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해의 기술-쉴라이에에르마허-

기독교해석학 조회 수 5659 추천 수 84 2004.06.30 22:19:42
4장: 이해의 기술
-쉴라이에에르마허(1768-1834)를 중심으로-

쉴라이에르마허와 절대의존 감정

신학사(史)에서 현대신학의 아버지, 혹은 자유주의 신학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쉴라이에르마허는 서양 사상사에서 볼 때 독일의 관념주의(Idealismus) 계열에 속한다. 헤겔, 피히테, 셸링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쉴라이에르마허는 신학자로서 이런 관념론 철학의 발전에 나름대로 공헌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관념론은 일반적으로 인식론적으로는 관념론, 형이상학적으로는 유심론, 세계관적으로는 이상주의를 가리킨다. 예컨대 에피큐로스는 유물론자이며 플라톤은 이데알리스트로 불린다. 피히테, 셸링, 헤겔 등으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은 개념적으로 자각한 인간성의 이념을 사변적 정신으로 완성시켰다. 쉴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자선 병원의 목사였으며, 프리드리히 쉴레겔을 중심으로 한 베를린 낭만주의의 회원이었다. 그가 서른 살에 펴낸 첫 저서가 그 유명한 ‘종교에 대해서. 종교를 경멸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성인들을 향한 강연’(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ächtern, 1799)이었는데, 이 책은 셸링과 헤겔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셸링의 동일철학(Identitätsphilosophi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일철학이란, 넓은 의미에서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적으로 대립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들 양자는 그들에게 공통의 본질인 절대적 동일자의 두 현상형식, 속성, 또는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학설이다. 쉴라이에르마허에게 훨씬 중요한 인물은 야코비(Fr. H. Jacobi, 1743-1819)였다. 야코비는 이성에 대한 감정의 우위를 인정하고 합리론에 반대하여 신앙철학, 감정철학을 주장함으로써 칸트철학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참된 지식은 직접지(知)*, 즉 감정 신앙뿐이라고 주장한다. 야코비의 생각이 <종교에 대해서>라는 강연의 토대가 되었는데, 이는 곧 쉴라이에르마허도 역시 야코비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리얼리티 의식을 통해서 간트의 이성비판을 넘어서려 했다는 의미이다.

*야코비와 쉴라이에르마허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직접지’에 관해서 일단 생각을 정리하는 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 필요할 것 같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보자. 사람들은 물맛이 어떤지 하고 물어본다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설명이 쏟아질 것이다. 밋밋하다거나, 달콤하다거나, 혹은 쓰다거나 시원하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짜게 느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이유는 일단 물이 종류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다는 사실과 물을 마시는 순간의 상황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물맛에 대한 설명이 물 자체를 가기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맛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지 실제로 물맛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말을 바꾸면, 물맛의 경험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맛은 직접적인 것이지만 언어는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물맛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 경험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을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또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설명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히 말해서 성서는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경험에 대한 해명이다. 물맛에 대한 글만 읽고 물맛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성서텍스트만 알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게 우리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 놓여 있는 딜레마이다. 하나님 경험이 없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 묶인다는 것이다. 물맛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묘사해놓은 것만 전달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체에 대한 경험 없이 설명에만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흡사 물맛 경험처럼 단 하나의 경험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원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하게 경험되듯이 하나님도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어떤 사람에는 절대의존감정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궁극적인 관심으로 경험된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 경험은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 거 아닌가, 하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경험은 분명히 주관적이지만 단지 우리의 심리나 감정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 경험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가 하나님 경험이 직접지로 일어난다는 말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형식에 갇혀 있는 우리는 결코 생명 전체를 직접적으로 목도할 수 없다. 하나님 경험은 간접적이며, 부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하나님 자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다. 우리가 물맛을 직접 맛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쉴라이에르마허가 <종교에 대해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직접지인 ‘절대의존감정’을 어떻게 해명하는지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자. 쉴라이에르마허가 이 강연에서 기본적으로 서술하려고 했던 내용은 종교가 본질적으로 인간 실존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명하면서 “인간 측면에서 형성되고 제시되는 그 진지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게 종교는 인간의 지식과 행위에 병치되어 있는 아주 특별하고도 “고유한 정서적 영역”이다. 이 종교의 독자성은 이성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이라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칸트나 피히테의 경우처럼 도덕에 대한 첨가물도 아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이런 작업이 종교에 대한 이런 저런 철학적 윤색을 몰아내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로 인해서 불안해하던 당시의 기독교 지성인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감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이나 지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즉 유한자의 총체성이다. 낭만주의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쉴라이에르마허에게 무한자는 유한자의 피안이 아니라 그 안에 현재 한다. “모든 유한자는 무한자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야만 하는 자기 한계를 규정함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다.”(Über die Religion, 53). 종교는 이러한 사태를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모든 “개인들과 유한자들 가운데서 무한자를 보아야만 한다.”(51). 결국 쉴라이에르마허에게 무한은 유한을 통해서, 유한은 무한을 통해서 드러나는 일종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초(超)세계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그 총체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 직관, 느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우주의 직관과 감정이 종교의 본질을 생산해내는데, 이것은 우주가 우리와 상대함으로써 일어나는 ‘거래’의 결과다. 여기서 우리는 무한자가 유한자 안에 현재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감정(Gefühl)은 야코비가 말하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리얼리티 의식이다.
이러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주장에 대해서 헤겔은 그가 주관주의에 기울어졌다는 점을 비판했다. 헤겔은 1802/03년에 쓴 “신앙과 지식”이라는 논문에서도 쉴라이에르마허의 직관 개념을 가리켜 야코비의 철학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야코비와 마찬가지로 그가 “개념의 개인적인 요소와 특수한 요소”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이다. 헤겔은 종교나 경건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의 강조점이 감정에 모아졌다는 점을, 즉 직관의 순간이 감정 밑에 자리잡았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여기서 헤겔이 간과한 점이 있는데, 쉴라이에르마허의 감정 개념이 단순히 우연한 감정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구조적 특색이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을 참조하였음).
위에서 짧게 설명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유를 토대로 해서 그의 해석학적 특색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독자가 텍스트의 저자와 일치할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 점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첫 번째 특색으로 생각해보게 될 ‘이해의 기술’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원저자의 절대의존 감정을 독자가 추(追)체험하는 기술행위다.

