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역사경험의 해석학
-딜타이(1833-1911)를 중심으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쉴라이에르마허가 죽기 일 년 전에(1833년) 출생한 딜타이(Wilhelm Dilthey)는 1850년대 초 베를린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랑케, 몸젠, 드로이젠 등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독일 역사학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소위 딜타이의 삶(생명) 주제는 바로 이런 ‘보편사적 고찰’의 인간학적 토대에 대한 질문이었다. 딜타이는 베를린에서 원래 신학을 공부했는데, 신학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반면에 베를린에서 일어났던 초기 낭만주의의 범신론적 경향에 대해서, 특히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강연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는 1856년에 신학부 졸업시험이 끝난 다음에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고 본격적으로 쉴라이에르마허 연구에 들어갔다. 1864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 1867년 바젤, 1869년 키일, 1871년 브레스라우를 거쳐, 1872년에 로체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로 돌아온 후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활동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 연구는 그가 죽은 다음에 이렇다 할 후속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19세기는 자연과학이 모든 학문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쉴라이에르마허가 제창한 ‘이해의 기술’로서의 보편적 해석학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딜타이에 의해서 보편적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토대로 자리 매김 된다. 딜타이는 해석학에서 ‘내면적 삶의 표현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해석하는 방법들을 발전시켜보고자 했다. 그의 해석학적 특징이 ‘삶의 해석학’에 있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규범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수용해서 인간론에 적용하고 있던 그 당시의 학문적 경향을 비판한다는 의미이다. 데카르트를 태두로 해서, 또한 칸트를 대표자로 해서 전개되었던 자연과학적 인간학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다고 해서 딜타이가 단순하게 헤겔과 같은 관념론적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신과학의 이론에 타당한 출발점을 사변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체험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는 곧 칸트의 수학적이고 자연과학적 엄밀성에 의한 인간 이해를 극복하는 것임과 동시에 헤겔과 같은 역사학파의 역사 객관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역사적 지평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심리주의적 경향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딜타이는 다음의 세 가지 철학적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보려고 했다.
1) 데카르트와 칸트의 자연과학적 엄밀성에 근거한 삶의 이해: 딜타이에게 인간의 삶은 자연과학적 대상을 고유하게 체험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엄밀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결코 해석될 수 없다.
2) 헤겔의 절대정신으로서의 객관적 역사주의: 체험과 이해를 통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삶은 객관적 역사의 구도를 벗어나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한다.
3) 쉴라이에르마허의 감정적 심리주의: 인간 삶은 인간의 심리적 주관성에 의해서 완전하게 해석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개체의 체험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런 체험의 전체라 할 역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볼 때 딜타이는 그 당시까지 분리되어 있던 두 위대한 철학적 전통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전망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전통은 영국과 프랑스의 경험적 실재론과 실증주의이며, 다른 하나의 전통은 독일의 관념론과 삶의 철학이다. 전자에는 인간이 자연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원리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며, 후자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중요한 원리로 다루는 것이다. 정신과학적 삶의 해석학이라는 구도에서 볼 때 딜타이가 주로 후자 쪽의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삶이라는 것이 곧 인간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전자와도 깊숙이 결탁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두 철학적 사조가 딜타이의 정신과학적 삶의 해석학에서 극복되면서 동시에 종합된 셈이다.
이 문제는 딜타이의 해석학적 구도를 해명하는 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니까 조금 더 검토하자. 우선 그는 인간이 자연에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래와 같이 명확히 지적함으로써 경험론적 실재론을 수용한다.

인간은 자연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 자연은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사소한 정신적인 과정들을 포괄한다. 이렇게 보면 정신적인 과정들은 물리적 세계라는 원문 속에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공간적인 연장에 토대를 둔 세계 표상이 일양성(Gleichförmigkeit)에 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이 된다. 또한 우리는 처음부터 이 일양성을 고려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그 법칙 연구를 통해서 물리적인 세계에 접근한다. 이 법칙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이 발견된다. 즉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갖는 이상의 체험 성격 또는 우리 스스로가 자연인 한 우리들과 체험 성격이 함께 서 있는 연관, 그리고 자연을 즐길 때 생기는 생동적인 감정 등이 공간, 시간, 양, 운동 등의 관계에 따라 동일한 추상적 파악의 배후까지 계속 소급함으로써 발견된다. 이들 모든 계기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얻은 인상으로부터 자연이라는 커다란 대상을 법칙에 따른 질서로 구성하기까지 자기 스스로를 배제시킨다. 그때 비로소 인간에게 자연은 현실성(Wirklichkeit)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해석학의 철학, 105)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연에게 종속되어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의 삶을 향해서 나간다. 여기에 바로 ‘생철학’의 토대가 가능하다. 딜타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진술한다.  

