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언어사건의 해석학
-게르하르트 에벨링을 중심으로-

신(新)해석학의 자리

여러 학자들의 해석학적 경향을 대별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전통으로서, 이들에게 해석학이란 해석의 근저에 놓여 있는 방법론적 원리들을 모아놓은 결집체이다.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의 전통으로서, 이들에게 해석학은 모든 이해의 성격과 필수적인 조건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다. 이 양측을 대표하는 오늘의 대표적인 인물은 각각 이멜리오 베티와 가다머다. 베티는 딜타이의 전통에 입각해서 해석의 일반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역사적 객관성의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입장에 근거해서 이해 자체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가다머에 의하면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석은 너무나 소박한 태도이다.
신학적인 입장에서 불트만과 에벨링(G. Ebelling)과 푹스(E. Fuchs)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나 가다머와 같은 노선에 있는데, 특히 언어의 사건 지평을 강조하고 여기서 해석학적 근거를 찾고 있는 에벨링과 푹스는 가다머와 상호적인 관계에 있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에벨링과 푹스를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며, 에벨링과 푹스도 역시 제자들에게 가다머를 중요한 학자로 추천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이 쉴라이에르마허의 심리적 해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불트만이 이해의 기술에 머물지 않고 탈신화화 작업을 통해서 이해 자체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전통으로 분류될 수 있다. 따라서 에벨링과 푹스도 역시 해석의 방법이 아니라 해석 자체의 철학적 근거를 문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하이데거나 가다머와 같은 노선으로 분류될 수 있다. 팔머도 역시 쉴라이에르마허, 딜타이, 베티, 허쉬를 같은 계통으로, 하이데거, 가다머, 불트만, 에벨링, 푹스를 같은 계통으로 분류한다. 에벨링의 해석학적 자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우선 앞서 살펴본 불트만과 에벨링, 푹스의 해석학적 연관성을 대략적으로 검토해보자.

어떤 이들은 불트만이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다고 비판하지만 그런 신화적 표상에 들어 있는 본래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탈신화화 논의를 그렇게 기독교 전통과 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팔머에 따르면 “탈신화화 개념은 복음을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내재된 천박한 직역주의(literalism)도 거부한다.” 불트만의 탈신화화는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식의 합리주의적 탈신비화나 우상파괴를 위한 도구가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트만은 1920년대 중반에 마부르크 대학교에서 <존재와 시간>을 준비하고 있던 하이데거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팔머에 의하면 인간을 미래지향적이며 역사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존재자로 보는 불트만의 인식은 바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서술된 인간관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불트만 신학이 하이데거에게서 받은 영향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1) 객관적인 사실로 해석됨으로써 단순한 정보로 사용되는 언어와, 인격적인 의의 및 강제력을 지닌 언어를 구별해야한다. 2) 신(존재)은 말씀으로서, 그리고 언어로서 인간과 만난다. 이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언어적 성격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조와 상응한다. 3) 불트만은 말씀으로서의 케리그마가 실존론적인 자기 이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곧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언급한 양심의 호소를 구체화시킨 것이다.(팔머, 85,86).
에벨링과 푹스는 해석학 문제를 신학의 중심 과제로 삼음으로써 불트만의 뒤를 잇는다. 이들은 문자주의를 비판하면서 말씀이 갖고 있는 고유한 힘을 회복시켜내려는 불트만과 같은 길을 간다. 따라서 성서의 사실적인 성격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들은 불트만의 역사, 언어, 탈신화화 문제를 심화시켜나갔다. 즉 불트만이 인간의 실존론적 자기 이해에 집중하고 이것의 의미를 선포된 말씀에 비추어 분석하고자 했다면, 푹스와 에벨링은 언어 자체 및 실재에 대한 언어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언어의 문제, 즉 행해진 말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하는 게 관건이다. 에벨링은 이렇게 주장한다. “실존은 말을 통한 실존이며, 또한 말 속에서의 실존이다. ... 실존주의적 해석은 언어 사건과 관련된 텍스트의 해석이다.”(Ebelling, Word and Faith, 331, 팔머, 90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에벨링과 푹스의 위치를 ‘신해석학’이라고 일컫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들이 20세기 중반에 불트만의 해석학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그것을 신학적인 토대와 철학적인 토대에서 심화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작업이 불트만이 말하는 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성서의 언어 사건을 신학화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대표적인 해석학적 신학자들로 간주할 수 있다.  

