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하이데거의 사유, 언어, 세계에 관해

우리가 1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인 신학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지만 인간의 사유(Denken)가 인식론적 통로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검토했다. 주로 존재, 세계, 인간, 시간이라는 주제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사유 문제를 다루었는데, 거기서의 핵심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한 선입관을 지우고 직관하는 태도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2장에서는 조금 더 전문적인 차원에서 철학적 태도가 무엇인지 ‘사유자의 사유자’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 논점을 중심으로 따라가려고 한다. 그의 철학적 사유는 지난 2천5백년 간 서양 철학이 걸어온 길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다는 점에서 간단하게 따라잡기는 힘들지만 우리로 하여금 철학적 사유를 훈련하는 데는 매우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특히 그의 철학이 존재의 근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서도 그의 철학이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준다. 오늘 우리는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철학적 사유에 기대서 그 존재가 인간과 접촉하는 방식으로서 사유와 언어와 세계를 다루려고 한다.


1. 사유

하이데거의 존재는 사유라는 주제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역으로 사유도 존재를 통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존재가 인간의 사유에 지배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가 없이는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다. 이 사유 문제와 연관해서 우선 사유하는 자인 인간의 본질로부터 시작해서, “본원적인 사유”가 무엇인지, 아울러 신학자의 사유가 무엇인지 차례대로 살펴보자.

1.1. 사유의 인간학적 축점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길은 ‘현존재’(Dasein)인 인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사유로서의 존재가 현존재인 인간학적인 축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하이데거의 진술을 들어보자.

형이상학은 (즉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이 존재에 의하여 말건네어질 때 인간이 단지 그의 본질에 있어서만 본재(本在)한다는 단순한 본질적 현실태에 대하여 자기를 폐쇄한다. … 단지 이러한 말건넴으로부터 인간은 자기의 본질이 어디에 거하는지 발견하였던 것이다. … 존재의 밝혀줌 안에 서있음을 나는 인간의 탈존이라고 부른다. … 인간에게만 이러한 종류의 존재 방식이 적합하다. …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즉 형이상학의 전래하는 언어로 말한다면,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탈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되어진 탈존은 existentia라는 전래하는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existentia는 가능성으로서의 essentia와 구별하여 현실성을 의미한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현존재의 본질은 현존재의 실존에 놓여 있다는 명제가 격자체로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existentia와 essentia의 대립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예 이 두 가지 형이상학적인 존재규정이, 하물며 그들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 오히려 그 명제는, 인간이 그렇게 본재하여 인간은 현존, 즉 존재의 밝혀줌이라고 말한다. 현존의 이러한 존재와 단지 이것만이 탈존의 근본특성을, 다시 말하면 존재의 진리 속에 있는 탈자적인 내립의 근본특징을 갖고 있다.(Brief über den Humanismus, 66ff.).