그러나 자연 속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되돌아와서 다시금 삶에로, 자기 자신에게로 전환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체험(이것을 통해 비로소 자연은 인간에게 존재한다)과 삶(의미, 가치, 목적 등은 오로지 이 안에서 나타난다)으로 전환하는 것은 과학적 작업을 규정하는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이다. 여기에 두 번째의 핵심이 등장한다. 인간이 만나고, 만들어 내고 행위 하는 모든 것,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목적 체계, 개인들을 통합하는 사회의 외적인 조직 등은 모두가 그 중에서 비로소 통일을 얻게 된다. 여기서 이해는 인간의 역사 속에 감성적으로 주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비록 감성에 속하지는 않지만 외적인 것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해석학의 철학, 105,106)

우리는 여기서 딜타이가 자연과학적 실재주의와 형이상학적 관념주의를 단순히 종합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히려 그는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정신과학적 방법론을 엄밀하게 구분함으로써 자연과학적 해석학의 독주로부터 정신과학을 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자연과학에도 역시 인간 경험이 핵심이라고 한다면 정신과학은 자연과학과 구별된 고유한 해석학적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딜타이의 해석학은 자연과학으로부터 정신과학을 구별해내는 작업인 셈이다.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기초

딜타이는 자연과학의 환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전망을 극복하려는 맥락에서 정신과학에 적합한 방법론의 체계를 세워보려고 했으며, 또한 현상의 부분적이거나 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충만해 있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해석학은 “현상학적 접근방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다음과 같이 세 요소를 토대로 한다. 1) 인식론적 문제. 2) 역사의식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심화시키는 문제. 3) 그것에 대한 표현들을 ‘삶 자체’로부터 이해하려는 요구. 이런 세 가지 요인들을 고려하게 되면 결국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의 접근방법으로부터 구별된다.

1) 딜타이의 경우에 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이해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에 관련되는 게 아니라 인식론에 관련된다. 그가 볼 때 이 세계 현상에 가장 보편적인 근거의 체계를 세워보려는 형이상학은 결국 보편적인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인간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적합한 지식과 이해가 어떤 종류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우선한다. 물론 형이상학이 인식론적인 과정 없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형이상학은 일종의 존재론이기 때문에 그런 체계로는 다층다기한 인간 삶과 그 표현을 확실하게 밝혀낼 수 없다. 그것보다는 이 인간 삶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인식론적 바탕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2) 딜타이에게는 “내면적 성찰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도 자아를 알 수 있다.” 즉 그에게 인간 이해의 문제는 우리 실존의 역사성에 대한 의식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은 대개가 과학의 정태적인 범주 안에서 상실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역사성이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삶을 체험하는 것은 ‘힘’(능력)이라고 하는 과학의 기계적 범주가 아니라 ‘의미’라고 하는 복합적이고 개별적인 계기에 의한 것이다. 삶의 총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은 과학적 엄밀성에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기까지 포함되는 역사성에서 발견된다는 말이다.
3) 딜타이가 제기하는 정신과학의 기초는 생(生)철학에서 확보된다. 이 생철학은 19세기 후반 세 명의 철학자인 니체, 딜타이, 베르그송과 연관되는 사조로서 형식주의 및 무미건조한 합리주의에 반발했던 18세기의 일반적 경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루소, 야코비, 헤르더, 피히테, 쉘링 등이 이런 계통의 학자들이었다. 한 마디로 생 개념은 문화의 고정성과 규정성에 대한 거부였다. 볼노스에 따르면 “생은 인간의 집합적인 내면적 힘, 특히 널리 팽배해있는 합리적 오성의 힘을 거부하는 감정과 열정의 비합리적 힘을 말한다.” 딜타이에게 인간의 내면적 삶의 역동성은 인식, 감정, 의지 등이 서로 뒤얽힌 복합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역동성이 인과율적 규범 및 기계적이고 양적인 사고의 엄격성에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기초에 의해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해석학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정신과학은 인간과 무관한 사실들과 현상들을 다루는 게 아니며, 비록 그것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내적 체험과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렇다. 따라서 인간적 체험과 연관이 발생하지 않고 그저 객관적인 사실의 명증성만이 지배하고 있는 자연과학에 적합한 방법론은 정신과학에 적합하지 않다. 정신과학에서는 인간의 내적 삶과의 연관이 나타난다. 따라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인식방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즉 인간적 체험의 공유라는 그 내용이 관건으로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딜타이는 텍스트 저자의 마음에 대한 추(追)체험을 강조한 쉴라이에르마허와 같은 길에 서 있는 셈이다. 딜타이의 이런 생각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개념이 곧 “이해”다. 정신과학은 그 안에 이해가 핵심적으로 작용하지만 자연과학에서는 “설명”이 그렇게 작용한다. 정신과학은 삶에 대한 표현을 이해하지만 자연과학은 자연을 설명한다.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정신과학을 ‘이해’라는 특징으로, 자연과학을 ‘설명’이라는 특징으로 단순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그렇게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늘날 과학이 반드시 설명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도 있으며, 정신과학도 역시 이해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 물리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가 소통되는 현대 물리학과 현대철학에서 볼 때는 딜타이의 이런 구분은 크게 설득력을 갖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삶과 그 역동성을 다루는 정신과학이 18,19세기의 자연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그 고유한 입지를 크게 상실했던 19세기 후반의 시기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시도는 크게 잘못 된 게 아니다. 특히 그가 정신과학의 해석학적 특징으로 제시하고 있는 체험, 표현, 이해의 연관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매우 중요한 해석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딜타이의 해석학적 연관