언어 사건(Wortgeschehen)

에벨링은 일반적으로 바르트와 불트만의 해석학을 접목시키려 했던 가장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브룬너의 후계자로서 쮜리히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했는데, 생존 여부는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아마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주저 제목이 ‘말씀과 신앙’(Wort und Glaube)라는 것은 그의 신학자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르트의 신학적 전통이 말씀이라고 한다면 불트만의 신학적 전통은 신앙이라는 점에서 에벨링은 이 양자의 결합을 시도했다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그의 해석학적 특징이 ‘언어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바르트의 말씀신학이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앙을 만남으로써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언어 사건이 발생한다는 에벨링의 주장은 아주 당연하다.

해석학은 언어에 무엇을 부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현실에 방해가 되는 것만을 제거하고자 한다. ... 왜냐하면 언어는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서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inführung in die theologische Sprachlehre, 1971, 188f. 김영한, 167에서 재인용).

우리가 에벨링의 해석학을 기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 위에서 인용된 문장만 고찰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해석학은 성서의 말씀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게 아니라 언어 자체의 해석학적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의 영역에서 근원적인 현상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이해이다.” 이런 주장들은 인간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단순히 인간이 언어를 자기의 생각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진리 국면을 인간이 좇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지평이 그 핵심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언어는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 능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의 계시적 능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여건만 준비하면 되지 특별히 개입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해석학적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어의 계시론적 토대에서 정당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언어 사건은 곧 계시 사건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 방식에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요소가 작동한다. 첫째, 말의 해석학적 기능에 주목함으로써 해석의 의미는 훨씬 근원적으로 이해의 직접적인 매개라는 뜻을 갖게 되어서 해석학의 목표는 이해에 이르는 데 놓여 있는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 실재의 언어성을 주장하면서 언어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입장에 따르면 역사는 사실들을 수집해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된 실재이다. 역사의 사실에 대해서 질문하기보다는 여기에 무엇이 표현되어 있는가, 무엇이 매개되고 있는가, 라는 형태로 질문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볼 때 신학적 역사주의는 잘못된 언어관에서 발생한다. 즉 언어가 단순히 진술의 문제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해석자는 전승된 말을 언어 사건으로서의 언어에 담지된 고유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벨링은 언어가 단지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언어사건(Wortgeschehen)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하나님에 대한 로고스인 신학은 언어를 통해서 작업하고 있는데 이 언어가 계시 사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언어(성서)의 사건을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확인해나가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고, 오히려 언어의 생기적 작용을 붙들어내야만 한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언어가 가리키는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보다는 계시와 구원사건으로서의 언어라는 점에서 신학의 자리를 새롭게 정립해야만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에벨링이 말하는 언어사건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학적 기준으로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존재라기보다는 인격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인격적 존재인 인간과 언어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곧 언어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세상 전체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만 해명해야 할 신학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언어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말씀 사건의 해명이며, 말씀사건은 인간 현실과 세계현실의 해명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할 수 있다. 신학 행위에서 언어의 사건적 작용을 파악해내는 일이 중요한지, 아니면 언어를 통해서 사건의 사실성을 밝혀내는 일이 중요한지 말이다. 언어라는 것이 존재의 집이라고 부를 만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현실성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역시 언어로 해석되고 집약된다는 점에서 언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언어 사건으로서 충분한 것일까?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사건인가(에벨링), 인간의 실존론적 인식이며 고백인가(불트만), 원역사에 대한 언어적 진술인가(바르트), 보편사(판넨베르크)인가에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접어두고, 에벨링이 말하는 언어사건으로서의 해석학을 좀 더 다루도록 하자.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물음