위의 진술이 매우 복잡한 철학적 언어학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그의 진술에서 핵심은 인간을 탈존(脫存)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 탈존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탈자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인간이 자신 밖에 있을 때 그야말로 바르게 자신으로 존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인간은 존재의 밝혀줌 안에 내립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절대적인 권위나 형이상학적 체계로부터 뛰쳐나오게 되면 불안, 죽음, 고독, 두려움 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인간이 실존이며, 여기서 인간은 인간 자신이 된다. 탈존을 완수하는 사유는 바로 존재의 사유다. 사유를 통해서 탈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즉 탈존함으로써 참된 존재의 빛에, 그 존재의 말걸음에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이 땅에서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따라서 존재의 빛에 들어가는 사유는 인간학적 축점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탈존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게 가능한가? 이 말을 쉽게 기독교식으로 바꾼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혹은 성령에 충만하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면 진리의 밝혀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탈존하여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1.2.  본원적 사유의 본질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표상하거나 존재자를 계량하는, 즉 계량적이거나 표상적인 사고와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본질적, 시원적 사유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경우에 사유는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학과 철학에서 사유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존재자에 대한 사유는 시원적 사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참된 사유는 존재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1954년에 출간된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유는, 더 정확히 말해서 사유하려는 시도와 과제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는 이제까지의 사유를 성취한다고 생각했거나 성취해야 한다고 사칭했던 오만한 요구들이 쇠잔해졌다.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길은 이러한 쇠잔함의 그림자 속으로 대달린다. 그것은 네 개의 명제로 표시될 수 있다. 1. 사유는 과학들처럼 어떤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2. 사유는 유용한 삶의 지혜를 가져오지 못한다. 3. 사유는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 4. 사유는 직접적으로 행동할 힘을 주지 못한다. … 사유는 자체가 하나의 길이다. 우리는 단지 이 길에 상응할 뿐이어서 우리는 도중에 머물러 있게 된다. 길을 놓기 위하여 길에서 도중에 있는 것은 어디서부터이든지 길로 들어서서 그 길에 대하여 환담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질적 사유는 하나의 대답을 목적하고 세계의 수수께끼 배후로 가서 타당한 삶의 처방을 전달해 주려고 시도하는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대답은 신비를 풀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본질적 사유는 영속적인 신비를 알고 있으며, 그 신비의 영역 속에 체류하고 있다. 과학은 대답을 알고자 한다. 사유는 과학이 아니며, 과학을 비경험적인 그리고 사변적인 것 속으로 연장시키는 형이상학적인 연장도 아니다. 사유의 포기에는 그야말로 사유의 위엄이 들어 있다. 그리고 포기 속에서 비로소 사유가 본래 무엇인지 이해된다.

하이데거가 사유 문제를 이렇게 선(禪)문답식으로 해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 이전까지의 모든 사유가 존재자(Seience)들에 대한 해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존재가 망각(Seinsvergessen)되었다는 그의 기본 명제에서 시작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동네 한 복판에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 동네 농부나 읍장에서부터 철학 선생이나 생물학자에 이르기까지 이 나무의 과학적 사실을 말하거나 그 효용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과연 이 은행나무의 근원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일까? 하나의 현상으로서 나무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그렇게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헬라철학과 중세기의 유명론과 실재론, 18,19세기의 인간학적 모든 연구들이 은폐된 세계를 열어 보이려고 했지만 그 은폐성만 더욱 노출시켰을 뿐이다. 이런 사유를 통해서 존재 자체가 드러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사유를 포기하고 존재의 빛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시원적 사유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구도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언급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결코 사상(思想)에게로 가지 못한다. 사상이 우리에게 온다.”
“일찍이 그리고 갑자기 하나의 사유가 있다는 이것을 누가 놀란다고 그 깊이를 헤아려 잴 수 있을까?”
“이른 아침의 여명이 산 위로 올라올 때 …
별 하나를 향하여 간다. 단지 이것만이.
사유는 한 때 별 하나처럼 세계의 하늘에 남아 있는 사상 하나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1.3. 신학자의 사유
하인리히 오트가 하이데거의 사유에 기대어 말하려는 바는 신학도 역시 본래적 사유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증명하는 것에서, 이는 바로 형이상학적 과업인데, 머무는 게 아니라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사유의 본래적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오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 자체는 도중에 있는 존재이다. 신학은 지시하는 사유이지 증명하는 사고가 아니다. 신학은 선포와 더불어 지시, 명령, 역운 안에 머물러 있다. 신학은 선포처럼 자신이 역운의 언어이다. 신학적 사유의 존재 역운, 즉 신학의 특수한 명령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계시는 신학의 사유가 응대해야할 말건넴이다.”(196,197). 여기서 ‘지시하는 사유’라는 표현은 흡사 동양에서 말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비슷한 의미이다.  
1) 도중의 존재: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신학도 역시 반듯하게 포장된 길이 아니라 들길을 간다. 아직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길을, 자기 스스로 길을 내며 간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내는 게 아니라 길이, 아직 고정되지 않은 길이 그곳에 있다. 즉 신학은 다른 것에 의해서 간섭받거나 재단당하지 않고 자기의 고유한 길을 열어가며 나아간다.
2) 역운(歷運)의 언어(Wort des Geschick): 하이데거가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게 바로 본래적 사유의 과업이라고 했듯이 신학도 역시 하나님의 계시에 응대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 계시를 밝혀내는 게 아니다. 그런 뜻에서 신학은 역운의 언어이다.

