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해석학적 현상학
-마틴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현대 철학자 중에서 하이데거(1889-1976)만큼 심각하게 신학계에 영향을 끼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끼칠 학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헤겔과 칸트, 니체, 딜타이, 화이트헤드가 이런 저런 관점에서 신학적 착상에 기여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하이데거만큼 충분하지는 못했다. 구체적으로는, 그의 실존철학이 불트만의 실존주의신학에 끼친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어서 에벨링이나 푹스나 오트 등의 경우도 이런 범주에 포함된다. 내가 볼 때 거의 노장의 도(道)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기독교의 계시론, 신론, 종말론을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오래 전부터 니체의 사상에 익숙한 상태에서 1920년대 후반 이후로, 특히 1927년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 출판된 이후로 니체의 허무주의 개념을 자신의 학문적 바탕으로 채용했다. <존재와 시간>은 새롭게 발견된 역사성의 차원이 후설에 의해 현상학적으로 파악된 존재 질문과 연관된 결과다. (인간) 현존의 범례와 길잡이는 자기 존재를 이해하는 주제인데, 여기서 이 존재의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현존의 미래에서 발생하는 시간성을 분석하고, 또한 현존 실행의 역사성을 분석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이 역사성은 단지 존재적인(ontisch) 모든 소여(所與)와 달리 현존의 존재 성격을 규정한다. 여기서부터 이제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이런 차별화를 은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판넨베르크, 신학과 철학, 389).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태두인 후설의 제자로서 “사상(事象)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현상학의 기본 노선에 서 있으면서, 그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를 선험이 아니라 “사실성”(Faktizität)에서 찾고자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해석학적 지평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질문과 언어존재론을 중심으로 그의 해석학적 현상학 문제를 풀어가면서, 그런 철학적 착상이 신학과, 특히 설교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검토해볼 것이다.

존재 질문(Seinsfrage)

1929년 7월4일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교수 취임 강연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었다. 거기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라이프니쯔가 제기한 명제인 “왜 존재자는 있고 무(無)는 도대체 없는가?”(Warum ist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 mehr Nichts?)를 화두로 삼았다. 이것은 그저 당연하다고 치부해 버려도 될만한 진술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오랜 동안 문제의식을 갖고 천착해온 존재 해명에 대한 근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고 없는 것은 없는가?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은 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가?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자의 무(無)라고 규정했다. 이 무는 현존이 자기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있음’과 ‘없음’을 절대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으로 해와 달, 나무와 돌, 온갖 생명체와 문화유산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론 분명히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할 필연에 의한 결과는 결코 아니라 우연하게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에게는 딸이 둘 있다. 그 애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나의 아내와 내가 결혼하고 육체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딸아이들이 존재자가 되어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만약 내가 내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혹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아이들의 존재 근원은 바로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육체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존재 근원은 또 다시 옛날로 소급된다. 어디까지 소급되는가? 다른 한편으로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또는 내가 내 아내와 다른 시기에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더라면 지금의 바로 그 딸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태어났을 수도 있다. 또한 내 몸에서 배출된 정자 중에서 우리 딸아이들의 생명이 된 바로 정자가 아니라 다른 정자가 착상되었더라면 또 다른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을 것이다. 어쨌든지 나의 두 딸이 이 세계 안에 들어와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엄격히 말해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존재자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존재할 수 있었지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그래야만 했을까? 예컨대 왜 토끼라는 종(種)만 존재하게 되었고 그것과는 약간 다른 것은, 즉 토끼와 거북이의 중간쯤 되는 것들은 왜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가는 질문이다. 진화의 과정이 왜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어서 현재의 존재자들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오래 전 고은 시인이 티브이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진행자의 질문에 따라서 자기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풀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대목이 기억난다. 원래 고은 시인은 서정주 시인의 문하생(?)이었다. 출가하여 산사에서 수행하며 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에 휩싸였다. 왜 이런 것들은 여기에 있고 그 이외의 것들은 없는가? 그런 사유의 혼란 중에 서정주 선생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아랫목에 앉아 있는 서정주 선생을 보면서 저 사람이 왜 저런 모습으로 이 시간에 저렇게 앉아있을까? 그 생각을 하게 되지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방안이 떠나가라고 웃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서정주 선생은 “이 사람아, 웃지 말게나.” 하고 말렸다. 그래도 고은 시인은 참지 못하고 그 서정주라는 존재가 너무나 우스워서 계속 웃어댔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젊은 사람이 무례하게 웃음을 참지 못하니까 결국 혼만 나고 쫓겨났다. 그 이후로는 서정주 선생 댁에 발걸음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작년(2001년) 여름 고은 시인이 고인이 된 서정주 시인을 비판한 글 때문에 문학계 안에서 논란이 심각하게 벌어진 적이 있지만, 이런 사건을 그 옛날 고은 시인의 사유 발전과 연관시켜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시인의 정신적 세계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까지 확대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현상하는 실체들의 근원을 탐색하는 사람들은 결국 존재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왜 오늘의 세계는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일까?

