이 나름의 신학적 경향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범주에 넣다보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는 하지만 요즘 주류 세력으로 등장한 이들을 가리켜 현대주의적 신근본주의자들이라고 칭해도 크게 잘못된 판단을 아닐 것이다.

신근본주의적 설교는 신자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고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아이엠에프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좌절감 내지 냉소주의를 벗어내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유방식을 제고시킨다. 물론 이런 성취감을 자극하는 설교는 이미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크게 유행했던 로버트 슐러의 ‘불가능은 없다’ 식의 설교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위탁하는 기독교의 복음이 이렇듯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그리고 어떤 변화의 조짐도 별로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일단 교회를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논리를 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지상주의, 또는 기독교 패권주의를 복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그런 인식은 온통 물적 토대의 강화에만 목을 걸고 있는 이 시대정신에 철저히 부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미 이런 주제에 대한 논의는 여러 곳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졌으며, 이 갈등의 골 사이에 어떤 접점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겠다. 다만 현대주의적 신근본주의는 교회의 생존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매달리던 전통적 근본주의의 기복적인 요소를, 복음과 교회의 본질을 밝혀내고 충실해야 할 21세기에도 여전히 복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려고 한다. 복음의 내용이 물질적 축복으로 인한 인간의 자기만족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여러 설교자들의 성서해석 문제들을 모두 검토할 수 없다. 대개의 설교자들이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한번 직접 다루었던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김동호 목사는 2003년 여러 달에 걸쳐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으로 연속설교를 했는데, 이 연속설교를 ‘예언과 선동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내가 글을 쓴 적이 있다(기독교사상 2003년 11월호). 김동호 목사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 바로 ‘천국의 열쇠’에 있다고 하면서 이 천국의 열쇠를 받음으로써 하늘문을 열고 닫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복도 받을 수 있다고 강변했다. 여기에 바로 신근본주의자들의 교묘한 음모가 숨어 있다. 소위 ‘청부론’도 역시 적당하게 기독교 신앙과 헌신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축복을 포함시키는 일종의 개량주의라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이런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을 “꿩 먹고 알 먹는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들의 이런 성서해석은 기독교 신앙을 한편으로는 추상적 세계로 몰아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세속주의에 물들게 한다는 점만을 분명히 해야겠다.  

진리론적 해석
그렇다면 설교자는 어떤 성서해석의 자리에 서야하는 것일까? 근본주의도 아니고, 현대주의도 아니며, 더구나 신근본주의도 아니라면 어떤 성서해석이 우리가 가야할 길인가? 물론 내가 여기서 어떤 왕도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것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부분적인 것이며, 그 길이라는 것은 어떤 확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도상(道上)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덱거의 생각을 빌려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어떨는지.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숲길이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숲길이다. 그러니 길이 없을 수밖에. 더구나 지금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다. 혹은 어둠이 점점 짙어 가는 시간이다. 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자리에 멈추어 있거나, 감각에 의해서 무조건 앞으로 걸어가거나, 별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안개가 너무 짙으면 별을 볼 수도 없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기 친구나 선생님들에게서 이 숲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들은 기억만으로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숲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어떤 사람들의 도움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나그네에게는 저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비추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선입견에 빠지지 않고,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멀리 내다보게 되면 그때서야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서해석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선문답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진리의 문제는 이런 식으로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단지 신비주의적 영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향한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포함한다. 즉 진리를 향한 열린 마음을 갖는 게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진리는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세계 현실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진리를 향해서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현실성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모든 인문학적 훈련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성찰해 나가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결국 탈(脫)은폐의 속성을 가진 진리(알레테이아)가 우리에게 자기 모습을 서서히, 또는 갑자기 드러낼 것이다. 이게 곧 기독교 계시 이해의 기본 구조이다.


[레벨:5]유희탁

2005.06.11 08:02:22
*.225.129.219

전 성서해석학에 대해서 잘 모랐습니다. 물론 얘기는 들었지만 하지만 교수님의 이 글을 통해서 저도 이 공간을 통해서라도 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더욱 정진...아 그리고 아까 구름이야기 너무 흥미로 왔습니다. 그래서 상징사전을 찾아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네요. 진 쿠퍼의 『그림으로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에 보니 구름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놓았는데요. 흥미로운 글이 있어서 올립니다. "중국:다산, 풍작, 구름의 용, 비의 은총, 선행을 뜻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호흡, 생명력이다. 소생의 비를 내리는 구름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을 감싸주고 보호하는 인애를 나타낸다."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구름을 호흡과 생명력으로 인식학고 있다는 얘기겠죠. 저도 구름을 그냥 구름으로 인식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이제 변화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레벨:0]감사합니다..