딜타이에게 정신과학은 세 가지 과정을 통해서 명확성을 드러낸다. 삶의 체험, 표현, 이해가 그것이다. 그에게는 자연과학적 인식도 “인간적인 상태가 체험되고 삶의 표현들 속에 드러나게 되며 또한 이 표현들이 이해되는 한에서 정신과학의 대상”이(해석학의 철학 108) 될 수 있다. 그 내용을 천천히 따라가자.

1) (삶)체험
일반적으로 영어 experience와 마찬가지로 우리말 경험이나 체험은 비슷한 뜻이긴 하지만 독일어로는 구별된다. 하나는 Erfahrung이고 다른 하나는 Erlebnis이다. 앞의 단어인 에어파룽은 사람의 경험 일반을 지칭하지만, 뒤의 단어인 에어레프니스는 아주 개별적으로 획득되는 특수한 경험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일단 체험이라고 번역하자. 에어레프니스에서 접두사 er는 본동사인 leben의 의미를 심화시킨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leben(살다)라는 동사의 강조인 셈이다. 체험은 곧 구체적이고 특수한 삶의 문제다. 삶을 통해서 함께 나누게 되는 동일성이다.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현재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은, 여기서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단일한 통일적 의미를 갖는다는 뜻인데, 우리가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삶의 진행 과정에서 공통된 의미를 통하여 서로 결합되는 삶의 부분들의 포괄적인 통일성을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심지어 여러 부분들이 갖가지 잡다한 사건들에 의해 서로 분리되어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딜타이 전집, GS 7, 194.).

