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신학입문 조회 수 5419 추천 수 172 2004.09.14 13:50:09
3장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일반적으로 신학에 대한 오해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신학을 단지 정경으로서의 성서만을 공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와 상관없이 학문적인 이론만 공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신학을 이 성서의 하부구조로 간주하며, 후자의 사람들은 성서와 별개의 것으로, 또는 성서의 상위 구조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두 입장 중에서 어느 한쪽을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양측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말씀과 신학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1. 하나님은 말씀하는가?

 

창 1:3의 루터 번역은 이렇다. “Und Gott sprach: Es werde Licht!” 계 22:20의 루터 번역은 이렇다. “Es spricht, der solches bezeugt: Ja, ich komme bald.” 성서의 첫 부분은 하나님이 “말씀했다”이며, 끝부분은 “예수가 말한다”로 되어 있다. 그 이외에도 창세기 12:1-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여호와는 그에게 다시 나타나서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7절)고 말씀하셨다.

성서의 이런 진술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약간 혼란스럽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그 야훼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는 왜 나타나지 않으실까? 고대 시대에는 야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만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걸까? 도대체 야훼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이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성서 텍스트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관해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묘사된 그대로, 진술된 그대로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으로 분석하고 근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들에 관한 반감이 한국교회에는 만연해 있다. 무궁무진한 심층에서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것을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화함으로써 성서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어야 할 신자의 태도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진리의 영이 끌어가는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성서를 해석한다는 말은 성서가 집필될 때 작용한 ‘삶의 자리’를 우리가 전제한다는 말이다. 모세오경이 기록될 때의 ‘삶의 자리’와 이사야서가 기록될 때의 ‘삶의 자리’가 독특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예컨대 여호수아가 여리고과 아이 성을 공격할 때 그곳 주민을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당시에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표현을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 사람이 알아듣는 말로 전달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정서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생김새가 우리 인간과 비슷할 것으로 상상하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 성서의 이런 표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간주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기 힘들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언어 방식으로 직접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면 무슨 언어로 말씀하시는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한국어? 이미 오래 전에 에벨링이 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과 언어”라는 강의에서 지적한 바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말하는 자로 생각할 수 있는가? 설마 말을 한다고 하자. 어떤 언어로 말한다는 말인가? 하나님 자신의 특유한 언어가 있는가? 그렇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신비로운 번역과정을 통해 그의 언어가 인간 언어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런 하나님 말씀은 결국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이거나 아니면 반사 같은 것일 뿐, 직접 말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은 인간의 말이 아니겠는가?(신앙의 본질, 221)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을 전혀 달리하는 진리와 생명의 영이지 우리와 비슷하게 성대를 통해서 말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우선 명확히 하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했다는 성서의 진술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게 어떤 사건이었는지 우리가 자세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낸 사건이라는 사실만 우리가 언급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독특한 방식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문제를 이제 우리는 시인의 표현 방식을 통해서 풀어가도록 하자. 강인한의 시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제 1연은 다음과 같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창비 2002, 가을호).

 

바람이 라일락나무가지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게 사실일까?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라일락나무의 생각도 사실일까? 여기서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따지려는 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보는 시인의 눈이 우리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모든 게 말을 건넨다. 물론 시인의 내공에 따라서 참과 아름다움을 건져내는 이도 있고, 한낱 자신의 넋두리만 늘어놓는 이도 있겠지만, 하여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그런 사물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꽃은 시인들에게 어떻게 말하는 걸까? 산과 강은 시인들에게 무어라고 말하는가? 싯달타는 강물이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바람과 대지는 일반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은밀한 방식으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방식으로 말한다.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리는 비밀의 음성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도 아마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또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노출시키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융엘이 말하는 대로 <세상 비밀로서의 하나님>을 단지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인식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꽃에게서 실제 인간의 음성을 들으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말을 거신다. 따라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영적인 감각을 열어놓아야 한다. 성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이럴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모세는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에서 이런 영적인 시야가 트였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거룩한 힘의 움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계시록을 집필한 요한은 밧모섬에서 고독한 가운데 경천동지 할 신비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으며, “곧 오신다.”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2. 말씀과 계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는 “하나님이 계시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려고 해서는 알 수 없고 그분이 자신을 드러낼 경우에만 알 수 있는데, 이렇듯 하나님의 자기알림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론은 결국 계시론인 셈이다. 계시가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도 계시라는 말은 자주 등장한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박 집사님은 이번 산상 수련회에서 계시를 받으셨대!”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럴 때의 계시는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은밀한 비밀을 특별한 방식으로 깨우쳤다는 뜻으로 쓰인다. 어떤 점쟁이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히듯이 하나님이 어떤 개인에게 특별한 사건의 결과를 미리 알려주는 것을 계시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언저리에는 야곱이 형인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결국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줄행랑을 치던 중 벧엘이라는 땅에서 꾼 꿈이라든지, 요셉이 이집트의 감옥에서 전직 관료들의 꿈을 해몽해 준 일, 혹은 다니엘 이야기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신약성서에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들 이야기,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면서 유대인으로서 겪는 갈등 가운데서 본 환상(사도행전10장 참조), 요한계시록의 기상천외한 종말 표상들이 있다. 이런 성서 보도와 계시를 일치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 떠도는 신비적 계시 체험이 많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확대 재생산되어서 굉장히 추상적이고도 실용적인,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계시론을 형성되었다.