이해의 기술

우리가 어떤 텍스트나 사건, 사태를 해석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행위보다는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가 해석학을 ‘이해의 기술’(die Kunst des Verstehens)이라고 정의한 것은 옳다. 일단 이 정의에 나오는 두 단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해’는 독일어 ‘Verstehen’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근원적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일을’ 유효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대변함으로써 ‘그의 일을 이해하고’, ‘그의 일을 옹호한다’는 의미이다. 원래 이 단어는 법률적인 언어영역에서 유래된다고 하는데, 실천적인 면에서 어떤 사람이 “그의 일을 정통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이며, 즉 그의 과제를 성취시킬 수 있는 지식과 숙련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론적인 면에서 의미 내용과 의미 연관을 통찰하고 간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틴어 ratio(悟性), intellectus(理性)와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이해는 좁은 의미에서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라찌오가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 행위인 인텔렉투스에 해당된다. 즉 전반적인 사태를 근원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의 상황에 대한 이해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태의 근본 뿌리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무적인 관계로 만나는 사람과는 오성적 차원에서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가까운 친구나 가족과는 이성적 차원에서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독일어 Kunst의 번역인 ‘기술’(技術)이라는 단어는 오해될 염려가 있다. 독일어 쿤스트는 “미학적 표현의 총체, 개인이나 집단의 표현 형식”이다. 우리말로 기술이라고 한다면 테크놀로지와 같은 매우 건조한 방법론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쿤스트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이해의 예술’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일단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술’로 쓰고자 한다.
쉴라이에르마허가 해석학을 ‘이해의 기술’이라고 보았다는 말은 앞선 시대의 단순한 입장과 달리 해석학의 차원을 심화시켰다는 뜻이다. 이해 작용이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핵석학에 끌어들인 것이다. 킴메를레는 이렇게 말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작품은 해석학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그 이전까지 해석학은 이미 수납된 이해를 지지하고 보장하며 명료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제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유에서 해석학은 무엇보다도 이해 자체를 가능하게 하며,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를 의도적으로 창출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작용을 하게된다. (H. Kimmerle, Hermeneutical Theory or Ontological Hermeneutics, in: Journal for Theology and the Church Ⅳ, (ed.) R. Funk, 107.).

쉴라이에르마허 이전의 해석학은 그렇게 유용하지 못했다. 이미 교회나 어떤 전통이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해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따라가거나 아니면 반론을 제기하면 되었다. 성서 해석의 문제에서도 교회가 이미 해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런 교회의 일방적인 해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따라서 대개의 학자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사실은 성서 해석만이 아니라 일반 법전 해석도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주와 그의 권위를 변호하는 학자들만이 이런 역사적 문헌을 해석할 권위가 있었다. 인간의 이성이 강조된 계몽주의*에 이르러서도 역시 이런 해석학의 소극적 기능은 여전했다.

*계몽주의 해석학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계몽주의 해석학은 해석을 모든 본문에 항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순이나 넌센스와 같은 이해의 방해물이 있을 경우에만 필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2) 계몽주의 해석학은 번역이나 주석 경험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얻어진 규칙이며, 시행착오를 통해서 축적된 방법이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관찰의 총계에 불과하다. 3) 그것은 이해의 난국이나 실패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훈육적 기능’을 가질 뿐이다.