따라서 무엇은 존재하고 무엇은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질문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묻는 철학적 사유 앞에서 신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할 때 주먹구구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반드시 그들 방식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틀을 완전히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외칠 수는 없다. 신학적 사유도 역시 존재에 대한 그들의 깊은 사유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 미래를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만약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흡사 산신령쯤으로 생각한다면, 또는 권선징악의 원리쯤으로 생각한다면 자기 집단에 속해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위안이 될지 몰라도 삶과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물리학은 물질을 실체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은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이지 무엇이 실체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물리적 사실 앞에서 과정철학은 이 세계를 운동과 변화로 설명하려고 했다. 만약 기독교가 하나님을 여전히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로 주장한다면 오늘의 물리학과 철학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받아들여야만 기독교의 가르침이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범주 안에서 하나님을 설명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물리학과 철학에서 논의되는 존재론이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는데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으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강요한다면, 그러면서 이것을 신앙이라고 우긴다면 선교적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고, 진리론적 차원에서는 더더욱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오늘의 학문이 존재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지 잘 살펴서 우리의 사유가 그 보편적 타당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존재’는 그것 자체로 있는 게 아니다. 존재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에 의해서 드러나는데 그것을 ‘현존’이라고 한다. 인간은 현존하는 존재자다. 인간만이 현존하지 다른 것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에 이 존재는 세 가지 형태로 자기를 드러낸다. 사유, 언어, 세계다. 하인리히 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이데거의 경우에 “존재는 사유의 역운(Geschick, 歷運)으로서 일어난다. 존재는 언어로서 도래한다. 존재는 세계로서 발생한다.”(H. Ott, 존재와 사유, 217). 우리가 사유함으로써 존재가 드러난다기보다는 사유가 사유함으로써 그렇다. 우리는 사유에 참여할 뿐이다. 언어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 우리는 그 언어의 말함에 참여할 뿐이다. 세계가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존재성이 세계로서 발생하는 것뿐이다. 하이데거에게 물(物)은 땅, 하늘, 신성, 사멸할 자들인 사중자(Gevierte)가 모이는 장소다. 따라서 세계의 사물은 단순히 정태적인 물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발생하는 통로다.
하이데거의 물(物)의 전향과 연관해서 계시의 세계 차원이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 있는 딜레마 중의 하나는 신앙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신앙의 세계는 세계 너머에 있고 학문의 세계는 세계 내에 있다는 점에서 쉽게 결합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계를 배제한 체 구원을 말할 수는 없다. 다행히 하이데거의 물 사유를 통해서 신체적인 물의 세계가 자체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중자가 회합되는 세계로 심화되었기 때문에 창조론, 섭리론, 종말론과 연관해서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물의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열려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 의해서 신체적 세계는 가능한 초월을 향하여 구조적으로 열려졌다. 이 ‘열음’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지시된 본질 구조다. 만약 이런 물의 존재 역운적 성격을 간과하고 창조를 주장한다면 이것은 자기 속임수에 불과할지 모른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 세계와 물을 성속 이원론에 근거해서 무시하면서 순수 심령주의에 빠진 경향을 보였다. 이런 것에 대한 비판으로 마르크시즘이 등장했다. 오늘의 자연과학자들도 역시 이런 기독교의 심령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역으로 창조과학회에 속한 이들은 이 세계와 물을 현상 그대로만 볼뿐이다. 초월과 내재가 엉성하게 뒤엉켜 있는 셈이다. 이제 하이데거의 물 사유로 인해서 신학은 물의 영성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처럼 최근 하이데거의 사유 시도가 신학에 대해서 가지는 가능한 의미는 광범위하다. 창조론으로부터 기독론을 거쳐 종말론에 이르고 성례전론과 교회론에까지, 그리고 섭리론과 기도론에 있어서 신앙을 위한 계시의 최종적 구체화와 활성화에까지 이른다. 물에의 전향은 하이데거의 ‘사유의 사유’에 있어서 이제까지 마지막으로 딛은 발걸음이고 가장 깊이 성찰된 최후의 발걸음이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변증하는 고집에서 풀어놓아 자유롭게 성서를 듣도록 하기에 적합하다.”(H. Ott, 존재와 사유, 254).