딜타이에게는 이 체험이야말로 해석학의 토대이다. 그가 말하는 체험 개념을 우리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체험은 의식의 반성행위를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체험은 행위 자체이기 때문이다. 체험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며 우리가 삶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체험은 반성에 앞서 의미 속에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딜타이에게서 체험은 선험적인 성격에 속한다. 흡사 어머니 품속에 안겨 젖을 빨고 있는 아이에게는 이런 현상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고 단지 그런 체험만 주어진 것과 같다. 물론 사유의 능력이 생기면 자신의 사태에 대한 반성 작업을 펼치지만 그런 반성도 역시 고유한 체험의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
둘째, 딜타이에게서 체험은 주관적인 실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체험은 그것이 대상이 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현존하고 있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의 체험 개념을 굳이 신학적인 개념과 비교해서 설명한다면 계시와 인간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전에도, 혹은 체험하기 전에도 이미 현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에 종속시킬 수 없듯이 딜타이의 체험은 주관적인 것을 뛰어넘는다.
셋째, 체험은 시간적 속성을 갖는다. 체험은 그 의미의 통일성 속에서 과거의 회상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기를 의미의 총체적 맥락으로 포괄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미래가 예기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2) 표현
표현은 독일어 Ausdruck의 번역이다. (영어로는 expression). 드뤀는 ‘누름’이라는 뜻이고 ‘아우스’는 ‘밖으로’라는 전치사다. 그러니까 이 용어의 낱말 자체로만 보면 아우스드뤀은 “밖으로 누름”이라는 뜻이다. 딜타이에게 이 표현이라는 단어는 ‘삶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사상, 법률, 사회형태, 언어가 모두 표현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내면적 삶의 각인을 반영하는 것이지 단지 예술품에 대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표현’이란 삶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감정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개인의 감정을 구체화한다기보다는 ‘삶의 표현’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삶’이다. 이 삶에는 사상, 법, 사회형태, 언어, 습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표현은 결국 인간 삶의 총체와 연관된다.  
그에 의하면 정신과학은 필연적으로 삶의 표현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즉 삶의 대상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해석학적이다. “인간정신을 대상화하는 모든 분야는 정신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정신과학의 범위는 이해의 범위만큼이나 넓고, 이해는 삶 자체의 대상화에서 자신의 참된 대상을 갖는다.”(GS 7, 148).

3) 이해
딜타이의 경우에 이 이해는 한 사람의 정신이 다른 사람의 정신(Geist)을 파악하는 작용을 나타낸다. 즉 정신의 순수한 인식 기능이라기보다는 삶이 삶을 이해하는 특수한 계기를 말한다. “자연은 설명되어야 하지만, 인간은 이해되어야만 한다.”(GS 5, 144). 따라서 이해란 생동적인 인간적 체험을 파악하기 위한 정신적 작용이며, 우리가 삶 자체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해인 셈이다. 이렇게 이해하기 위해서 부분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과의 연관성 안에서 파악해야 하는데, 이 전체적인 것은 곧 삶(Leben)의 통일성이다. 개인적인 삶의 표현은 이 삶의 통일성에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는 것에서 전체적인 것으로부터 부분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주어진 전체적인 것의 연관성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에머리히 코레트, 해석학 26에서 재인용)

개인들의 삶이 전체 삶의 통일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과학의 심리학적 방향을 흐를 수도 있는데, 딜타이는 그것을 거부하고 객관적인 전망을 놓치지 않는다. 즉 이해는 단순히 삶의 통일성에 관한 심리적인 관계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의미구조, 객관적인 작품, 역사와 역사적 문화의 가치와 연관되며 이들의 구조와 법칙과의 연관에서 발생한다. 이해는 ‘삶의 객관화’이며, 헤겔 방식으로 표현하면 ‘객관적 정신’이다. 이 삶의 객관화는 정신과학의 대상인데, 바로 그것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과학에서 보다 적합한 이해작용은 바로 이 영역에서 생겨난다.” (GS 5, 212,13).

우리는 인간의 이해가 어떤 사태를 바르게 해석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인정한다. 특히 개인의 독특한 인격 안에서 사태의 본질이 갖고 있는 내용이 전혀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이해는 이미 앞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에서 다루었듯이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이해가 발생하기 전에 훨씬 근원적인 현실성이 이런 이해에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간의 이해라는 것이 늘 진리의 세계를 풀어내는 게 아니라 자주 덮어버린다는 점에서도 역시 인간의 이해만으로 해석학의 토대를 구축할 수는 없다. 물론 딜타이가 이해만이 아니라 체험과 표현과의 연관성 안에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인간의 이해가 진리의 현실성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이상의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연관해서 작용함으로써 정신과학이 제 자리를 찾게 된다. 인간이 삶에 대해서 체험하게 되며, 그것을 객관화하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내고, 그 표현을 삶으로 추체험할 수 있도록 이해하는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파악하고 풀어내는 작업이 딜타이가 말하는 삶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을 정리하는 뜻으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이제 우리는 비로소 정신과학의 본질 규정이 우리에게 부과할 최종적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주 명료한 특징에 의해서 정신과학을 자연과학에서 경계지을 수 있다. 그 특징이란 이미 언급한 정신의 태도에 있으며, 그 태도를 통해 자연과학적인 인식과는 달리 정신과학의 대상이 구성된다. 지각이나 인식에서 파악한다면 인간이란 우리들에게는 물리적인 사실이 될 것이고, 자체 상 자연과학적인 인식만이 거기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은 인간적인 상태가 체험되고 삶의 표현들 속에 드러나게 되며, 또한 이 표현들이 이해되는 한에서는 정신과학의 대상으로 성립된다. 더욱이 삶과 표현과 이해라는 연관은 인간 스스로 전달하는 몸짓, 표정, 말 등만이 아니라, 이해하는 자들에게 창조한 자의 심연을 열어 보여주는 영구적인 정신적 창조물들, 또는 인간 존재의 공통성(Gemeinsamkeit)을 드러내 주고 우리에게 그것을 지속적으로 직관하고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사회적인 형상에 대한 정신의 끊임없는 객관물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 <중략> ... 그러므로 정신과학은 삶, 표현, 이해의 연관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비로소 정신과학의 경계설정을 결정적으로 수행하게 해주는 아주 명백한 특징에 도달한 것이다. 한 과학이 정신과학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 과학의 대상이 삶, 표현, 이해의 연관에 기초된 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경우다.  (“Der Aufbau der geschichtlichen Welt in den Geisteswissenschaften”, in: GS, Leipzig/Berlin, 1927, 7권, 푀겔러 엮음, 해석학의 철학, 108,109.에서 재인용)


