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트로아스에서의 환상, 10월17일
(행 16:6-10)        

리스트라에서 트로아스 까지
지금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바울의 선교 여행일지는 성서기자의 관점에 따라서 그 강조되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것의 객관적인 내용을 재구성할 수는 없다는 건 앞에서 여러 번 지적되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6절) 하셨다는 이 진술이 도대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원래의 바울답지 않게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이유가 그 근방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판단을(3절) 감안한다면 아마 바울이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된 게 아닐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방인 선교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이제 석연치 않은 문제를 빌미로 바나바와도 갈라섰으니 바울의 입지가 얼마나 축소되었을지는 불문가지이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뿐이지 바울은 아시아에서 더 이상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바울이 선교하는 지역은 바나바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어쨌든지 이런 상황을 누가는 성령께서 막았다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성령께서 막았다는 진술의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 미루고 바울이 리스트라에서 트로아스까지 이르게 된 그 여정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바울은 아시아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자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녔다(6절)고 한다. 지금 누가가 설명하고 있는 아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우리가 지도에서 정확하게 짚어내기 힘든 이유는 그 당시에 지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붙여졌다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라고 한다면 본문에서 바울이 전도하고 있는 그 전체 지역을 가리키는데, 오늘 본문에서 누가가 말하는 아시아는 1차 선교여행의 후반부에 들렸던 곳인 데르베, 리스트라, 이코니온 지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과 가까운 곳일 뿐만 아니라 바나바의 선교영역이라는 점에서 바울을 배척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이제 바울은 미련 없이 그 지역을 포기하고 훨씬 먼 지역으로 선교의 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프리기아와 갈라디아가 바로 그런 곳이다. 프리기아나 갈라디아라는 지명은 어떤 구체적인 도시를 말하는 게 광역에 대한 통칭이다. 예컨대 프리기아에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거의 망라되어 있으며, 갈라디아는 프리기아보다 조금 북쪽으로 치우친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는 어느 한 교회가 아니라 그 지역의 여러 교회에 쓴 편지인 셈이다. 갈라디아의 중심에 바로 오늘날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가 있다.
요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성지 순례는 주로 이스라엘과 터키이다. 이스라엘은 복음서의 배경이며, 터키는 사도행전의 배경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성지로 선정된 것 같다. 성지순례는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에게 중요한 신앙적 행위였으며,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도들도 티베트 수도인 라사 순례를 매우 거의 필생의 과업으로 여긴다. 그들 중에는 삼보일배, 또는 오체투지로 수년간에 걸친 순례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도 물적 토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런 성지순례가 거의 일상화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신앙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이스라엘이나 터키를 순례함으로써 기독교의 역사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겠지만 거기에 투자되는 노력에 비해서 그런 것들은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들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성지순례는 자칫 또 하나의 우상숭배로 작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나 터키에 남아있는 기독교적 유적이라는 게 대개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공부라는 건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을 주술화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바울의 선교활동도 실제로는 이 터키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 지역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출발이 터키의 서쪽 항구 도시인 트로아스였다.

트로아스에서
바울 일행은 터키 남서부의 프리기아와 북동부의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도하다가 다시 서부의 미시아로 옮겨왔으며, 다시 북서부인 비티니아 지역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예수의 성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서(7절) 결국 트로아스로 내려왔다. 저자 누가는 이번 단락에서도 역시 성령이 바울 일행의 선교 일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특히 이번에는 ‘예수’의 성령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무엇을 보고 이렇게 예수의 성령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는 것일까? 어린아이가 아닌 다음에야 실제로 예수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바울의 설교권이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할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바울은 자기가 원하지 않은 가운데 결국 터키의 변방인 트로아스까지 밀려난 셈이다.