선험적 현상학과 해석학적 현상학

하이데거는 후설의 조교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의 현상학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현상학으로 해명이 안 되는 영역이 있음을 알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현상학적 인식은 주체성의 내면으로, 선험적 주관성에 모든 대상들을 환원시킴으로써 그 대상들을 근원적으로 밝혀보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현상학적 환원이 그 현상학적 탐구의 주제로 설정된 사실적 삶을 상실하는 것으로 보고, 현상학을 사실적 삶의 이해에 정초 시키려고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현상학은 ‘사실성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해석학적 현상학이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선(先)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현상학적 사유는 지각의 명증성을 화두로 해서 그 지평으로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 또는 그 존재를 선취적으로 해석하는 반성이다(김영필, “현상학과 해석학”, in: 해석학과 현대철학). 현상과 본질(현존)은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두 실체가 아니라 서로 공속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현상을 명증하게 고찰할 수만 있다면 그 본질도 이해할 수 있다. 본질이 현상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상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본질은 현상들에 즉(an)해 있고, 현상들은 본질에 즉 해 있다. 따라서 현상학적 해명은 현전경험의 밝음과 비현전경험의 음영진 지평이 이미 항상 보다 근원적인 지평 속에 서 있는 이중적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는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늘진 채 얼크러져 있는 근원사실 자체는 공허한 지평이기 때문에 지각이라는 지향적 실마리를 통해 풀어 밝히는 작업이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적 사유 속에는 의식이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에 세계를 향한 통로가 차단되어 있으며, 열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 내재적인 것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론에 머물지 않고 존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인다.

참고적으로 이 두 철학자의 차이점을 몇 가지 대목으로 나누어 잠시 검토하면 하이데거의 독특한 해석학적 착상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의식- 후설은 의식을 선험적 주관성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에서 이 영역에 접근해갔지만, 하이데거는 이 영역 속에서 인간의 역사적인 ‘세계-내-존재’의 생동적인 매개체를 보았다. 그는 존재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한 단서를 그것의 역사성과 시간성에서 찾았다.
2) 과학- 후설은 수학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했고 하이데거는 신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사람은 과학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후설은 이러한 과학적인 인식론에 근거해서 철학이라는 엄밀학, 즉 보다 고차적인 경험론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엄밀성은 결코 과학적 인식을 최종 목표로 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 후설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이었지만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이란 역사적인 것이고 과거의 창조적인 재발견이며 해석의 형식이었다.
3) 역사성: 후설은 시간성을 관찰한 다음 내적인 시간의식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했다. 그런데 그는 실증적인 인식의 요구에 집착한 결과 이러한 시간성을 과학의 정태적이고 표상적인 용어로 바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존재 자체의 시간성은 부정되었으며 정지상태에 있는 관념의 영역을 옹호하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볼 때 후설의 작업은 데카르트, 칸트, 피히테가 정립한 모델을 정교화한 것에 불과했다. 하이데거에게는 사유의 역사성은 이들의 입장과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상학의 원리에 의해서도 역시 ‘존재와 시간’에서 분석한 내용이 정당화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볼 때 현상학이 단지 의식에 대한 해명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그것의 현(現)사실성과 역사성 속에서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참조).