역사성 문제

앞에서 체험과 표현과 이해에 관한 딜타이의 해석학적 연관을 언급할 때 체험이 시간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여기서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전체 삶의 통일성을 체험해야 할 인간이 역사적 존재(ein geschichtliches Wesen)라는 점에서 이 문제가 딜타이 해석학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틸타이가 강조하는 그 인간의 삶도, 그 체험도 역시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는 말이다. 딜타이의 해석학적 구도는 이 역사성 문제에서 총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런 역사적 성격이 다음 세대의 해석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도 이 문제는 우리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딜타이에게 역사성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1) 인간이 삶의 다양한 대상화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오직 역사만이 대답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온 체험에서만 알 수 있으며, 이 체험은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반드시 역사적이어야만 한다.
2) 인간 본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고정된 본질을 알기 위해서 시간의 벽에 끊임없이 벽화를 그림으로써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생철학자인 니체가 “인간이란 아직 결정되지 않는 동물”이라고 했듯이, 딜타이도 역시 인간의 고정된 본질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성이라는 말은 역사의 개방성을 뜻한다.
3) 인간은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 본성의 총체는 역사이다. “역사의식의 상대성 배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인간이라는 종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와해되고 변화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2번이 역사 개방성이라고 한다면 3번은 역사 의존성이다.
이 강의의 기본 틀을 제공하고 있는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의 저자 팔머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역사성, 특히 이해의 시간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딜타이의 해석학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펴볼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해석학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해석학 이론에서 인간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인간이란 자신의 현재의 행동과 결단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과거의 유산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해석학은 역사성이란 개념 속에서 그 이론적 토대를 발견한다.”(175).

참고적으로 이 역사성 문제가 딜타이와 하이데거에게서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에 관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이데거는 잘 알려진 대로 <존재와 시간>(1972)에서 현존의 역사성을 분석하면서 딜타이의 생각에 도움을 받은 바가 크다. 하이데거가 이 책에서 역사성이 현존의 특수한 존재방식을 구성한다고 보았다는 사실에서 <존재와 시간>의 전체 구상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들은 딜타이의 사상과 연계되었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의 역사성으로 인해서 상대주의가 갖게 되는 당혹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진술을 뛰어넘는 해결책을 발전시켰다. 즉 생명 역사가 종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유한 죽음의 가능성으로 “선발(先發)함으로써 전체 현존의 실존적 선취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딜타이가 죽음의 순간에 생명 전체와 부분의 의미를 인식하기 위해서 마지막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하이데거는 역사의 진행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생명의 총계를 선취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셈이다. 물론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취는 뒷날의 경험을 통한 교정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 이 선취는 경험의 진행에서 증명되는 한에서 상대주의와 대립한다. 왜냐하면 선취는 역사적 경험의 흐름 한 가운데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생명의 전체성과 최종적 진리를 미리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이런 생각을 개인적인 생명과의 관계에서만 발전시킨 반면에, 딜타이는 이 문제를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생명의 흐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삶을 간섭하는 역사연관에서 병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인의 생명이 더 큰 생명연관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와 개인적 경험의 의미는 전체 생명으로부터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역사의 전체성을 선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으로의 선발”에 상응한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마지막으로부터 주어지는 게 틀림없다. 시간이 흘러가는 한 중심에서 개인과 그 개인적인 경험의 최종적 의미를 얻을 수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한 중심에서 모든 역사의 마지막을 현재가 되게 하는 이러한 한 사건을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의 부활이다. 그것은 곧 유대의 희망에서 기대된 마지막 사건의 선취인데, 이 마지막 사건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역사 과정의 한 중심에서 예수라고 하는 한 인간을 통해서 일어났다. 물론 하나님의 현존을 전능한 창조자로 간주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건을 역사에 사실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창조자는 “죽은 자를 살리고, 비존재를 존재로 부르는 분이다.”(롬4:17).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 370-372 참조)