트로아스는 비록 변방이지만 지정학적으로 매우 미묘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 그 당시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 트로아스에서 배를 타야만 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을 돌면서 무역업을 하던 모든 상선들이 에게 해 우편에 자리한 이 트로아스를 중요한 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콘스탄틴 대제가 330년에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보스포러스 해협에 세운 이스탄불(원래 이름은 콘스탄티노풀)이 동서를 이어주는 거점 도시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조금 아랫부분에 있는 다다넬스(?) 해협에 가까운 트로아스가 거점 도시였다는 말이다.
바울이 “어느 날 밤”(9절) 그곳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보았다는 진술을 미루어보면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당분간 체류한 게 분명하다. 여기서 독자들은 약간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터키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언권을 잃은 바울 일행이 그 당시 지중해 항로의 요지인 트로아스에 머물면서 무엇을 기도하며 계획했을까? 지금 바울은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과도 점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그가 율법주의자들과 더 이상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렇게 많지 않다. 율법의 여파가 적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소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는 그리스였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북쪽을 마케도니아라고 부르고, 남쪽을 그리스라고 부른 바로 그 지역이었다. 이곳의 여러 도시들은 아테네의 철학적 유산이 직접적으로 미친 곳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이 아니라 철학에 근거해서 변증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곳은 그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 한발자국이라도 더 가깝다는 이점도 있었다. 세계 시민이었던 바울이 트로아스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지는 우리가 약간만 생각해도 따라잡을 수 있다.
그 결과가 곧 어느 날 밤에 바울이 본 환상이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서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9절) 하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두 번이나 성령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며, 여기서 다시 그와 비슷한 현상이 그들에게 일어났다고 한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단순하게 바울이 생리학적으로 경험한 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다보면 그것이 무의식을 지배하게 되고, 그 무의식이 꿈으로 발현하는 법이다. 아시아에서 더 이상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바울이 이런 꿈을 꾸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 문장
이 꿈을 좀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단서가 바로 10절부터 시작되는 인칭대명사의 변화라고 한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는 삼인칭이 주어로 사용되었는데, 바로 이 대목부터 당분간 일인칭 복수인 ‘우리’로 문장형태가 바뀐다. 이 말은 곧 이 트로아스에서부터 이 저자가 바울과 동행한 게 아닌가 하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일인칭의 방식으로 여행일지를 기록한 사람이 곧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원래 병약했던 바울이 트로아스에서 병이 들었으며, 그를 돕기 위해서 마케도니아로부터 의사 한 사람이 건너왔는데, 그가 곧 누가라는 말이다. 그는 바울과의 오랜 대화 끝에 마케도니아 선교의 필요성을 설득시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 실체적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울의 환상을 보고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긴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면서 여객선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별로 뾰족한 선교 기회를 찾지 못하던 그들이 확실한 방향을 정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이 곧 세계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카이로스인 셈이다. 왜냐하면 바울 일행의 이런 결정에 의해서 이제 복음이 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들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바울이 본 환상을 마케도니아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해석이다.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여러 사건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에 신앙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이런 선택은 분명히 해석이다. 바울 일행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는 늘 이런 해석을 통해서 고유한 길을 걸어왔다. 교부들이 헬라 철학을 수용하는 과정도 역시 헬라 철학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해석이 작용한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 해석의 정당성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아시아를 넘어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간 바울의 선택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본다. 그들의 선택을 통해서 이제 복음은 철학의 옷을 입게 되었으며,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로마 문화와 결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종교적 언어인 히브리어에서, 철학 언어인 헬라어로, 그리고 결국 법과 정치 언어인 라틴어를 통해서 기독교는 계속적으로 자기 변화를 모색했다. 만약 팔레스틴 공동체가 원했던 대로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예루살렘 안으로 제한하려고 했다면 복음의 보편성이 확보될 수 없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복음은 그런 범주에 머물지 않고 ‘땅 끝’을 향해서 자신의 길을 감으로써 지금 극동의 한민족에게까지 왔다. 이런 선교역사의 단초가 바로 트로아스 항구에서 본 바울의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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