해석학의 자리를 이런 협의의 지평에서 이해의 기술이라고 하는 근원적 지평으로 끌어올렸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해석 행위가 어떤 전통적 권위나 도그마를 합리화 시켜주는 도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어떤 사태나 현상의 근본 의미를 가장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차원으로 승격되었다는 뜻이다. 성서주석의 경우만 하더라도 난해구절을 교회의 요청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성서 텍스트 전반을 이해하는 기술로 확대된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해석학이 어떤 문서의 실체를 해명하는 작업에서 부수적인 기능으로부터 전체적인 기능으로 확대된 셈이다.
해석학을 ‘이해’의 기술로 보는 쉴라이에르마허의 견해는 기독교 신학에서 루돌프 불트만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양자에게 차이가 있다면 쉴라이에르마허는 이해의 전제를 인간의 ‘절대 의존감정’이라고 보는 반면에 불트만은 인간의 실존론적 지평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불트만이 주장하는 실존론적 해석학은 다음에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지만 말이 나온 김에 ‘이해’ 문제와 더불어 한 대목만 설명하고 넘어가자. 불트만은 바르트와 논쟁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려는 해석학의 이해 지평을 풀어가고 있다. 불트만이 볼 때 부활은 “역사가들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확실하게 시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별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신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부활을 해석하기 위해서 바르트처럼 ‘原역사’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결국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 불트만은 신화의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신화적 세계상에 타당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것이 곧 실존론적 역사 이해라 할 수 있다. 그가 바르트와 비슷한 범주의 신학자로 규정한 발터 클라스에 대한 아래와 같은 비판을 보자.

발터 클라스(Walter Klaas)도 분명히 바르트와 같은 의미에서 나의 견해를 반대하고 있다. 그는 “성서만을 설교의 표준과 척도로 삼고 예언자와 사도들의 말을 앞에 세우며 그 말을 책임 있게 받아들이는 대로 되풀이 하는 자만이 성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성서 해석의 과제가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는 자가 하는 말이다. 주석하는 자에게, 예언자와 사도의 말을 책임지고 ‘받아들인’ 후에 성서를 ‘해석’하라는 말인가?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해석의 과제는 다름 아닌 이해의 과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불트만, 허혁 역, 학문과 실존 1, 305,306참조).

이렇듯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불트만에게까지 이어오는 해석학의 ‘이해’문제는 그들이 성서 텍스트를 다른 일반 문서와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입장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를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해석학의 ‘이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Emerich Coreth, <Grundfragen der Hermeneutik - Ein philosophischer Beitrag>(Herder, 1969. 신귀현 역, 해석학, 종로서적, 1985)이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 4장의 끝 항목으로 나오는 “해석학과 신학”에서 몇 대목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존재는 우리가 그 지평을 언젠가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붙잡는 최종적이며 무제약적이고 무제한적인 지평이다(215). 세계와 역사는 존재의 개방성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215). 이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사고 형식과 언어 방식, 역사적 표상과 언표 방식의 상대성 속으로 들어간다(216). 신의 말씀은 인간적이며 역사적인 말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218). 역사적으로 근원적으로 의미된 것에로 되돌아가는 관계 속에서 원문은 그 역사적인 환경 세계와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저자의 언어 사용과 이해 세계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220). 성서적 언표의 이해는 전승의 조명 속에서 가능할 뿐이다. 전승 속에서 신앙은 작용되고 해석되며 그 전승 속에서 하나의 의미 전개를 경험하고, 이 의미 전개 속에서 신앙은 우리의 이해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고, 이 이해 세계로부터 우리는 다시 성서를 읽고 신앙하면서 이해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상이한 이해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향된 의미를 우리의 현재적 이해 세계 속으로 매개하고 번역하는 것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성서가 기록된 세계는 현대인의 이해 세계와 대단히 다르다. 모든 이해는 하나의 대화적 구조를 갖는다. 우리가 자신에게 말해진 새로운 것을 우리의 지금까지의 이해 세계에서부터만 이해할 수 있고 체득할 수 있다. 그 체득을 통해서 우리의 지평이 확장되며 우리에게 말해진 것에 대하여, 그것이 우리의 先이해와 일치하지 않고 그 선이해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또한 이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폐쇄된 의미 차원을 뚫고 나가는 보다 넒은 시야가 개방될 때 우리에게는 그런 개방성 속에서 지평의 융합이 일어난다(224). 만일 우리가 신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로 하여금 우리를 감동케 해야 하고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을 말하게 해야 한다. 바로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경험세계와 이해 세계를 넘어서고, 결코 인간적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 신의 은총에서부터 우리에게 구원을 해명해주는 구원의 비밀에 우리 자신을 개방한다(224,225).