결론적으로 우리는 딜타이가 쉴라이에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을 역사경험의 해석의 구도에서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딜타이에 의해서 이제 역사성 문제는 해석학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특히 체험이 시간적인 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피력함으로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배태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딜타이가 “현대의 해석학적 문제들의 창시자”로 간주하는 팔머의 주장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역사 경험의 해석학과 설교

이제 우리는 위에서 간략하게 서술된 딜타이의 해석학적 특징을 근거로 해서 두 가지 관점으로 그의 해석학을 설교행위와 연결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1) 삶의 체험
우리가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설교할 때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게 우선적인 작업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내용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의 삶에서 경험된 하나님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는 사람의 삶을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휴머니즘보다 훨씬 박약한 상태에서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살리는 설교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처럼 죽이는 설교가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딜타이가 그 위험성을 경고한 형이상학적 틀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층다기한 사람들의 삶을 어떤 교리적인 틀로 주조해내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두 가지 각도에서 검증해보도록 하자.  
첫째, 오늘 교회에서 성서를 매우 추상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일이 너무 흔하게 나타난다. 헬무트 틸리케가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가현설적 설교’가 바로 이것과 연결된다. 예컨대 사업상 경쟁적인 상대 기업체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회사가 망하게 되는 경우에 무조건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한다면 그 설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개의 설교가 회중들에게 “공자 왈....” 정도로 취급되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게 자기의 삶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런 설교는 구체적인 삶과 그 체험이 배제된 신학 이론이요 종교적 장광설이며, 나아가서 삶과 신앙을 이원화하는 요설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황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성서를 읽는 자가 성서의 보도를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한 종교 현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2,3천 년 전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내용을 그런 정도로 취급하니까 늘 똑같은 설교를 약간의 수사적 기술만 보충한 채 반복할 뿐이다. 흡사 어린아이들이 동화책을 읽듯이 말이다. 물론 이런 설교에도 매우 그럴듯하고 드라마틱한 내용이 담기게 마련이다. 노아, 야곱, 요셉, 다윗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흥미진진한 서사이기 때문에 그대로 전하기만 해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린아이들이 <달타냥>이라는 책을 읽고 즐거워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저 아름답고 감동적인 남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오늘 회중들이 설교는 설교이고 자기가 살아가는 삶은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의 신자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고, 그 설교를 들으면서 과연 제자직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예수의 부름을 받은 세리 레위가 다른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그 사건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교회에 열심히 나와야겠다고,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가? 절대적인 부름 앞에서 우리가 버릴 게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절실하게 반성하고 있을까?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버림의 삶이 아니라 늘 소유하려고만 하면서 성서를 올바로 읽고 설교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째, 우리가 성서를 지나치게 실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설교의 추상성, 가현성도 문제지만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그 실용적 해석도 크게 문제가 된다. 성서의 내용을 순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요령으로, 그것에 대한 처세술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하고, 저 문제에 대해서는 저렇게 대처하라고 그 방식을 알려주는 걸 설교로 생각한다. 그래서 툭 하면 기도를 열심히 하라거나 참으라거나, 기독교인의 자존심을 회복하라고 충고한다. 특히 모든 문제를 기도가 부족해서 발생한 것처럼 말하는데, 원칙적인 면에서 틀린 말을 아니만 우리의 삶이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근본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유 없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답변할 수 있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선천적인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의 아그네스’라는 연극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주일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주일에 마차 사고를 만나서 죽었다. 다음 주일에 한 수녀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는 주일에 성당에 나오지 않고 놀러 갔기 때문에 사고를 만난 거야.” 우리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더라도 이와 비슷한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도를 어떤 필요를 채워나가는 도구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기도만이 아니라 헌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도하고 헌금 드리면 잘 살게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신앙의 자리에는 이런 도구주의가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 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간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뜩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며, 돌진적 근대화의 튀기나 속물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전국의 인문 세력과 견결히 연대하실. <한겨레21, 1999,4.15.>