계시를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게 되면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일단 신앙적인 체험을 이런 계시사건에만 두려고 하기 때문에 독단론으로 흐를 염려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신앙 형태는 무언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어떤 객관적이고 타당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계시를 받았다는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해 버린다. 한국 교회에 이단 시비가 그치지 않는 것은 계시에 대한 이런 이해에 근거한다고 보아야 한다. 많은 이단사설을 내세웠든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자신들이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통일교의 문선명 씨는 자신의 <원리강론>에서 자기만이 예수와 예언자들을 직접 만나서 계시를 받기 때문에 자기의 성서 해석만이 정확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 안에서도 다소간에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글뢰게의 설명에 따르면 “계시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개념이나 신학적인 개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후기 그리스 철학에,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적 묵시문학에 기인한다.”(G. Gloege, “Christliche Offenbarung, dogmatisch” in: RGG, Bd.r, 1606).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의 뜻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비밀스런 사건이 곧 계시라는 말이다. 신약성서에서 “계시하다”는 뜻을 가진 몇 가지 단어 중의 하나가 “아포칼립테인”인데, 이 단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어버리고 그 얼굴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 혹은 초월적인 존재가 자기 자신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을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계시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헤겔이나 바르트, 그리고 판넨베르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를 자기계시로 규정하는데, 이 말은 곧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 계시가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실체로서 어느 시공간에 존재하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릴뿐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을 여전히 인간의 감각적 경험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 특별 대사를 보내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듯이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린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이건 아주 큰 오해다.

이 ‘자기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물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르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신구약성서 어디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한 곳이 없으면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 없다. 구약에는 거룩, 불꽃, 천둥, 구름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신약에서는 거의 그런 묘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같은 곳에서도 거의 비유적인 설명뿐이다. 예수님이 설명한 하나님 나라도 역시 씨 뿌리는 농부, 돌아온 탕자 이야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 이야기처럼 비유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떤 실체로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늘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와 흡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날카로운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궁극적인 생명을 완전하게는 모르듯이 하나님도 역시 모른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받았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표현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거나 그분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는 뜻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게 아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미래를 자기만 배타적으로 받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도 역시 매우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성령을 주거나 받는 게 아니라 성령의 자유에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갈 뿐이다.

 

3. 하나님의 말씀(계시)과 성서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성서가 곧 하나님의 계시인가?” 이 문제는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조명될 수 있지만 우리 개신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거의 반론 없이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이런 논의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는 바르트는 이 계시를 사건으로서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쓰인 계시로서의 성서, 선포된 계시로서의 설교로 해명했다. 즉 삼중적 형태로서의 계시 이해이다. 그런데 계시 사건인 예수도 결국 성서를 통해서만 우리가 알 수 있으며, 선포인 설교도 역시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은 성서에 집중된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말씀의 신학”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바르트의 이런 관점은 우리 개신교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 신학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오늘 신학을 하는 우리들은 이 문제를 어떤 선입견 없이 풀어가야만 한다. 성서가 곧 하나님의 계시 자체인가? 만약 이 명제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신학은 단지 성서주석에 머물러 있으면 될 것이다. 근본주의 입장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논의 자체를 거부한다. 이와 달리 성서의 전체 영감설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약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성서만이 온전한 계시라고 믿는다. 사실 이런 입장이 가진 강점은 적지 않다. 성서의 역사 자체가 오래 되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역사가 2천년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기만 하더라도 교회와 신학은 그 사명을 충분히 감당하는 것이다. 공연히 세상 학문을 기웃거리다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렸던 과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19세기 유럽 신학을 가리켜서 “신개신교주의”, 또는 “자유주의”라고 일컫는 이유는 이들이 성서를 중심으로 신학 작업을 펼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나 이성, 또는 계몽과 교양에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세상의 지성적인 사람들에게 약간의 호응을 받을지는 몰라도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외면을 당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와 신학의 역사가 성서를 중심으로 흘러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좀더 정직하게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다른 변수가 발견될 것이다. 일단 우리의 정경 자체가 완전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 무엇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증언해 줄 뿐이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아니다. 앞서 계시는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했는데, 이 말이 맞는다면 성서가 하나님이어야 한다. 성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우화로 설명해보자.