김영한은 에벨링의 해석학적 거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벨링은 루터로부터 말씀과 신앙으로 집중하는 사상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이것을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내려오는 해석학적 전통과 결합시키면서 이 양자를 현대적 철학사상인 실존주의적 토양에 심는다.”(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188). 이 문장을 약간 정리하고 넘어가자. 에벨링이 언어와 신앙의 문제를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라 피데”, “솔라 스크립투라”를 기독교에 대한 물음의 기본구조로 삼고 있는 루터 신학 선상에 서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사실 에벨링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은 예외 없이 말씀과 신앙이라는 루터의 기본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에벨링은 언어사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학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적 전통이 불트만과 에벨링에게 연속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이 해석학적이라는 성격규정에서만 그렇지 그 내부에서는 다르게 분류되어야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에벨링은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와 베티로 이어지는 해석학의 방법이 아니라 해석학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 이유는 에벨링이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과의 연관 속에서 해석학적 작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 실존주의의 철학은 에벨링으로 하여금 언어가 담고 있는 구원사건을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실존과 언어와 사건이 에벨링의 사유에서 상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에벨링은 1958/59년 겨울학기 쮜리히 대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개설한 강의 “신앙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lichen Glaubens)과 1959년12월30일 남독일 방송국에서 방송한 원고 “하나님의 말씀과 언어”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우선 이 책에서 제기된 “기독교 신앙의 본질 문제”를 검토하고, 해석학 서설이라는 부제를 단 “하나님의 말씀과 언어”는 그 뒤에 검토하자.
에벨링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묻는 일이 불가피하고 동시에 모험적이라는 사실을 제기한다. 불가피하다는 말은 이해 없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고, 모험적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이런 질문에서 우리의 오해와 몰이해가 폭로된다는 뜻이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 신앙이 이해라기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이라고 주장되기 때문에, 또한 그런 모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에벨링이 이렇게 신앙의 본질을 묻는 불가피성과 모험성을 제기하는 자체가 사실은 신학이 해석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신학이 기독교의 전통과 도그마를 교리문답처럼 암기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또는 일방적인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면 해석학이 개입될 틈이 없다.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진리론적인 지평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석학적으로 전개되어야만 한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질문이 봉쇄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 에벨링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해석학과 연관해서 우리는 두 번째 문제만 짚어보면 될 것 같다. 그는 오늘의 이러한 불행한 사태의 책임이 대부분 “교회의 설교”에 근거한다고 진단한다(13). 예외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개의 설교가 지루하거나 아니면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또는 쓴웃음이나 탄식을 자아낸다. 그런데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설교가 지금도 아무런 주저도 없이 함부로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 설교의 문제점은 설교가 외국어처럼 들려서 전혀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물론 설교에서 남발되는 단어나 문장은 너무나 익숙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만들며, 감격이나 놀라움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의 척도로 오해되기도 한다. 성서의 종교적 언어가 오늘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서 그것이 본래 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설교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잘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 자체에 오직 현실과 관계된 것을 조금 보충하면 이 잘못이 감추어질 것으로 낙관하는 사람도 이 문제의 본질을 곡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곧 성서의 현실과 오늘의 현실이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상황과 연관된다.
에벨링에 따르면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 너무나 익숙한 상태다. 2천 년 전 언어와 오늘의 언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사하면서도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설교는 이 두 세계와 두 언어 사이의 통로를 열어주는 작업이어야 하는데, 에벨링에 의하면 이런 작업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거나 근본 문제를 호도 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성서 언어를 단순히 새로운 언어로 해석해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서의 핵심이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주제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신 유행어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좋은 설교라는 말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체 낱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말 자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느냐에 문제가 있고, 새 어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화제에 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15).

에벨링은 변화의 시대에 사는(계몽주의 이후)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이 문제가 아주 시급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도 기독교 선교는 이런 변화 이전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가 볼 때 이 문제는 바로 해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다. 성서의 주제를 오늘의 현실 속에서 주제로 부각시킬 수 있는 이런 해석학적 요청이 교회 앞에 놓여진 과제다. 이미 40여전 년에 에벨링이 제기한 이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효력이 있다. 신앙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해석학적 요청이 우리의 신학과 교회 현실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근본 문제다.