여기서 오늘의 설교자가 자기의 중심을 바르게 잡아야 한다. 우선 성서 안에서 인간 삶의 구체성과 그 구원의 소리를 보고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인간이 무엇인지, 존재한다는 게 무엇인지, 생명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공부가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는 한 설교가 늘 추상성과 가벼운 실용성에 머물고 말 것이다.  

2) 역사성
역사에 대한 문제는 딜타이만이 아니라 모든 서양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이다. 사실 헬라시대부터 중세기와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동양철학과는 달리 이 역사 문제를 처음부터 줄기차게 붙잡고 있었다. 과연 역사는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 세계를 순환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동양 사람들에게는 역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서양 사람들에게는,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인간 삶에 놓인 역사적 성격을 직시하고 해석학의 역사적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 딜타이의 이런 역사 이해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시각과 여러 면에서 일치하고 있다. 역사를 미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종말과 오늘의 현실이 그것과 연관되고 있다는 선취 개념은 우리 기독교가 역사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 역사성 문제가 설교 행위와 어떤 연관을 갖는가?
교회의 모든 설교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게 바로 이 주제의 핵심이다. 교회 자체가 종말론적인 공동체니까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당연히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말론을 묵시록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해서 무언가 불길하고 요괴스러운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식으로 해석하는 설교자들도 많다. 이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의 종말론을 해괴한 교리로만 간주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지평을 의미한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이 세상이 완전해지는 그 때를 가리켜서 종말이라는 말이다. 그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는 그 때를 향해서 줄기차게 전진해야 한다. 그게 우리 기독교의 목표(텔로스)다. 한국 교회의 설교는 이 종말론이라는 시각에 볼 때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쳐 있다.
첫째, 비역사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1992년에 해프닝을 벌렸던 ‘다미선교회’의 경우처럼 실제로 공중으로 휴거 하는 현상이 종말에 벌어질 사건으로 이해된다. 은연중에 기독교의 설교는 이런 비역사적, 초역사적 종말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마지막 때 우리는 공중에 들림을 받습니다. 믿습니까?”라고 외치는 이원론적 종말론은 그야말로 비(非)기독교적인 무(無)역사주의이다. 종말론이 역사이해인데 비역사적으로 생각하니까 근본이 잘못 놓인 셈이다.
둘째, 종말론의 부재가 그것이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처럼, 또는 민중의 아픔과 함께 하면 되는 것처럼, 민주화와 경제정의를 이루면 되는 것처럼 설교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진보주의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행위가 절대화되며, 나아가서 교회와, 또한 교회의 행위인 선교, 봉사가 절대화된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목숨을 걸듯이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것은 우리가 종말론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잘 분석해 보시라.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의를 획득해보려는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설교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인데, 이것은 종말론과 대치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딜타이의 해석학으로부터 두 가지 착상을 배울 수 있다. 인간 삶과 종말론적 연관이 그것이다. 삶이 현재라고 한다면 종말은 미래다. 삶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종말은 꿈이다. 현실적인 설교와 꿈을 꾸는 설교의 종합, 조화, 연관이 건강한 설교에 초석이 될 것이다.


(보론 1)
인간론에서 신론으로!