지금까지 하이데거의 사유 개념을 설명했지만 이게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방식이 하이데거의 진술과는 너무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어떤 세계를 인식하려면 그 세계의 바로 앞 단계를 우선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좀더 쉽게 이야기를 풀어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생각하는 그 주체가 과연 ‘나’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질문해야만 한다. 물론 나의 뇌에서 그런 사유의 기능이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유에는 그런 뇌의 작용에 한정되는 않는 훨씬 근원적인 힘들이 작용한다. 똑같은 진흙 덩어리를 갖고도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겨우 그릇 비슷한 것을 만드는 데 머물고 말지만 어떤 사람은 위대한 작품을 빚는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작품을 만든 사람의 머리가 좋다거나 경험이 많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떤 시원적인 사유가 작동했다고 보아야 한다. 흡사 우리에게 성령이 작용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유는 존재가 현존재를 통해서 작용하는 근원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2. 언어

하이데거에게서 언어는 “존재의 지평”에 놓여 있다. 존재가 사유를 통해서 참을 드러내듯이 동시에 언어를 통해서도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언어 사건에서 존재와 사유가 연관된다.

2.1. 언어에 대한 시원적 해석
하이데거의 <휴매니즘에 관한 편지>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등장한다. 여기서 두 대목을 인용하겠는데, 이것으로 전체를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어떤 방향만은 정확하게 제시해줄 것으로 본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가택에 인간이 거처한다. 사유하는 자들과 시작(詩作)하는 자들은 이 가택의 파수꾼이다. 그들의 파수는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말함을 통하여 이러한 개방성을 언어로 나타내고 언어 속에 보존함으로써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한다.(53)

식물과 동물은 그 환경 속에 퍼져 있으나 존재의 밝혀줌 속에는 들지 못하고, 이 밝혀줌만이 ‘세계’이며, 그들은 자유롭게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다. …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어떤 유기체의 표명도 아니고 생물체의 표현도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기호의 성격으로부터도 생각할 수 없고 의미성격으로부터도 아마 본질에 적합하게 생각할 수 없다. 언어는 존재 자체의 밝혀주고 감추는 도래이다.(70).

우리가 일반적으로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이나 도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훨씬 심층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할 때 이것은 존재와 언어의 불가분성, 그 동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존재의 밝혀줌, 존재의 말건넴은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더 시원적인 면에서 볼 때 언어가 말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과 언어가 말을 한다는 것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질문해야 한다.

* 영남대학교 영문과 리타 테일러(Rita Taylor) 교수는 “언어의 귀중함”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영어 조기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던 어머니의 말(mather tongue)과 태어난 다음에 전혀 다른 말을 들은 아이에게 정서적 혼란이 초래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존재의 소리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몇 대목을 여기 인용하겠다.
내가 언어의 ‘마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을 나는 내 어린 시절에서 뚜렷이 기억한다. 나는 내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살고 있는 동안 난생 처음으로 과수원(orchard)이라는 말을 배웠다. 나의 첫 언어는 스위스-독일어였는데, 이 언어에서 과수원은 ‘과일-정원’(Obst-Garten)으로 불려졌다. 나는 그 전에 이미 ‘과일’과 ‘정원’이라는 두 낱말을 알고 있었다. 디 두 낱말이 빛과 그림자의 유희 속에서 잎사귀와 가지들을 흔드는 미풍과 함께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의 멋진 모습과 연결될 때, 그것은 내게 커다란 경이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과수원이라는 말을 마치 무르익은 과일처럼 내 몸으로 맛보고, 그 말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내 마음 속에 계속해서 되뇌면서 간직하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녹색평론 2005년9/10월호에서)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해석한 적이 있다. <시와 철학 -횔덜린과 릴케의 시세계->. 하이데거는 이런 시인들의 시를 단순히 인간의 주관적인 언어 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언어가 말한다는 입장에서 해석한다. 어떻게 언어가 말하는가? 시인들의 사유를 통해서 형상화된 시 세계는 그 시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포함하고 드러내는 언어의 존재론적 작용이 들어 있다. 일종의 언어사건인 셈이다.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표현이나 활동이 아니다. 언어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시 속에서 언어의 말하기를 찾는다. 찾는 것은 말해진 것의 시적인 것 속에 분명히 들어 있다. … 언어가 말한다. 다시 말하면 동시에, 그리고 먼저 언어가 말한다는 뜻이다. 언어가 말하는 것이지 인간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직접 말하는 자는 인간이지만, 언어 자체가 그런 힘을 보유하기 때문에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존재론적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말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원적 언어는 존재 자체다. 존재는 언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의 말하기는 하나의 응대다. “인간은 그가 언어에 응대함으로써만 말한다. … 사멸자들은 사멸자들이 청종하는 한에서 말한다. 사멸자들은 구별의 고요가 명하는 청종을 무엇이 유성화하는 말로 나타내는지를 세계와 물의 구별의 명령에서 추측해낸다. 그러므로 언어에서 스스로를 알아차리어 청종하면서 추측하는 말하기가 응대이다. 그러나 사멸적인 말하기가 자신을 말해진 것으로서 구별의 명령으로부터 알아차림으로서 사멸적인 말하기는 그 방식대로 부름에 따르고 있다.”
시인들은 자신이 억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의 말함은 인간의 말함에 앞서 있는 선험적 사건이다. 다음과 같은 오인태 시인의 “시가 내게 왔다”를 감상해보자.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 왔다.
(시집 <아버지의 집>에서, 한겨레신문 2006년 8월14일자에서 재인용. 오인태는 1962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91년 <녹두꽃> 3집을 통해 등단, 민족문학작가회 경남지회장)