하나님 말씀과 언어

에벨링은 이 강연 “하나님의 말씀과 언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언어 사건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그것의 해석학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구분하고 있다. 한쪽은 하나님 말씀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다른 한쪽은 어떤 결정적인 것을 기대한다. 전자에 속한 이들은 하나님이 말한다는 것은 신화적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아무 것도 받아들일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초월적인 하나님이 말한다고 해서 역사에 제한 받고 있는 인간이 알아들을 재간은 없다. 더구나 하나님이 어떤 언어로 말하겠는가? 그 언어를 인간이 과연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이런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하나님이 말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에 속한 이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그들도 하나님 말씀과 언어관계의 난점과 모순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말했다는 확신과 하나님이 다시 말한다는 기대에 생명을 걸고 살아간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승된 성서를 중요하게 내세운다. 성서는 이미 일어난 선교를 증명하고 새로 일어날 선교를 재촉한다. 그러나 이들의 경험에 의하면 선교는 오늘 이미 사건으로서의 힘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요구를 수행하지 못하는 한가한 객설이 되고 말았다.
에벨링에 의하면 양측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교육이나 종교성에 기독교의 근거를 설정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태도는 성서에서 아무 능력도 발견할 수 없으며, 고지식하게 하나님이 말씀했다는 명제에만 사로잡힌 바르티안들도 역시 그 언어의 사건 성격을 확보하지 못한다.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을 끌어나가는 언어의 능력이 손상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에벨링은 이런 상황을 본훼퍼의 생각에 기대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해하는 일을 아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화해와 구속은 무엇이며, 중생과 성령은 무엇을 뜻하며, 원수사랑, 십자가와 부활은 무엇이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과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일은 무엇을 뜻합니까? - 이 개념들은 모두 우리에게 생소하고 어려워서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  자신만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의 언어는 인류와 세계를 위한 화해와 구원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 언어들은 힘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옥중서신, 중에서).
언어의 무능력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제 에벨링은 언어 본질을 해명한다. 우선 언어에서는 낱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 전체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 의미가 사건이 될 때 언어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또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나 상황 없이 허공을 향해 던져진 말은 말이 아니다. 어떤 인격체를 향해, 또는 서로간에 어떤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대화가 가능하고 이런 대화를 통해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 사건은 미래적 성격을 지닌다. 사건은 언어가 상황 속에 들어와서 사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순서상 미래적 성격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입이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이 아닌 다른 신비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말을 하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말로서 자신을 계시한다. 앞서 말한 대로 언어 사건이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서 진리가 드러나고 앞길이 예시된다는 점에서 언어는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방식이다. 사건으로서의 언어에서 구원 사건이 발생하고 심화된다.

우리는 언어가 낱말과 문법의 구조 이상의 것임을 잘 안다. 언어의 차이는 단순히 여러 민족 언어를 구분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에는 이 차이를 종횡으로 일관하는 언어의 연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  우리는 사실 언어에 의해 열리는 현실, 언어에 의해 전해지는 무진장한 보물- 이 안에서 우리의 말을 길러내며 살고 있다. 말을 사건으로 야기하고 성격 짓는 자리도 언어에 의해 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로 언어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 227).

그런데 인간의 말은 기대를 절망으로 만들고 소원을 무산시킨다. 그 이유는 순수한 의미에서 말은 오직 약속을 의지하는 신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미래로 다른 사람의 참된 미래를, 즉 구원을 약속할 수 없다. 그것을 약속할 수 있는 말은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이 말씀이 사건으로 이미 나타났다는 것, 따라서 계속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 말씀에서 자신을 약속하는 자로서 서로 약속함으로써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이다.”(229).
결국 에벨링이 말하려는 바는 우리가 성서에서 언어의 구원 사건을 읽어내고 다시 오늘 우리의 삶에서 그 언어사건이 갖는 능력을 회복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화제로 부각시키는 일은 그저 몇 마디 현대적 감각에 맞는 언어를 생산해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전승된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던져진 이 현실을 통해서 자기를 이해시키려는가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 주의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경험에 나타나는 모순을 끈기 있게 참는 것과 이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일을 하나로 만들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서 하나님 말씀이 새로 이해되면 말씀의 능력도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우리 언어의 궁핍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언어 궁핍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곧 우리 자신의 언어 궁핍이기 때문이다.”(231).    