보편적 해석학

‘이해의 기술’ 개념은 바로 보편적 해석학이라는 특징과 연결된다. 이해의 기술이나 보편적 해석학이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이 갖는 특징을 똑같이 진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자가 해석의 지평을 확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해석 방식의 방향을 돌려놓은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 볼 때 계몽주의 시대의 해석학에는 단지 각기 다른 학문에서 나름대로 사용되던 특수 해석학만 있을 따름이지 보편 해석학은 결여되어 있었다.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이제 해석학은 신학이나 문학, 혹은 법학에 속하는 특수한 전문적 보조 분야가 아니라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기술로 전환되었다. 물론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특수 해석학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런 차이들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고 밑바탕에는 근본적인 통일성이 놓여 있다. 해석의 대상인 텍스트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려면 문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문법은 어떤 텍스트에나 동일하게 작용하지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문법의 체계는 곧 보편적이라는 말이 된다. 예컨대 구약성서의 시편과 오늘의 시(詩)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문법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오늘의 시를 이해하는 어법으로 구약의 시편도 이해할 수 있다.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 같은 극단적 묵시문학이라 하더라도 역시 언어 체계에서는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보편 해석학적인 틀에 근거해서 각각의 전문 분야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특수한 부분을 담게 마련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특수성이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석학이 보편적이라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언어 영역의 공통성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텍스트와 그 해석을 수행하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을 “삶에 대한 관계로부터의 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딜타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사유에서도 단초로 작용한다. 딜타이는 ‘삶 자체로부터’의 이해를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식하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해석은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의 저자나 그것을 읽고 이해해야 할 독자가 삶의 경험을 어떻게 나누는가 하는 점에서 보편적 지평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기독교 해석학이 이런 보편성을 상실해버리고 만다면 밀의 종교에서만 통용되는 극비 문서를 다루는 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쉴라이에르마의 해석학에 관한 다음과 같은 팔머의 진술은 옳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시행착오에 의해 축적되는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에 대한 견해를 결정적으로 극복하고, 모든 특수한 해석 기술에 선행하는 일반적인 이해의 기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현재의 문학해석이 암묵적이건 명시적이건 이해의 일반이론에 대해 갖는 적절한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팔머, 145).

쉴라이에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이 과연 신학에도 여전히 적용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논의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성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초자연적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일반 문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성령의 도움으로만 성서가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역사비평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이런 논리로 성서해석을 고립시킨다면 신학은 결코 해석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없으며, 신학 안에 다시 중세기의 교회 중심적 도그마만 횡행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쉴라이에르마허에 의해서 신학 해석학도 보편적 지평을 확보함으로써 성서의 세계가 훨씬 깊고 풍부하게 해명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의 논의를 조금 더 실감 있게 전개하기 위해서 이제 성령을 초월적인 부분에서만 인식하려는 한국교회와 성서해석학적 특징과 쉴라이에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을 비교해보겠다. 칼빈은 성서해석에서 ‘성령의 조명’을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했으며, 그 이후로 개혁신학의 성서해석은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이렇게 진술한다.

이 이해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곳에 있는 원천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즉 성령의 숨어 있는 증언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성령의 증언이 모든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 되시는 것같이 그의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확인되어야만 비로소 인간마음 속에 신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Institutio 1,7,4).

이런 전통에 따라서 1561년 ‘벨기에 신앙고백’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전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증언 때문에 받아들인다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의심 없이 ‘성경’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교회가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거룩하고 경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기 대문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 속에서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The Belgic Confession, 1561, Article 5.).

1646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이런 성령의 내적 증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충분한 설득, 그리고 오류 없는 진리와 그것의 신적 권위에 대한 확신은,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말씀에 의한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증거를 갖는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6, 1,5.).

칼빈이 성서 해석에서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한 이유는 신앙의 준거를 교회가 아니라 성서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솔라 스크립투라”를 외친 마틴 루터와 같은 기조에서 기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교회 중심적 성서해석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이 성령의 내적 조명을 성서해석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해서 토마스 뮌처 같이 극단적으로 외적인 성서 말씀을 완전히 무시하고 인간에게 내재하는 내적 말씀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칼빈의 성령의 내적 조명은 곧 외적인 말씀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런 극단적 성령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그런데 오늘날 칼빈이 처한 ‘삶의 자리’를 도외시하고, 또는 그것을 왜곡한 채 해석의 보편적 지평을 배격하려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로마 가톨릭의 교회 중심주의와 뮌처의 극단적 심령주의를 극복하고 성서와 성령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정함으로써 해석의 바른 자리를 찾으려는 칼빈의 구체적인 요구가 성서해석의 편이주의로 변질되고 있다는 말이다.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학문적이고 해석학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면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성서해석의 문제를 성령의 조명이라는 명제 밑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으로 몰아가는 태도이다. 만약 성령이 세계 창조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고 진리의 영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의 모든 인식론적 과정에서 활동할 것이며, 따라서 성서 해석의 보편적 지평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신학의 성령론적 성서해석은 쉴라이에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과 대립하는 게 아니다.  
  