2.2. 대담(Zwiesprach)
우리는 하이데거의 언어 해명을 대담이라는 관점에서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가 횔더린의 시를 분석하면서 분석이나 주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담이라고 했듯이 본질적 언어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역사학적으로 분석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것이다. 즉 서로 간에 상대를 설득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언어의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흡사 어린이들의 놀이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이와 어린이의 상호작용이라기보다는 놀이 자체가 어린이들을 끌고 가고 어린이들은 그것에 응대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더 본원적인 언어이해는 언어 분야에 있어서 주관주의의 철저한 극복이며, 이것은 대담으로서의 주석의 새로운 양태를 강요해낸다.”고 말할 수 있다.

2.3. 신학적인 차원에서의 말씀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대담 개념을 중개로 해서 신학 행위에서도 역시 언어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차원에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하이데거가 폐기한 언어의 주관주의적인 오해를 신학에서도 가려내어야 한다. 예컨대 성서의 역사-비판적 주석은 필요한 만큼의 주관주의적 언어이해로 규정되었다. 과거의 텍스트가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본래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찾아내는 게 그 주된 목표이다. 그것을 넘어가는 차원에 대해서 성서 주석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성서 증인들이 각개 명제를 가지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정확하게 발견해냄으로써 바울과 요한과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이사야와 시편 저자들을 주석해내면 안된다. 도리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들과 더불어서 대담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들의 인도를 받아서 계시의 공통적 사상에 직면해 서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답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 모든 이유는 우리가 그들 모두와 더불어서 하나의 성도의 교제에 속하기 때문이다.”(오트, 213,214). 성서 기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훨씬 본원적인 신학 작업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서 기자나 많은 신학자들도 역시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들과 영적인 교제 안에 있다.

둘째, 성서의 단어들은 존재로부터 역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오늘의 신학자는 언어 속에 계시의 역운(歷運, Geschick)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언어에서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굳이 동일한 내용을 다른 용어로 조작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는 오히려 언어 자체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의 역운을 통해서 계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맞게 응대할 뿐이다.

셋째, 언어의 대답의 성격이 중요한다. 말은 대답이다(Wort ist Antwort). 언어의 말건넴 성격은 곧 대답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존재가 밝혀지고 드러난다. 요한복음 1:1에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진술되어 있듯이 언어의 말건넴에 대답함으로써 사상(事象)이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언어를 통해서 전승되며, 그 과정에서 심화되고 확대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언어에 대답할 수 있는 적절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언어가 도중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역시 도중에 있다. 언어가 존재를 밝혀주고 있지만 여전히 길이기 때문에 신앙도 역시 계시를 드러내고 있지만 여전히 길에 놓여 있다.