바르트의 “데우스 딕시트”

푹스와 더불어서 신해석학을 주도한 에벨링이 언어의 사건 성격을 강조했다면 그것이 과연 말씀객관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칼 바르트의 해석학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잠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언어(말씀)가 핵심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신건은 칼 바르트의 해석학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은 철두철미하게 성서적-텍스트적 해석학이며, 성서적-텍스트적 해석학은 궁극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이 아니라 텍스트에 의한, 텍스트의 해석학이다. 왜냐하면 성서 텍스트가 우리보다 더 탁월하고 우월한 위치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 텍스트 안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계시하고 행동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말 속에서 자신의 영을 통하여 계시한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적-비판적 해석학을 포함하면서도 아울러 지양하는, 즉 이를 관통하는 영적 해석학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바르트는 결국 ‘오직 성서만으로’와 함께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가르친 종교개혁자들의 성서해석학적 입장을 폭넓게 따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들출판사, 신학적 해석학, 84)

말씀 실증주의에 근거해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바르트의 입장에서 볼 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제시했던 윤리, 종교사, 또는 심리적 해석은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풀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은폐시킬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바르트의 입장이 일종의 독단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긴 하지만, 그의 주장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아도 좋다. 성서 안에서 물리학이나 도덕심, 또는 정치사를 읽지 않고 하나님이 펼치는 구원의 역사를 읽는다는 바르트의 주장은 성서를 해석해야 할 과업을 맡은 우리에게 매우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성서의 주제는 곧 하나님 자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경우에 우리는 성서 안에서 별로 본질적인지 않은 것들을 읽으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바르트에 의하면 쉴라이에르마허, 리츨, 하르낙, 트릴취 등,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런 부산물에 취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할 때, 우리의 목적이 신, 세계,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혹은 이론적인 명제들을 뽑아내려든가, 혹은 옛날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중성적인 데이터로 뽑아내려든가, 아니면 옛날에 일어났고 오늘에도 일러나는 종교적, 신비적, 경건의 경험 및 윤리적인 경험들을 뽑아내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신약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다.”(Kerygma and Mythos 2, 85. 유형기 역, 복음주의신학 입문, 217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신건의 설명을 좀 더 따라가면,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은 이런 성서와 성령의 내적 조명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정치적 해석학”으로 발전되었다. 바르트가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의 신학이 얼마나 현실 문제에 적극적이었나 하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교회 교의학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혁명(화해)의 신학적-정치적 숙고를 체계화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르트에게서 ‘영적 해석학’으로서의 ‘신학적 해석학’은 동시에 ‘정치적 해석학’으로 전개되고 실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영’ 안으로 돌진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학’은 ‘땅’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정치적 해석학’과 연결되어 탁월한 정치신학을 꽃피웠던 것이다.(위의 책, 87).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다시피 바르트는 말씀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계시의 주관성을 강조한다. 이를 “데우스 딕시트”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기껏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고 애를 써보아도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놀라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맥을 놓고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의 모순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모든 인간적 노력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신앙을 성서 해석의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신앙의 주관주의적 요소와 말씀의 객관주의적 요소가 바르트에게서 결합되었다. 기왕에 성서의 객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꾸준히 그런 자세를 견지해 나가야 했는데, 다시 신앙의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됨으로써 혼란스런 관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성서 해석에서 성서 자체가 우선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읽은 사람의 신앙이 우선하는가? 위에서 인용한 이신건의 진술에 나와 있듯이 ‘오직 성서만으로’와 성령의 내적인 조명이 종합되어 버렸다. 아마 오직 성서만을 줄기차게 밀고 나갈만한 추진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성령의 내적 조명을 보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데우스 딕시트 명제에는 하나님의 주관성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언어 자체의 존재론적 요소는 별로 신통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여기서 언어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통로에 불과하다. 언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정치적 해석학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데우스 딕시트라는 명제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뿐이지 언어 자체의 사건 성격을 확보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신학자로 알려진 몰트만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씀신학’의 한계이다.
이에 반해서 에벨링의 언어사건은 계시를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말씀신학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바르트의 말씀신학에서는 언어가 계시의 수단에 불과하지만, 에벨링의 신학에서는 계시 사건으로 자리를 잡기 때문에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이 발현된다.