후설과 또한 후설에게서 영향을 받은 하이데거에게 이 현상학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파이네스타이’와 ‘로고스’의 합성어인 현상학(Phänomenologie)은 어떤 사물에 우리의 범주를 부과하지 않고서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언가 자신들의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서 범주화하는 것으로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매개는 인간의 의식인데, 만약 이 인간의 의식이 문제가 있다면 사물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현상학은 인간의 의식에 상관없이, 이 의식활동이 기존의 철학활동이었는데, 사물 자체에 들어감으로서 사태를 훨씬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상(事象)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 자체가 우리에게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다. 이미 후설도 현상학의 명제를 ‘사상 자체로’라고 언급한데서 알 수 있듯이 현상학의 근원이 하이데거에게서 훨씬 심원한 의미를 획득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특징은 지금까지의 서양 철학사의 맥락을 끊어내고 새롭게 정립시키는 작업이다. 인간의 의식, 심리, 인식이 아니라 사상 자체가 드러내는 사실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즉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진리의 탈은폐, 존재의 탈은폐에 해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주관성과 사변적 성격의 한계를 직시하고 사상 자체로 온전히 돌아가는 태도가 이것이다.

존재의 탈은폐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이미 기존의 방식대로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나 사변성이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존재의 탈은폐는 결국 인간의 주관적 인식과 그 경험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앞에서 잠간 언급한대로 인간은 이 존재의 탈은폐 사건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현존이다. 이런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실존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하면 그게 그것 같지만 우리가 좀 더 엄밀하게 분석해보면 하이데거와 기존의 형이상학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이 자신의 의식으로 그 대상을 의식하고 범주화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인간의 인식 행위조차도 역시 존재의 역운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이 대상을 범주화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탈은폐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이 말하지 않던 것을 말한다. 존재자는 비존재로 인해서 존재한다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늘 존재자에게만 관심을 두었던 서양 형이상학의 틀을 깨고 있다. 그의 해석학은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사상을 은폐로부터 벗겨내는 근원적인 해석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 의미는 해석(Auslegung)이다. 현존재(Dasein)의 현상학의 로고스는 해석하다(헤르메네웨인)라는 성격을 갖는데, 존재의 본래적 의미 및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의 근본 구조들은 이러한 해석학적 성격을 통해 현존재 자체에 속해 있는 존재 이해에 알려지게 된다. 현존재의 현상학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해석학이다. 그리고 이 근원적인 의미는 해석이 해야 할 바를 특징지어준다.(Sein und Zeit, 37).

이전의 해석학은 텍스트를 문법적으로 이해한다든가 해석하는 것, 또는 심리적인 동일성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정신과학의 분야에서 삶의 본질에 속한 역사적 성격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그런 정도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이해와 해석의 존재론으로 돌입한다. 하이데거에게서 “해석학의 본질이란 사물들의 존재 및 현존재의 존재의 가능태들을 탈은폐시킬 수 있는 이해와 해석의 존재론적 능력”이다. 즉 해석학이 이해의 문제이긴 하지만 근원적으로 차원에서 이제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게 무엇일까? 쉴라이에르마허에게는 텍스트의 원저자와 동일한 심리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동일한 심리상태는 텍스트를 문법적으로 완전하게 소화해낼 수 있다고 해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그런 종교 감정에서 일치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쉴라이에르마허의 경우에 이해다. 딜타이의 경우에는 이해가 삶 자체의 표현을 추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이 이해가 최소한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1) 하이데거에게 이해는 자신이 실존하고 있는 생활 세계의 맥락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해는 그저 인간의 어떤 능력이라기보다는, 즉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나 재능이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한 양태, 혹은 구성 요소다. 어떤 한 인간에게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재능이 있다고 해서 이해가 발생할 수는 없다. 우리가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이미 세계내존재의 구성요소다. 이해과정이 바로 존재론적 성격을 갖는다.
2) 이해는 언제나 미래와 연관된다. 이해의 본질은 단순히 현존재의 상황성을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세계 속에 처해 있는 지평 내에서 구체적인 존재 가능성들을 탈은폐하는 데 있다. 이해의 이런 측면에 바로 <실존성>(Existenzialität)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경우에 이해도 역시 존재론적으로 진술되고 있는 셈이다.