3. 세계

하인리히 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이데거의 경우에 “존재는 사유의 역운으로서 일어난다. 존재는 언어로서 도래한다. 존재는 세계로서 발생한다.”(217). 즉 세계는 사유와 언어처럼 존재의 한 지평이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3.1. 근대적 현실개념의 해체
근대는 특히 자연과학의 발달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정밀한 과학과 기술을 통하여 각인된 현대적 의식은 물질적 세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신체적 사물이 본래 무엇인지 완전하고 분명하게 인식한다고 여긴다. 그런 과학적 설명은 대개가 옳다. 지동설과 진화론을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엄밀한 학문적 방법론에 의해서 제시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결과를 얻게 된 근거가 되는 방법과 공리의 자명성을 의문시한다. 그가 볼 때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는 자연과학과 기술은 그 자체가 형이상학을 통해서 규정된다. “형이상학은 한 시대를 근거 설정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통하여 그리고 특정한 진리관을 통하여 그 시대의 본질적 형태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서 그 시대를 근거 설정한다.”(Die Zeit des Weltwildes, 69). 따라서 과학은 그런 형이상학에 의해, 즉 과학적 대상의 평면도 내에서 작동하며 한정된다. “연구의 근본적 진행은 … 존재자의 한 영역에서, 예를 들어 자연에서 자연의 경과에 대한 어느 특정한 평면도가 설계됨으로써 수행된다. 그 설계는 인식하는 동작이 자신을 열려진 구역에 어떤 방식으로 속박해야 할지를 앞에 그려 보인다. 이 속박이 연구의 엄밀성이다.”(71). 이는 곧 일종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헬라인들의 과학이나 현대의 첨단 과학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과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의 특성을 밝혀나가는 그 방식이 이미 주어진 평면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기하학적인 점 역학으로 표상되고, 오늘의 물리학에서는 원자핵과 장이라는 표제어로 표상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입장은 인간의 주관주의적인 사유나 언어행위를 제거하고 그것을 존재의 역운에서 바라보려고 했던 것처럼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현실 이해를 상대화하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 학문은 결코 정밀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것은 본질상 정밀할 수도 없었고 정밀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과학이 고대의 학문보다 더 정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갈릴레오의 물체의 자유낙하설은 참되고, 가벼운 물체는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다고 가르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체의 본질과 장소의 본질 및 양자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는 다른 존재자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자연의 경과를 보고 묻는 방식도 다르게 제약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셰익스피어의 시가 아이쉴로스의 시보다 발전 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근대의 존재자 이해가 그리스의 존재자 이해보다 더 올바르다고 말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Die Zeit des Weltbildes, 70이하).