어쨌든지 교회가 주장하는 도그마의 권위가 더 이상 세계에 먹히지 않는 시대에, 그래도 기독교의 진리를 세계와 무관한 변방에 남겨둘 수 없었던 쉴라이에르마허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은 해석학적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해석학적 보편성은 이미 헬라철학과의 보편적 대화를 거부하지 않았던 교부들의 전통만이 아니라 방언도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신앙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바울의 이런 입장에 따른다면, 역시 신약성서 자체가 자신들의 특수한 종교경험을 보편적인 지평으로 열어가려는 노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히브리어(특수언어)가 헬라어(보편언어)로 번역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주관주의적-심리적 해석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이 말하는 그 해석의 보편적 지평은 실제로 세계 전체의 보편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주관적 심리 경험으로서 일종의 ‘심리적 해석학’이다. 위에서 보편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언어 문제를 다루었는데, 쉴라이에르마허는 비록 그런 언어와 문법의 보편성을 거론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은 보편적 해석학에 이르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다. 참된 이해는 해석자가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그 저자와 감정적으로 일치될 때 발생한다. 결국 쉴라이에르마허는 초기 “언어-중심의 해석학으로부터 주관성-중심의 해석학으로”(팔머, 140) 발전해 나갔다.
베를린 도서관에 있는 쉴라이에르마허의 미간행 육필 원고를 숙독한 후 해석학에 관한 모든 저술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킴메를레에 의하면 쉴라이에르마허가 언어에서 심리적 해석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사유와 언어의 동일성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내적인 본질과 외적인 현상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텍스트는 내면의 정신과정이 직접적으로 표출된 게 아니라 단지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요구된 언어에 불과하다. 결국 해석학의 과제는 내면적 과정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를 초월해야만 하는 것이다. 해석학에서 언어가 여전히 중요하긴 했지만 사유에 비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곧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서양사상사의 주관주의적 경향이다. 인간 개체의 주관적 삶의 경험, 그의 절대 의존 감정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이며, 이해가 가능한 토대이다. 언어가 인간의 진리와 종교 경험을, 그리고 절대의존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생각은 옳을 수도 있다. ‘불립문자’라는 동양의 가르침에도 있듯이 아무리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한계는 여전한 것이다. 더구나 쉴라이에르마허의 직접지는 언어 너머에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옳다. 다만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절대의존 감정이라는 것이 여전히 인간의 주관성에 머물고 만다면 결국 사상(事象)자체(die Sache selbst)는 한낱 인간의 주관적 경험 가운데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경험이 관건으로 등장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감정이 인간의 심리적인, 주관적인 감정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에게 감정은 보편적 해석의 전제조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결과이다. 해석되어야 할 대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과의 일치가 이루어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가 곧 절대의존감정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이 감정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단지 심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은 사람에게 음악경험이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악을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즉 음악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감정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루돌프 오토의 <Das Heilige>에서 진술된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과 비슷하다. 폴 틸리히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설명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감정’은 실제로 주관적 감정이라고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초월한, 우리 존재의 깊이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우주의 충격이다. 그는 이런 의미의 감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 우주의 직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직관을 divination으로 기술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말은 ‘신적’이라는 말에서 나왔으며, 신적인 것의 직접적 인식을 의미하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넘어선 것에 관한 직접적인 인식, 우리의 내부에 현존하는 모든 것의 바탕에 관한 직접적인 인식을 의미하다. (송기득 역,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130).

쉴라이에르마허가 처한 삶의 자리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기독교가 계몽주의 이후로 세계 안에서 거주할 자리를 잃고 점차 세계와 대립적인 위치로 빠져들던 때였다. 세계와의 보편적 연관성은 결국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한 종교적 체험에서 모색될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소여된 “절대의존 감정”이었다. 이게 곧 보편적 해석학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은 결국 역사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의 결여에 모아진다. 해석 사건이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에 있다고 한다면 어떤 사실의 역사적 현실은 무의미하다. 그의 이런 비역사적 해석이 과연 참된 것을 충분하게 해석해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물론 그 사태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혹은 그 인식과 이해가 비록 심리적인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사실 자체를 드러낼 수 없다면 불충분한 해석학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과 설교문제