말씀 신학의 해석학적 유용화

김영한 교수는 에벨링의 해석학이 공헌한 점은 말씀신학을 해석학적으로 유용하게 했다는 점이지만, 동시에 그가 극복해보려 했던 불트만의 실존론적 토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문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적극적인 평가부터 잠시 살펴보자(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219-226).
첫째, 에벨링의 해석학은 역사 비판학의 공격을 받고 무능화된 교의학의 선포 기능을 복권시켰다. 여기서 교의학의 선포 기능이라는 것은 단지 형이상학적 틀로 축소되었던 교의학을 성서신학과의 연계함으로써 실제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새롭게 끌어올렸다는 말이다.    
둘째, 에벨링은 루터의 말씀신학을 해석학적 차원에서 심화시켰다. 이 말은 로마 가톨릭의 교권과 업적 신앙을 극복한 루터의 성서해석에 머물지 않고 말씀에 내재해 있던 언어 사건의 힘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셋째, 말씀 신학을 현대의 인격주의 사상과 실존주의 사상의 토양 속에 착근시킴으로써 신학을 신에 대한 학문이요 동시에 인간의 실존과 세계의 구체적 상황을 포괄하는 전체 현상에 대한 학문으로 성립시켰다.
넷째, 불트만에 의해서 역사적 모습을 상실한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예수로서 재발견함으로써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실존론적인 차원의 예수만을 언급한 불트만을 극복했다는 뜻이다.  
다섯째, 하나님 말씀의 언어성과 시간성을 발견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모습이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언어가 아니라 참되고 충족된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섯째,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현대인들 가운데, 교회의 회중들 가운데, 신학자들 사이에 소통되게 함으로써 언어혼란과 언어팽창에 의해서 기독교적인 선포로부터 소외되고 이질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을 향해서 말씀의 책임을 감당하게 했다.
김영한 교수가 여기서 여섯 항목을 열거했지만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르트에게 부족했던 말씀의 해석학적 지평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불트만에게 결여되었던 기독교 신앙의 역사 문제가 ‘언어사건’ 개념 안에서 극복된 것이다.
  
실존론적 협착성

첫째, 김영한 의하면 에벨링의 해석학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세계를 실존론적인 틀 안에 가두었다. 그가 비록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세계와 실존으로 추상화하지 않고 양자의 역동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인간 실존을 초월해서 그 자체로 무제약적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을 인간 실존론적 표상 안에 제약시킬 위험성이 있다.
둘째, 에벨링의 신학에는 하나님 말씀 개념의 초자연적이고 성령론적인 성격이 간과된다. 김영한의 입장에서 보면 에벨링이 말씀의 초자연적 성격과 성령론적 근거를 놓치고 있다.
셋째, 신앙개념의 실존론적 협착이라는 위험성이 있다.
넷째, 김영한에 의하면 에벨링의 역사적 예수 개념은 실존론적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김영한 교수의 결론은 에벨링이 말씀신학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공헌하고 있으나 그것이 실존론적으로 해석됨으로써 개혁주의적인 전통에서 볼 때 하나님과 신앙과 성령론이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른 신학자들을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김영한 교수는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으로 신학자들을 재단하고 있다. 말씀의 역사적 차원에 실존론적으로 축소되었다거나 성령의 조명이 무시되었다는 두 가지 칼로 상대방을 무조건 찌르는 것 같다. 에벨링이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을 극복하기 위해서 언어 사건 개념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일치시켰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실존론적으로 기울어졌다고 비판하는 것은 에벨링의 신학을 편견 없이 들여다보지 않고 개혁주의라는 패러다임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탓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에벨링을 비판하려면 언어 사건으로서의 해석학 작업이 과연 얼마나 논리적이며, 동시에 얼마나 성서와 기독교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진리론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해석학적 다룰 때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한 마디만 짚는다면 언어 사건으로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충분하게 담아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언어사건과 설교