더 나아가서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이 이미 대상성에 의해서 제한된 영역에 자신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자연의 숨은 본질 충만을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버린다고 말한다. 결국 서양의 형이상학이 존재 망각에 빠져버렸듯이 자연과학도 역시 존재의 역운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연은 자연의 본질 충만이라는 점에서 자연을 대상화하는 과학에 자기를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역시 자연과학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리학은 물리학으로서 물리학에 관하여 아무런 진술도 할 수 없다. 물리학의 모든 진술은 물리학적으로 말할 뿐이다. 물리학 자체는 물리학적 실험의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언어학도 마찬가지다. 언어학은 언어와 문학의 이론으로서 결코 언어학적 관찰의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과학에 대해서도 역시 타당하다.”(65).
예컨대 오늘의 유전공학에서 인간의 유전암호에 대한 설계도를 상당한 부분까지 해독해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간이 읽혀지는 걸까? 어쩌면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그런 해독술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이 가려지는지도 모른다. 존재가 현현할 수 있도록 사유하는 현존재인 인간을 이 시대의 유전공학적 평면도를 통해서 조작하려고 한다면 인간 본질은 더욱 은폐될 수도 있다. 그런 기술을 확대해가는 인간의 사유가 바로 존재의 역운에 근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인간을 대상화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3.2. 물(物)로의 전향
근대의 현실 개념을 해체한 하이데거는 물의 본래적 의미를 통해서 이 세계의 존재 지평을 해명한다. 그에 의하면 물은 밝혀줌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들의 세계는 존재의 한 차원이다. 하나의 물은 하나의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이 존재이다. 단순한 물(物) 속에서 존재가 본재하고 물의 사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관여한다. “물이란 잔과 걸상, 오솔길과 쟁기 등이다. 그러나 물은 또한 그것의 방식에 따라 나무와 연못이고 냇물과 산이다. 물들은 그때마다 체재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물화하면서 왜가리와 노루, 말과 황소이다. 물들은 그때마다 체재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물화하면서 거울과 혁대 쇠, 책과 그림, 왕관과 십자가이다.”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자기 나름의 시간이 있다. 물질은 자기 시간을 채우면 다른 물질이 된다. 금은 금의 시간이 채워지면 해체되어 납이 되기도 하고, 돌이 되기도 한다. 납도 납의 시간을 채우면 해체되어 금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한다. 코엘료가 말하는 핵심은 이 물질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 과정에서 일정한 형태를 띤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서로 소통된다. “산티아고, 사막의 모래 한 알이 우주다!” 이런 입장은 사물의 여러 형식을 통해서 존재가 드러난다는 하이덱거의 입장과도 연관된다. 코엘료는 단지 사물의 순환만을 본 것이라면 하이덱거는 그 안에서 존재의 힘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이런 물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존재의 드러남을 해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물을 사건 속에 해소시킨다. 잔은 선사하는 부은 것의 사건이다. 교량은 결합시키는 이행의 사건이다. 물은 발생사건으로 본재(本在)하고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물은 단순히 어떤 물질적 자료의 구성에 머무는 게 아니라 “부은 것의 선물”로 회집되어 성립된다. 물은 이제 무의미한 사물로서가 아니라 땅과 하늘, 신성들과 사멸할 자들이 회집되는 장소로 역동화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기술의 시대에는 물이 물로서 멸절된다. 산업을 통해서 제작되는 생산품은 더 이상 어의상 함축적으로 본질적인 의미의 물들이 아니다. 생산품은 “사중자를 회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계의 기술적 통달에 의하여 설정되고 제작되어 나름대로 다시 이 통달에 봉사하는 대상들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복잡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접고, 신학적 연관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3.3. 계시의 세계 차원
기독교 신학에 있는 딜레마중의 하나는 신앙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신앙의 세계는 세계 너머에 있고 학문의 세계는 세계 내에 있다는 점에서 쉽게 결합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계를 배제하고 구원을 말할 수는 없다. 다행히 하이데거의 물 사유를 통해서 신체적인 물의 세계가 자체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중자(Gevierte)가 회합되는 세계로 심화되었기 때문에 창조론, 섭리론, 종말론과 연관해서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물의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열려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 의해서 신체적 세계는 가능한 초월을 향하여 구조적으로 열려졌다. 이 “열음”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지시된 본질 구조다. 만약 이런 물의 존재 역운적 성격을 간과하고 창조를 주장한다면 이것은 자기 속임수에 불과할지 모른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 세계와 물을 성속 이원론에 근거해서 무시하면서 순수 심령주의에 빠진 경향을 보였다. 이런 것에 대한 비판으로 마르크시즘이 등장했다. 오늘의 자연과학자들도 역시 이런 기독교의 심령주의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역으로 창조과학회에 속한 이들은 이 세계와 물을 현상 그대로만 볼 뿐이다. 초월과 내재가 엉성하게 뒤엉켜 있는 셈이다. 이제 하이데거의 물 사유로 인해서 신학은 물의 영성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하인리히 오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처럼 최근 하이데거의 사유 시도가 신학에 대해서 가지는 가능한 의미는 광범위하다. 창조론으로부터 기독론을 거쳐 종말론에 이르고 성례전론과 교회론에까지, 그리고 섭리론과 기도론에 있어서 신앙을 위한 계시의 최종적 구체화와 활성화에까지 이른다. 물에의 전향은 하이데거의 사유의 사유에 있어서 이제까지 마지막으로 디딘 발걸음이고 가장 깊이 성찰된 성찰의 최후의 발걸음이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변증하는 고집에서 풀어놓아 자유롭게 성서를 듣도록 하기에 적합하다.(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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