1. 이해- 폐쇄성과 개방성
오늘의 설교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전형적인 곡해는 성서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답습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대개의 설교가 이미 해석이 완료된 내용을 자신의 개인 경험이나 여러 가지 수사적 방식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쉴라이에르마허가 제시한 이해의 과정은 없고 전달의 과정만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종말론적 진리를 향해서 개방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과거의 어떤 고정된 진리로 소급시켜 버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화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요즘 설교학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방법론이 이런 함정에 빠져있다. 귀납적 방식, 스토리 텔링 등등. 이런 현상은 설교하는 사람과 듣는 청중 양쪽에 모두 해당된다. “설교가 뭐 대단한 거냐. 그냥 성서에 있는 걸 전하면 되지.” 너무나 믿음이 좋은 말 같지만 이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다. 성서를 이해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설교가 어떻게 ‘이해의 기술’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 토대인 존재는 사유, 언어, 세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존재는 사유의 역운으로서 일어난다. 존재는 언어로서 도래한다. 존재는 세계로서 발생한다.”(H. Ott, 217). 존재는 사유, 언어, 세계라는 지평 안에서 존재의 ‘밝혀줌’에 내립(內立)하는, 즉 탈존하는 인간에게 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존재를 하나님, 혹은 그의 계시에 비견할 수 있다면, 사유, 언어,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해를 넓혀감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계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존재의 세계 지평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물(物)의 존재적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물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중자, 즉 하늘과 땅과 사멸할 자와 신성이 회집하는 자리다. 오늘의 기술 중심적 과학에 의해서 훼손당하고 있는 물의 존재론적 자리가 이제 하이데거에 의해서 확보된 것이다. 이런 사유에 근거해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세계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할 수 있다. 물론 하이데거의 사유에 의해서만 우리의 신학적 진술이 그 구체성과 심원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서의 세계 자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이미 완료(폐쇄)된 정답이라기보다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고백과 전승이니까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경험했던, 아직 은폐된(그래서 미래로 열려진) 대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게 설교다.    