언어- 존재의 집

하이데거에게서 언어는 참된 이해가 열리게 되는 ‘존재의 지평’에 놓여 있다. 존재가 사유를 통해서 참을 드러내듯이 동시에 언어를 통해서도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언어 사건에서 존재와 사유가 연관된다. 소위 ‘언어 존재론’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착상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자. 이를 통해서 그가 말하는 해석학의 존재 지평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 언어에 대한 시원적 해석
하이데거의 “휴매니즘에 관한 편지”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등장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가택에 인간이 거처한다. 사유하는 자들과 시작(詩作)하는 자들은 이 가택의 파수꾼이다. 그들의 파수는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말함을 통하여 이러한 개방성을 언어로 나타내고 언어 속에 보존함으로써 존재의 개방성을 완수한다.(53).
식물과 동물은 그 환경 속에 퍼져 있으나 존재의 밝혀줌 속에는 들지 못하고 이 밝혀줌만이 ‘세계’이며, 그들은 자유롭게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다. ... 언어는 그 본질적으로 어떤 유기체의 표명도 아니고 생물체의 표현도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기호의 성격으로부터도 생각할 수 없고 의미성격으로부터도 아마 본질에 적합하게 생각할 수 없다. 언어는 밝혀주고 감추는 존재 자체의 도래이다.(70, 하인리히 오트의 <존재와 사유>에서 재인용)

우리가 일반적으로 언어를 의사소통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훨씬 심층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할 때 이것은 존재와 언어의 불가분성, 그 동시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존재의 밝혀줌, 존재의 말건넴은 언어의 존재론적 특성인 셈이다. 우리는 보통 인간이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하이데거가 제시하고 있는 시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언어가 말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과 언어가 말을 한다는 것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질문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해석한 책을 낸 적이 있다. <시와 철학 -횔덜린과 릴케의 시세계->. 하이데거는 이런 시인들의 시를 단순히 인간의 주관적인 언어 행위로 생각하지 않고 언어가 말한다는 입장에서 해석한다. 어떻게 언어가 말하는가? 시인들의 사유를 통해서 형상화된 시 세계는 그 시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포함하고 드러내는 언어의 존재론적 작용이 들어 있다. 일종의 언어사건인 셈이다. “언어는 그 본질적으로 인간의 표현이나 활동이 아니다. 언어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시(詩) 속에서 언어의 말하기를 찾는다. 찾는 것은 말해진 것의 시적인 것 속에 분명히 들어 있다.  ... 언어가 말한다. 다시 말하면 동시에, 그리고 먼저 언어가 말한다는 뜻이다. 언어가 말하는 것이지 인간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직접 말하는 자는 인간이지만 언어 자체가 그런 힘을 보유하기 때문에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존재론적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말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원적 언어는 존재 자체다. 존재는 언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의 말하기는 하나의 응대다. 시인들은 자신이 억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의 말함은 인간의 말함에 앞서 있는 선험적 사건이다.
우리의 설교 행위에서도 그것이 창조적으로 전개될 때는 설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이 표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서의 언어에 담겨 있는 힘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의 역할은 그 언어의 자기 노출을 막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인데, 사람은 주관적인 경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전하는 예언자라 할 수 있다.  