2002년 5월호 기독교 사상에 실린 설교는 “행복한 부부”(행18:1-3)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그들은 늘 함께 있었습니다. 2) 그들은 늘 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3) 그들은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다. 설교자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 소제목만으로 알 수 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주례사와 별로 크게 다르지 않은 이런 것을 설교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단지 믿음 안에서 살았다는 그 단락만 교회 밖의 사람들이 하는 말과 다를 뿐인데, 그러나 사실 이 믿음이라는 것도 앞에서 말한 아주 상식적인 덕담과 똑같은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지 그 근본에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 설교자가 말하는 믿음은 단지 교회에 잘 나와서 교회봉사 잘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경우에 따라서 부부가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독신생활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서로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수도 있게 한다. 자기 삶에서 더욱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게 믿음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인간 제도의 기존 틀을 깰 수 있는 용기가 믿음인데도 그저 이 세상에서 남에게 본보기가 될 정도로 교회생활을 잘 하는 것만을 믿음으로 강조되고 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에서 주종을 이룬다. 화목한 가정이 되라.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자. 사랑을 실천하는 삶. 그래서 신앙과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게 하는 조력자 정도로 인식된다. 믿음 생활 잘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또는 믿음 생활을 잘 했는데도 고난이 임하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참고 기다리면 웃을 날이 온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논리가 힘을 받고 있는 이유는 신앙의 본질과 목표를 ‘모범생 만들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모범생은 그렇게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등생은 모범생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게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모범생을 만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이 강구된다. 정신분석, 심리학, 상담, 처세술, 교육 등. 이런 방식으로는 존재의 신비인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으며,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신앙은 인간의 상상력이 설계한 행복의 조건을 차지하기 위한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사랑과 존재 자체인, 그래서 여전히 신비인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예수의 주변에 왜 모범생들이 아니라 열등생들이 모여들었는지, 그리고 예수는 왜 그런 이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는지 눈여겨보면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어떤 형편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건 간에, 비록 북한처럼 불량국가라고 하더라도 그런 도덕성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그의 사랑과 그의 평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삶의 태도가 신앙이라는 말이다. 설교는 이런 사실을 성서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석해주는 과정이다. 물론 악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구원하는가 하는 물음은 또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준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나 사랑을 재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언어인 성서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옳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돕는다. 문제는 이 증언인 성서를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여기에 바로 해석학이 요청된다. 특히 에벨링의 경우에 언어는 그것 자체가 사건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를 해석할 때 문자에 떨어지거나 그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에 머물 수 없다. 이는 곧 성서의 경험을 문자적으로 전달하거나, 또는 오늘의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과 그의 현실성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새롭게 중심 주제로 부각되도록 돕는 것이 곧 설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는 성서나 기독교 전통의 내용을 단순히 충실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고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전혀 예기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구원 사건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에벨링의 해석학에 따르면 간과될 수 없는 요소다. 과연 언어가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역사적 지평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언어 사건으로서의 설교가 갖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설교의 언어가 상투성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설교 현장에서 우리의 종교적인 언어가 과연 구원(사건)을 실질적으로 담지 해 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질문해야한다. 교회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명제가 어느 정도로 구원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지, 단지 확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지평을 확대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그런 지평의 심화가 없다면 성서와 설교행위는 죽은 언어에 집착하는 꼴이 된다.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오늘 교회 안에서 돌아다니는 언어는 사건이 아니라 사물과 같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죽은 송장과 같다. 가톨릭 신자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마리아 기도를 수 천 번 드리듯이 우리는 우주론적 깊이를 갖고 있는 성서의 언어들을 되풀이하면서 아무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기껏해야 외형적인 종교행위에 참여했다는 자기 위로에 머물러 있다.
나는 간혹 청중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설교 문제만 본다면, 참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생명을 담보하고 있는 성서의 언어들이 흡사 70년대의 ‘국민교육헌장’처럼 청중들에게 선포된다. 단지 목소리만 그럴듯하게 꾸몄을 뿐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앞부분에서 예로 든 설교에서 보듯이 뻔하게 알고 있는 말을 도덕군자연 혼자서 열을 올리든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에게도 설득력 없다는 사실을 폭로라도 하는 듯 무심하게 읊조린다.
우리가 설교 할 때마다 (구원) 사건으로서의 언어가 갖고 있는 힘을 회복하려면 우선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이해지평을 심화시켜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그것은 성서의 하나님과 그 구원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가 삭개오 본문으로 설교한다고 할 때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삭개오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였더니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거나, 예수님은 이렇게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만 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그 본문을 전혀 새롭게 해석해야만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미 선포된 그 용어, 그 문장, 그 스토리가 실제 구원 사건으로서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성서 언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힘을 완전하게 알지 못한 채 설교한다.
막내딸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잠시 뒤에 나오더니 “예수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나요?”하고 나에게 물었다. 예수님의 부활이 다시 살았다는 뜻일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살았다기보다는 다른 생명형식으로 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딸에게 설명해주기는 했지만 그 아이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보다는 지금처럼 이렇게 영원히 사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은 만약 천국에 가서도 이런 생명형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가지 않겠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를 도저히 언어로 형상화해 낼 수 없다. 종말에만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그 세계를 오늘 우리는 설교의 언어로 진술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설교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구원 사건으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영적인 감각을 예민하게 작동시키는 설교자라면 비록 모든 비밀을 단숨에 풀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성서가 구원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작은 과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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