2. 보편성- 부분과 전체
앞에서도 ‘이해의 기술’이 곧 해석학의 보편적 지평을 의미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처럼 설교학과의 연관에서도 역시 이점은 동일하다. 성서에 주어진 정답만을 교리문답 하듯이 따라가게 되면 성서 해석 행위는 특수한 경험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경험들은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특수성만 강조하는 경우에 설교자들은 성서 해석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고 있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것이 자신의 무사려성을, 비학문성을 호도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을 망령스럽게 만드는 태도다. 성령의 역할은 이 세계의 창조사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미 성서가 기록될 때, 정경화 때 충분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은 그것의 ‘밝혀줌’에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진리라는 의미의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기본적으로 ‘탈은폐성’의 성격을 갖고 있듯이 성서는 하나님과 그의 세계를 비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세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사태와 사실을 단지 논리적으로만, 합리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식의 논리와 합리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그 신비의 세계가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왜 신비인지, 왜 논리로만 이해되는 게 아닌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지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종의 마술적 세력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일구어 가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성서를 해석해 나갈 때 더욱 철저하게 우리의 인식론적 능력과 타당성을 그 바탕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영인 성령은 우리의 그런 인식 능력까지 이끌어 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를 보편적으로 해석해나간다는 것은 설교 행위가 근본적으로 보편적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인간은 각기 특수한 삶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런 특수한 삶이 결국은 전체적인 면에서 보편성을 유지한다. 부분의 특수가 전체의 보편과 해석학적인 순환을 맺고 있듯이 인간은 그런 보편사적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는 그런 지평을 유지해야만 한다. 특수가 보편에 함몰되어서도 안 되고, 보편이 특수로 인해서 상실되어서도 안 된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설교행위에서 부분과 전체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한 대목만 살펴보자.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제로 설교를 한다고 할 때 그 믿음과 구원의 관계가 기독교 전체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도 살펴야만 한다. 은총론이나 성화론, 교회론도 역시 기독교 전체의 가르침과 연관성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경우에 설교가 한 부분에 치우쳐서 전체 기독교 교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때가 있다. 한편의 설교에서 기독교 교리 전체를 언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설교방식도 아니지만, 설교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는 그런 전체와의 연관성이 충분하게 인식되어야 설교의 방향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3. 심리적 주관주의의 극복
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그것의 해석학적 보편성 문제는 우리가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배워야 할 관점이지만 이런 이해와 보편성 문제가 인간의 심리적 주관성으로 떨어져 버렸다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할 요소다. 물론 엄격하게 말한다면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감정은 심리적 주관주의가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단어에 그런 뉘앙스가 담겨 있기도 하고, 또한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 부분을 정리하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쉴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사유를 자유주의로 단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의 심리적 주관주의와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설교한다. 그가 하나님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절대의존 감정’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을 인간학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목회와 설교 현장에서는 바로 그런 인간학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기본적으로 인간학적 토대에서 출발하는 민중신학 계열의 교회만이 아니라 소위 개혁주의 전통에도 전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는 정통 개혁주의나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내재화되어 있다. 쉬운 예로, 설교의 많은 부분이 인간의 개인적이고 주관적 체험이라 할 간증과 예화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개신교회의 신앙적 특성인 ‘솔라 피데’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의 행위와 업적을 강조한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고 신앙의 참된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강조된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명제가 오히려 인간학적 내용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자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의 핵심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놓으려고 믿음을 강조했지만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인간의 믿는 행위에 강조점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정황을 실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동화를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이 호랑이를 보았다고 했다. 각기 본 장소나 시간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대낮에 약초를 캐러갔다가 호랑이의 등을 보았으며, 다른 사람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밤중에 호랑이의 빛나는 눈을 보았다. 또 어떤 사람은 호랑이를 보긴 보았는데 개울물을 바람처럼 건너뛰는 순간의 그런 분위기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은 직접 보았다기보다는 그렇게 경험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호랑이를 직접 본 사람은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어쨌든지 그런 호랑이를 경험하는 순간에 오금이 저리거나 식은땀이 나기도 했고, 흥미진진하기도 했으며, 그냥 궁금증만 더하기도 했다. 이들의 호랑이 경험이 입으로 전해지다가 어떤 신문 기자가 이 소식을 듣고 취재했다. 이 기자는 자기가 취재한 내용을 전문가의 의견을 곁들여 신문에 실었다. 이 기사를 본 어떤 사람이 외국에 사는 자기 친구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여보게, 갑이라는 사람이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네. 그 사람은 약초를 캐러갔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얼마나 무서웠든지 오금이 저려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 그로 인해서 큰 병을 얻게 되었고 그 이후로 두문불출한다네. 을이라는 사람은 개울을 바람처럼 한걸음에 건너뛰는 호랑이를 보았다네. 그 사람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매일 동네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닌다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무엇인가? 호랑이에 대한 경험은 많았지만 정작 그 호랑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설교가 늘 이런 모양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호랑이의 진면목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달해야하는데 인간들의 드라마틱한 경험만 난무한다. 이것이 곧 심리적 주관주의라는 함정에 빠져서 그것의 참된 대상인 하나님의 실질을 언급하지 못하는 설교의 한계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도 하나님에 대한 개인과 민족의 경험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성서의 객관적 사실만을 흡사 동화책을 전하듯이 풀어주고 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설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분석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성서 주석으로부터 조직신학적 반성 없이 직접 설교로 비약함으로써 기독교가 전승시켜온 어떤 진리 내용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넨베르크의 경고는 옳다. 설교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인간의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다. 그가 초월한다는 말은 철저하게 역사에 의존해 있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종말론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쨌든지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은 오늘 우리 설교에서도 매우 절실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각종 경험만 무성하지 하나님 자체는 망각되었다는 말이다. 오늘 이 글의 제목으로 잡혀 있듯이 인간 실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을 전하는 게 설교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설교하는 게 인간의 심리적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자체를 전하는 것일까? 여기에 단 하나의 모범답안이 주어질 수는 없다. 성서를 통해서 가능한대로 인간의 경험을 제거하면서 그런 경험의 출처에 초점을 맞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서의 역사비평은 말할 것도 없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이어져온 기독교의 사상사에 대한 충분한 공부가 필요하며,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문학적 시각을 배워야만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설교자는 어떤 호랑이를 보았다는 소문에 치우치지 않고 호랑이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4. 인간 경험과 하나님의 현실
쉴라이에르마허의 직접지, 절대의존감정, 우주의 충격과 직관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빠진 그 당시의 신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우주론적 충격과 그 직관이, 그래서 따라오는 종교적 감정이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점은 우리가 분명하게 짚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의 입장을 아무런 교정 없이 그대로 수납한다면 기독교와 타종교의 경계선을 실종되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 대상과 내용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관점을 마지막으로 검토하자.
성서에 진술된 각양각색의 하나님 경험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보다는 그런 경험에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늘의 삶에서 새롭게 찾아내는 작업이 설교다. 그 이유는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지시하고 있는 성서는 그 자체가 정답이라기보다는 정답에 대한 이런 저런 경험들이다. 직접적으로 질문해보자. 누가 하나님을 보았는가? 아니 성서의 어떤 진술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을 담고 있나? 하나님은 사랑인가, 정의인가, 전쟁의 신인가, 권선징악의 권위인가, 지혜의 근원인가, 민족 신인가, 이 세계를 끌어가는 보편적 원리인가? 흡사 시각장애인이 처음으로 코끼리를 만져보고 여러 모습으로 그려보듯이 성서의 하나님 진술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인 경험이다. 물론 역사적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아니냐 하고 답변할 수 있다. 물론 우리 기독교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실이 옳기는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인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원래가 그렇다고,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무책임한 발언이다.
복음서와 서신에 진술되어 있는 예수에게 대한 경험도 그렇게 논리적으로 명쾌한 답변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요즘 소위 “예수 세미나”에 속한 신학자들이 초대 기독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변모된 그리스도 예수보다는 원래의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야 한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예수가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다. 사실 역사적 예수이든지 케리그마의 예수이든지 그 예수의 정체성은 하나다. 하나의 인격체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는 말인데, 오늘 그런 성서를 읽는 우리로서는 원래의 예수와 해석된 예수에게서 발생한 하나님 사건을, 그 계시 사건을 일반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보편적으로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만 어수선하게 전개되고 있지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기도의 응답”, “칠전팔기의 신앙”, “실천하는 신앙”, “위로하시는 하나님” 등과 같은 설교는 대개가 인간의 입장에서 경험된 내용으로 구성될 뿐이다. 그래서 결국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서 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인격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은혜가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된다. 결국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이나 불만족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별로 상관없게 된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개의 가정에서 가족들 사이의 관심은 월급, 집, 교육, 친인척 관계 등에 한정되어 있다. 잘되면 기분이 좋고 안 되면 기분이 나쁘게 살아간다. 여기서 삶 자체는 실종되고 만다. 여러 가지 일상적인 사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없다. 아주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이 없고 인간의 기분만 남는다. 에릭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인들은 소유지향적인 삶에 머물기 때문에 존재지향적 삶을 외면한다. 소유만 남고 존재가 없다. 설교와 교회 안에도 “신앙(소유)만 있고 하나님(존재)이 없다.” 어떻게 믿어야 한다는 말만하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설교 행위에서 인간의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 한다는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즉 하나님이 지금도 자기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 자기계시는 종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이해의 기술”에서 해석학의 문제가 이미 수납된 사실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부터 근본적인 이해의 차원으로 심화되었다는 점을 밝혔는데, 이 문제가 여기에도 역시 해당된다. 성서에 진술된 하나님 이해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다. 그런데 대개의 설교 행위에서 이미 하나님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처럼, 그래서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그런 설교는 근본적으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레벨:11]권현주