2) 대담
우리는 하이데거의 언어 해명을 대담이라는 관점에서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가 횔더린의 시를 분석하면서 분석이나 주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담이라고 일컬었듯이 본질적 언어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역사학적으로 분석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말건넴에 응대하는 것이다. 즉 서로 간에 상대를 설득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언어의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흡사 어린이들의 놀이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이와 어린이의 상호작용이라기보다는 놀이 자체가 어린이들을 끌고 가고 어린이들은 그것에 응대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더 본원적인 언어이해는 언어 분야에 있어서 주관주의의 철저한 극복이며, 이것은 대담으로서의 주석의 새로운 양태를 강요해낸다.”고 말할 수 있다.

3) 신학적인 차원에서의 말씀
하인리히 오트는 하이데거의 대담 개념을 중개로 해서 신학 행위에서도 역시 언어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차원에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하이데거가 폐기한 언어의 주관주의적인 오해를 신학에서도 가려내야 한다. 예컨대 성서의 역사-비판적 주석은 필요한 만큼의 주관주의적 언어이해로 규정되었다. 과거의 텍스트가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본래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찾아내는 게 그 주된 목표이다. 그것을 넘어가는 차원에 대해서 성서 주석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성서 증인들이 각개 명제를 가지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정확하게 발견해냄으로써 바울과 요한과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이사야와 시편 저자들을 주석하면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들과 더불어서 대담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들의 인도를 받아서 계시의 공통적 사상(事象)에 직면해 서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답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 모든 이유는 우리가 그들 모두와 더불어서 하나의 성도의 교제에 속하기 때문이다.”(오트, 213,214). 성서 기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훨씬 본원적인 신학 작업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서 기자나 많은 신학자들도 역시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들과 영적인 교제 안에 있다.
둘째, 성서의 단어들은 존재로부터 역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오늘의 신학자는 언어 속에 계시의 역운(Geschick)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언어에서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굳이 동일한 내용을 다른 용어로 조작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는 오히려 언어 자체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의 역운을 통해서 계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맞게 응대할 뿐이다.
셋째, 언어의 대답 성격이 중요하다. 말은 대답이다(Wort ist Antwort). 언어의 말건넴 성격은 곧 대답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존재가 밝혀지고 드러난다. 요한복음 1:1에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말씀이 진술되어 있듯이 언어의 말건넴에 대답함으로써 사상(事象)이 세상이 밝히 드러나게 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언어를 통해서 전승되며, 그 과정에서 심화되고 확대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언어에 대답할 수 있는 적절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언어가 도중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역시 도중에 있다. 언어가 존재를 밝혀주고 있지만 여전히 길이기 때문에 신앙도 역시 계시를 드러내고 있지만 여전히 길에 놓여 있다.


존재 망각과 하나님 망각

어느 집 장손의 돌잔치가 벌어졌다. 원근 각처에서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놓았다. 손님들은 점심때부터 시작해서 밤늦은 시간까지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얼마나 많은 음식이 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이들 모여서 많이 먹고 시끄럽게 떠들고 흥겹게 지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이 장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돌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저마다 덕담 한 마디씩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아이는 유모가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하루 종일 데리고 놓았다. 손님들은 이 기회를 맞아서 주인장에게 얼굴 도장 찍는다는 마음으로 왔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가 사업 구상에 마음이 맞아서 하루 종일 그런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갔다. 시의원은 이 기회에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연신 인사나누기에 정신이 없었다. 옆집에 사는 열 살짜리 어린 소녀는 안방에 들어가서 이 아이와 같이 놀아주었다. 오직 이 소녀 하나만 돌 맞은 아이를 생각했지 나머지는 자기 생각뿐이었다.

