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노동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의 그리스 전도 여행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그리고 아테네에서도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곳은 몇 주간, 또는 어떤 곳은 길게 잡아도 몇 달을 넘지 않았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안정적인 공동체를 설립했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누가가 확보하고 있던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이쪽 지역의 선교가 바울의 힘만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탄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지 바울은 앞서의 지역에 비해서 이곳 고린토에 오래 머물렀다. 11절은 바울이 일년 육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고 진술한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2절)에 근거해서 49/50년 겨울부터 51년 여름까지가 그 기간이라고 한다.
바울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떠나게 되는 이유는 대개 그곳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함께 공부한 17절 끝부분의 설명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그런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토로 왔다. 신약성서로 자리를 잡은 바울의 편지 중에 아테네서가 없고 대신 고린도서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놓고 추정한다면 아테네에서는 별로 선교의 효과가 없었던 게 아닌가, 그래서 큰 어려움이 없었어도 그곳을 떠난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고린토에서 바울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로마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로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이었다. 그 칙령은 모든 유대인들이 아니라 사회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아퀼라는 로마에서 상당히 큰 사업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사업은 물론 피혁제품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로마에서 추방된 아퀼라는 이제 고린토에서 그 사업을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본문을 읽어보자. “바울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3b,4절).
바울은 이미 그 당시에 설교를 할 뿐만 아니라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이런 걸 놓고 본다면 그는 지금의 목사들처럼 성직자로서의 업무를 감당한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도 그는 피혁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가서 노동했다. 성직자의 노동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가부간의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고대사회와 달리 지금처럼 분업화한 세상에서는 성직자가 일반 노동을 한다는 게 무조건 정당하다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5절에 보면 실라와 디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고린토로 내려온 다음에 바울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전도에만 힘썼다고 하는데, 이는 곧 그들이 필립비에서 상당한 정도의 선교비를 갖고 왔다는 의미이다. 이런 걸 놓고 보더라도 바울의 노동 문제를 오늘의 교회에 무조건 대입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의 노동문제와 연결해서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오늘의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이 지나치게 직업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교회의 선교지향성이 상실되고, 대신 직업의 의미가 지배한다는 의미이다. 설교도 역시 이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매우 실감나는 표현이다.

아, 이런 일은 때로 강단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이 그렇게 계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런던의 유명한 설교자는 말 그대로 예배 중에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았기 때문에 그의 얼굴뿐 아니라 뒷모습까지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머리 모양을 잘 기르고 다듬는 데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것은 실화로서, 사람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아마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나쁜 형태의 얄팍한 직업주의입니다. 또 다른 목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머리에 웨이브를 만들고 인공 선탠을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직업적인 사람은 늘 자신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기교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직업적인 사람은 남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그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흉내 내고자 노력하며 그렇게 관찰한 것을 자기 ‘기교’에 도입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연기의 세계에서도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능을 타고난 배우가 실제로 연기를 해 나가면서 배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메소드 연기법’이 도입되면서 모든 배우가 똑같은 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메소드 연기법’이라니! 예전의 진짜 연기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가지 방법론에 따른 연기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설교와 설교자, 388>

다른 하나는 노동이, 특히 육체노동이 인간의 구성요소라는 점에서 목사에게도 필수적인 게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목회 자체가 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몸을 움직이는 노동이 목사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오늘의 시대는 인간의 몸을 완전히 무시하는 정신주의로 빠지거나, 아니면 그것을 절대화하는 유물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교회는 주로 전자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목사의 육체노동은 필요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점은 인간이 몸으로 살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생존하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깨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몸의 신학이 없는 설교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신비로운 영상
바울은 고린토에 머물러 있는 ‘어느 날’ 밤에 신비로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주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겁내지 말라. 잠자코 있지 말고 전도를 계속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10절). 이 구절은 이사야 43:5절을 상기시킨다. ‘내 백성’이 많다는 것은 고린토에 기독교 공동체가 설립될 것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서 경험한 이 영상은 무엇일까? 바울은 그리스로 넘어오기 전에 트로아스에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도와달라는 영상을 보았다(행 16:8). 그뿐만 아니라 누가는 바울의 선교 여행이 성령의 구체적인 이끌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서 증언했을 정도로 바울은 신비로운 환상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스데반도 순교 장면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을 보았다고 한다. 성서의 인물들이 경험한 이런 영적인 현상은 무엇일까?
이런 것들은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해명하기 힘들다. 이 세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현상들이 늘 고정된 것으로 남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2천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바울의 이런 경험은 그가 전혀 새로운 영적 지평을 현실로 경험했다는 의미이다. 은폐된 생명의 세계인 하늘로 승천했다가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할 예수가 실제로 바울에게 나타났다기보다는 예수에 대한 영적인 일치 경험이라고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말하면 뭔가 좀 찜찜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한쪽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 현상을 구체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불평을, 다른 쪽의 사람들은 너무 종교적으로 말한다는 불평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이런 불평을 염두에 두고 예를 들어 조금 더 설명해보자. 여기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 있다. 그 노랫말을 지은 시인과 슈베르트는 무엇을 경험했을까? 그들의 경험이라는 게 과연 실증적인 것인지, 또는 아무 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 이들의 경험은 너무나 확실한 것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친구를 만나는 방식으로 확실한 게 아니라 예술적 경험의 차원에서 확실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이런 경험은 바로 종교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에서 아주 확실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영적인 경험은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에 의해서 마왕이 작곡되었듯이 바울 같인 영적인 깊이가 주어진 사람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신학적 착상도 역시 이것과 다르지 않다.

이방인을 향해서
고린토에서 바울은 유대인들과 다툼을 벌였다. 이 상황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실라와 디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 온 후로 바울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면서 오로지 전도에만 힘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대들며 욕설을 퍼붓자 그는 옷의 먼지를 털면서 ‘잘못의 책임은 당신들이 지시오. 나에게는 잘못이 없소. 이제 나는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다.”(5-7절). 누가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게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런 논리는 사도행전 전체에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도 바울은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로 갑니다.”(행 13:46b)고 한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다음에도 역시 이런 비슷한 일이 벌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 구원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행 28:28).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유대교에 대해서 이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로마서에서 자기 민족을 향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사적 선교 섭리를 말하기 위한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누가는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해서 새로운 종교로 자리하게 된 책임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바울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까?
아마 여기에는 누가 개인적인 문제의식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고, 시대적인 상황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리스 지역의 교회가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유대교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독립이 유대교의 배척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 그 핵심이었다는 말이다. 어쨌든지 바울은 누가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의 명실상부한 대표자로 부각되었으며, 기독교 공동체는 이제 떳떳하게 자기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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