 

어떤 사람들이 호랑이를 보았다고 했다. 각기 본 장소나 시간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대낮에 약초를 캐러갔다가 호랑이의 등을 보았으며, 다른 사람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밤중에 호랑이의 빛나는 눈을 보았다. 또 어떤 사람은 호랑이를 보긴 보았는데 개울물을 바람처럼 건너뛰는 순간의 그런 분위기만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은 직접 보았다기보다는 그렇게 경험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호랑이를 직접 본 사람은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어쨌든지 그런 호랑이를 경험하는 순간에 오금이 저리거나 식은땀이 나기도 했고, 흥미진진하기도 했으며, 그냥 궁금증만 더하기도 했다. 이들의 호랑이 경험이 입으로 전해지다가 어떤 신문 기자가 이 소식을 듣고 취재했다. 이 기자는 자기가 취재한 내용을 전문가의 의견을 곁들여 신문에 실었다. 이 기사를 본 어떤 사람이 외국에 사는 자기 친구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여보게, 갑이라는 사람이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네. 그 사람은 약초를 캐러갔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얼마나 무서웠든지 오금이 저려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 그로 인해서 큰 병을 얻게 되었고 그 이후로 두문불출한다네. 을이라는 사람은 개울을 바람처럼 한걸음에 건너뛰는 호랑이를 보았다네. 그 사람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매일 동네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닌다네.”

 

성서의 전승과 기록, 그리고 이 문제를 약간 더 확장해서 그 뒤로 이어지는 설교라는 사태를 우화라는 구조로 꾸며본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무엇인가? 호랑이에 대한 경험은 많았지만 정작 그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호랑이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도 증언일 뿐이지 호랑이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일반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경 자체가 오래 동안의 전승과정을 통해서 수정 및 편집됨으로써 어떤 통일성만이 아니라 어떤 다양성, 또는 이질성이 그 안에 녹아들어갔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성서와 계시를 동일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권위에 의심이 간다는 말은 아니다. 성서는 어떤 문자적인 완전함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가장 바르게 증언하고 있는 문서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성서는 신학 작업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성서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신학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이미 전승과 정경화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성서는 하나님의 흔적을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게 담고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성서는 독단적으로, 폐쇄적으로 하나님과 그 계시를 확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것에 의존적으로 계시와 연관된다. 그 어떤 것은 곧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전체 역사를 말한다. “역사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라는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말씀 계시로부터 역사 계시로 신학적 사유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그의 신학적 착상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이 없다. 단 여전히 잠정적이고 은폐된 이 세계 가운데서 절대자인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언급할 경우에 여전히 부분적인 것을(바울) 우리 신학의 절대적인 준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절대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신학이 바로 판넨베르크의 역사계시, 역사신학이다.


사람사랑

2007.01.12 01:44:53
*.140.43.132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저도 신학 학부를 다닐 때 조직신학 시간의 신 존재 증명이라는 발제 시간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들었던 비유는 목사님과 같이 '호랑이'에 대한 경험은 아니었고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경험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사랑에 대한 완전한 이해나 정의는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죠. 다만 사랑을 경험한 자의 자기 고백만이 있을 뿐이죠. 어떤 이는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자기 희생'이라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사랑이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말이죠.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겠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 조카에게 이성 간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일테구요.
목사님의 말씀 200% 공감합니다. 우리는 성서가 많은 이들이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왜 하필 무수히 많았던 신구약의 후보들 가운데 오직 지금의 66권만이 정경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인간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봐야겠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의 성경을 통해 문자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기에 이 모든 과정을 허락하지 않으셨나 생각됩니다.
어차피 성경보다 더욱 본질적인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갈망하는 '들을 귀 있는 자들'의 각자의 삶 가운데 찾아오는 것일테니까요.

사람사랑

2007.01.12 01:51:09
*.140.43.132

참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인데요.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에 대해 인간적 범주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전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다가 하나님의 존재 개념은 우리의 시공을 초월하여 있다는 말씀이 조금이나마 잡힐 듯 하더라구요.^^ 그런데 모든 평신도 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라고 할 수도 없고 공부한다고 모두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니 우리 교회에 초등학교만 졸업하신 할머니 권사님들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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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민욱

2007.05.04 18:14:38
*.80.127.119

전에 읽었을 때는 이런 말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하게 된 후에 다시 읽어보니
여기 답이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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