설교 행위에서 가장 근본적인 주제로 다루어져야 할 ‘하나님’이 종속변수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인간학이 자리 잡아 가는 이 현실은 설교의 위기다. 최근에 많은 설교학 강의나 이론들이 지나치게 청중과의 관계, 대화술, 전달효과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이 근본 문제가 등한하게 다루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늘 기도하라, 전도하라, 헌금하라, 봉사하라, 복을 받는다, 윤리적으로 살아라, 등등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을 주제로 삼는 경우라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은 결국 인간관계나 정신분석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교회론적 사고방식이 너무 압도적으로 작용한다. 이 문제는 여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교회와 연관된 문제에 해당될 정도로 중요하다. 성서 텍스트가 말하려고 하는 사실을 잘 찾아내서 오늘의 언어로 해석해주는 이 설교 행위를 단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설교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형태의 설교가 결국에는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교회에 잘 나와야 한다는 데에 모아진다. 부활 설교를 해도 그렇고, 성령 설교를 해도 그렇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다보면 결국 큰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충동질한다. 약간 사회적인 책임감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감에 대해서 역설한다. 교회에 대한 관심이 사회로 바뀌었을 뿐이지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설교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양자 모두 한결같다. 기독교 신앙이 열광적인 교회 봉사나 사회참여, 도덕성 회복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이 세계 안에 살아가는 자로서 그것이 완성될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고 선취적으로 참여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교회 관리와 성장에만 설교의 초점이 모아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런 쪽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도그마화(化)한 하나님의 그림이 자리 잡고 있다. 만약 이 도그마가 고정된 진리로 작용하게 되면 진리의 미래 개방성을 용납하지 못하고 형해(形骸)화하고 만다. 그런 경직된 도그마는 진리와 함께 작용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를 자기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마련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이해가 도그마로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다른 정신세계에 대해서, 다른 진리에 대해서 얼마나 폐쇄적인 자세로 임하는가 하는 문제의 시금석이다. 예컨대 단군상 건립 반대 운동이라든가,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상영 금지 투쟁이라든가, 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청원한 <군대체복무> 반대 주장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것 만인가? 불교 사찰이나 성당 방화 사건도 심심치 않게 자행되고 있다. 종교재판을 통해서 집시나 자유주의적 인문학자나 과학자들을 처단해버리던 중세기의 권위주의적 종교행태와 거의 똑같은 정서다.
셋째, 하나님과 그 계시가 이미 완료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정보를 많이 수집하기만 하면 그만큼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으로 여긴다. 정보는 그야말로 정보에 머물고 말지 본질을 알려주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런 정보에 충실하게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 정보는 사실상 껍데기다. 하나님에 대한 상이한 경험들에 대한 진술을 하나님과 일치시키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모두 드러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흡사 수박 껍질만 맛보고 수박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하나님과 그의 계시는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난다. 아직도 우리가 역사의 과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종말에 완전히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계시가 이미 완료된 것처럼 설교한다는 것은 무지일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무 것도 확실하게 설교할 수 없다는 말일까? 그럴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설교는 선포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과감하게 선포해야한다. 다만 그 선포는 늘 해석학적 과정이 거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석의 과정 없이 도그마의 명제가 직접적으로 선포될 수도 있다. 다만 이럴 경우에도 그 설교자가 자신에게만은 이런 해석학적 해명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게 아는 설교다. 아는 세계를 설교해야 설득력이 있듯이 우선 기독교 교리를 실제로 알아 가는 행위가 전제될 때 살아있는 설교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 세계의 역사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설교자는 자신을 노출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놓고 기다릴 것이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신부라면 기름과 등잔을 준비한 체 밤을 새워가며 기다리지 않겠는가? 이런 준비는 신학자와 설교자들에게 어떤 태도로 자신의 과업을 수행해나가야 하는지 분명하게 지시해준다.  

하이데거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에 존재가 은폐되었다는 뜻에서 ‘존재망각’이라고 했는데, 이런 점에서 설교 행위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망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리를 대신 인간의 조직, 감정, 열망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이렇게, 저렇게 해봅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겁니다.” 그렇게 교회당도 짓고 선교사도 보내고 복지관을 세운다. 그런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야 옛날에도 많았다. 로마 가톨릭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우리보다 한 단계 위다. 로마 베드로 성당보다 훨씬 값나가는 교회당을 건축하고 싶나? 그들의 조직보다 훨씬 막강한 조직이 필요한가? 아무리 인간의 일들이 놀랍게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자체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건 없다. 오늘날 교회 체계에 의해서 은폐된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려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신교 신자들이 다시 업적신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훼손당하고 만다. 하나님을 설교의 주제로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오늘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풀어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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