2005.02.11 16:27:33
*.208.102.138

구체속에서 보편을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상상력과 지적 작용을 요구할 것 같읍니다.
크리스쳔으로서의 상상력은 이전과 확실히 다른 지적 작용을 요구하는 것 같읍니다.
철학 정리를 할 수 있어서 좋읍니다.

[레벨:3]홍승표

2007.02.16 15:33:41
*.116.203.80

신학교를 졸업하고 십여년 만에 다시 신학함의 귀함과 그 씨름이 담겨있는 글을 읽는 일의 귀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계기는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이고, 이렇게 온라인 강의실에서 조금씩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랜 만에 가슴 설레는 삶을 살도록 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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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장: 하이데거의 사유, 언어, 세계에 관해(교정, 3월14일) 2004-09-14 4542
19 2.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자리. (초안) 9월16일 [1] 2004-09-14 4238
18 신학입문 3장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3] 2004-09-14 5417
17 신학입문 2장 신학과 교회 2004-09-08 5215
16 1장: 신학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의 기초문제(교정, 3월14일) 2004-09-04 5846
15 강의계획서(교정, 2008년3월14일) 2004-08-31 5806
14 신학입문 강의 계획서 2004-08-30 6961
13 1. 교회, 신학, 철학 (교정) -2004.9.2(목)- 2004-08-30 4262
12 강의계획서(철학적신학) 2004-08-30 5839
11 기독교해석학 11장: 보편사적 해석학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4] 2004-06-30 5309
10 기독교해석학 9장: 지평융해의 해석학 -게오르크 가다머를 중심으로- [1] 2004-06-30 6625
9 기독교해석학 8장: 언어사건의 해석학 -게르하르트 에벨링- 2004-06-30 6380
8 기독교해석학 7장: 실존론적 해석학-로돌프 불트만- 2004-06-30 6048
7 기독교해석학 6장: 해석학적 현상학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2004-06-30 6524
6 기독교해석학 5장: 역사경험의 해석학 -딜타이를 중심으로- 2004-06-30 6576
» 기독교해석학 4장: 이해의 기술-쉴라이에에르마허- [2] 2004-06-30 5659
4 기독교해석학 3장: 해석학의 세 기능에 관해서 [2] 2004-06-30 5471
3 기독교해석학 2장, 해석학과 신학 2004-06-30 5401
2 기독교해석학 1장, 해석학과 성서 [17] 2004-06-30 8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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