2007.09.14 13:16:17
*.216.75.11

기독교 해석학을 다운 받아서 읽을 방법은 없을까요?..
그리고 조직신학교재는 구입할 수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강의를 들어야 구입할 수 있나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98]정용섭

2007.09.14 13:28:07
*.181.51.23

감사 님,
기독교 해석학을 이제 드래그 해서 복사할 수 있을 겁니다.
조직신학 교재는 대구 오프 공부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택배로 보낼 수 있는데,
택배값 포함해서 2만원이 들겠군요.

[레벨:7]流水不爭先

2007.10.18 11:09:52
*.173.40.129

어제의 서울모임이 부럽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참석을 해야지 하면서도
게으름과 때만 되면 이상한 일들로 차일피일 미룹니다. 죄송

처음 다비아에 들어왔을때 목사님께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많이 후련해 졌습니다. 지금의 가을날씨처럼
희망도 보이고, 기쁨도 생기고, 신학공부도 하고 싶고
두루두루 감사합니다.

추신 : 다비아의 글들이 드래그가 안되는 데요 방법좀.......
profile

[레벨:98]정용섭

2007.10.18 20:43:11
*.181.51.23

씽크바이블 님,
위의 꼭지글을 읽으셨어요?
부분적으로 오타, 탈자, 또는 문맥적으로 어색한 보분이 있다는 건
전제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저건 저의 강의안 초록이거든요.
제 오프 강의안은 많이 고쳤는데,
온라인은 손 못댔습니다.
다비아와 소통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보기에 좋습니다.
감사.
드래그 될 겁니다.
profile

[레벨:4]푸른숲

2007.11.08 23:58:10
*.175.188.156

저는 아직 드래그가 안되네요^^.

[레벨:0]운영자

2007.11.09 00:20:31
*.40.224.25

푸른숲 님~~
이젠 될겁니다.
승급조치 해드렸어요.
profile

[레벨:4]푸른숲

2007.11.10 22:19:15
*.175.188.156

감사합니다!^^

[레벨:1]신소망

2007.11.22 13:12:05
*.215.100.35

이제 눈팅회원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승급조치를 부탁드립니다.

[레벨:0]운영자

2007.11.22 16:14:21
*.40.97.210

신소망 님~~
승급 해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7]선포자

2007.12.09 20:19:57
*.141.208.5

드래그가 안되네요..
해석학 공부하고 싶어 책도 샀습니다..
승급 해주세요..
profile

[레벨:100]이길용

2007.12.09 21:14:42
*.141.162.125

승급은 승급게시판에서 요청하시면 됩니다.

[레벨:2]주님의 종

2008.08.20 18:10:17
*.51.246.85

정용섭 목사님~ 저도 조직신학 강의안 받아보고 싶습니다.
지금 방금 입금하고 왔습니다. 확인해 보시고, 보내주세요. ^_^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98]정용섭

2008.08.20 22:28:29
*.181.51.93

주님의 종님,
<조직신학> 강의안은 지금 없습니다.
저에게서 구입할 수 있는 책은
<도서주문>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답니다.
저에게 주님의종 님 은행통장 번호를 알려주세요.
돈을 즉시 돌려드리겠습니다.
감사.

[레벨:2]주님의 종

2008.08.21 11:13:26
*.51.246.85

아.. 아쉽네요 ㅠ.ㅠ
오프로 참석을 못해 강의안이라도 받아 보려고 했는데..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요. 제 계좌번호는 1002-733-555588(우리은행)입니다.
감사합니다. ^_^

[레벨:1]디모데2

2008.12.14 18:16:37
*.28.4.55

새로가입한 감신대신대원생입니다. 책을 통해 감동받다가 가입케되었는데..해석학을 복사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해석학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요청바랍니다. 교재같은 것이 있으면 알려주셔도 감사하구요..신청하겠습니다.

[레벨:1]그리아니하실지라도

2008.12.19 14:53:38
*.5.49.35

이제 막 가입한 신참입니다. 그래그가 안되네요.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나요?? 저도 해석학에 관심이 많아서...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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