지난 강의 쉬는 시간에 어떤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교수님이 일전에 말씀한 호랑이 우화에는 이런 문제가, 혹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호랑이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그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호랑이는 여러 번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때 그런 경험에 진술은 여전히 호랑이 자체가 아니라 일부분만 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호랑이 자체를 설명해 내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해석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계속해서 부분적이나마 그런 진술로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우선, 그 학생이 호랑이 우화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한 주간 동안 생각했다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그 우화에 나오는 대로 우리는 호랑이 자체를 만나보지 못했다.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어쩌면 호랑이가 아니라 다른 짐승일 수도 있고 호랑이에게 쫓기는 노루를 보고 얼떨결에 호랑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보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허깨비를 보고 호랑이라고 뻥튀기 하는 지도 모른다. 실제로 호랑이를 본 사람도 그 호랑이를 직접 정면에서 본다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넌지시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 보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남한 내에서는 호랑이를 볼 수 없다. 다만 그런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이 우화가 하나님과 성서와 그것을 읽는 우리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일러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만은 옳다고 본다.
오늘 성서를 읽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진술된 성서에서 그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지 하나님 자체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흡사 호랑이 우화에서 모두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떠드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갖듯이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완전히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다만 설교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인간의 경험, 그것도 아주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 인간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이다. 물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인간에 머물고 만다. 그러니까 설교가 모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물론 신학에서 인간론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인식 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에, 또한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 갖는 독특한 입지 때문에 인간 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지만 성서 해석과 설교가 인간 자체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 것도 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상담학에 대한 열의가 지나치게 확산되어있다는 사실은 그래도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점이 없진 않다. 무턱대고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간의 발달과정, 의식과 무의식의 상태, 인간관계를 고려하면서 말씀을 전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작업이긴 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을 잘 관리해서 교회를 부흥시켜야겠다는 실용적인 사고방식에서 요청된 것이라면 얼마 가지 못해서 그 관심이 시들해지고 말 것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렇게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는 늘 인간적인 한계를 노출시킬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상담이나 정신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
다시 호랑이 소문 우화로 돌아가자. 호랑이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반응을 할 것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사람은 어떤 진술 한 가지만 보고 그것을 호랑이로 생각해버린다. 두 개의 호롱불이라고 믿는다. 또는 바람이나 바람소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모든 진술을 종합해서 그 호랑이의 진면목을 찾아보려고 애를 쓸 것이다. 신학과 설교는 바로 후자의 입장을 취해야한다. 성서 이야기를 종합하고,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종합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한다. 그 보도와 사건이 전체적으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살피고 논의해나가야 한다.

(보론 2)
신학의 영역, 인간의 종교 경험인가, 세계 현실성인가?

요한복음 마지막 대목에 베드로가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후에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마지막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수님에게 묻는다. 이때 이 문제가 자네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예수님이 답변한다. 그리고 이어서 자네는 나를 따르라고 재차 명령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에만 머물지 예수를 따르지 못한다. 우리는 늘 그런 인간론 범주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그게 절실하긴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결국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신앙의 기쁨에 도달할 수도 없다. 오늘 한국 교회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도 역시 이런 인간에 대한 공연한 관심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왜 신학이 세계 현실성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종교적 경험만을 그 대상으로 축소시켜버렸을까?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세계는 더 이상 교회의 말에 신빙성을 두지 않았고 신학도 역시 이런 공적인 영역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이후로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만 종교의 보편적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절대의존의 감정이나 윤리적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이 문제는 몇 갈래로 나뉘어져 발전되어 왔다.  
첫째는 신앙 문제를 극단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한정시켜 버리는 입장이다. 순복음 교회의 기복신앙이나 영락교회의 청교도적인 도덕주의가 대표적이다. 서로 대별되는 입장이긴 해도 신앙을 사적인 영역에 한정시킨다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 그들은 예수 잘 믿고 축복 받고 신앙 양심에 따라서 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방언을 강조하건 말씀을 강조하건 이들은 한결같이 개인적인 종교심에 신앙의 무게를 두고 있다.
둘째는 소위 민중교회 형태의 입장도 있다. 7,80년대 우리 한국교회의 정신을 상당한 부분에서 대표하고 있는 이들은 민주화와 통일, 경제정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받고 가난한 이들과의 밥상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은 예수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사회 정의를 위해 기꺼이 불이익을 감당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가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하기는 했지만 이들도 역시 사회 문제에 접근하기는 했어도 다분히 정치투쟁 일변도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노출했다. 아래는 필자가 구상한 짧은 우화다.

여러 사람들이 로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 다녀온 사람도 있고 남의 이야기만 들은 사람도 있다. 함께 가기는 했어도 단체 관광이기 때문에 정신없이 유적지 앞에서 사진만 찍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으며, 실제로 일일이 발로 걸어 다니면서 보고 듣고 연구한 사람도 있다. 어떤 엉뚱한 사람은 승용차 안에서 앉아서 구경하기도 했다.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탐색하고 해석해야 할 설교자는 어떤 여행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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