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밀레도스에서 가이사리아까지(21:1-14)
3월20일

성령의 지시와 역사 해석
밀레도스에서 행한 바울의 고별설교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바울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1세기 후반 초기 공동체에서 불거졌던 사이비 이단 문제의 책임이 바울에게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곧 누가의 바울 해석이다. 누가는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온몸을 던진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정통이라고 보았다. 누가의 이런 해석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간혹 ‘예수 세미나’ 계통의 학자들은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예수가 훼손되고 대신 헬라화한 예수가 등장했다고 비판하지만 이런 주장은 자칫 역사 실증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사도들의 예수 증언인 성서 텍스트는 이미 그들의 예수 해석이며, 그런 해석을 통해서 2천 년 전의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복원해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설령 상당한 부분에서 그런 작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나온 결과들은 일종의 역사학으로서의 가치만 있을 뿐이지 궁극적인 진리와 연결된 종교로서의 가치는 없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가 혁명가이기 때문에, 또는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이다.
바울이 밀레도스에서 행한 고별설교의 기조는 그 이후로 몇 번 반복된다. 그들은 밀레도스에서 코스로, 코스에서 도로스를 거쳐 바다라로 항해했다. 소아시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 바다라에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인 페니키아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2절). 거기서 이스라엘의 북서쪽 항구도시인 띠로까지의 항해는 이틀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예루살렘이 최종 목표였지만 이 배는 띠로에서 짐을 풀어야 했기 때문에 바울 일행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띠로 공동체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을 말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인데, 바울은 밀레도스에서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설교한 적이(20:22) 있다. 한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게 성령의 지시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올라가지 않는 게 성령의 지시라고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접근하는 게 좋겠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지시라는 바울의 설명은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그리고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말린 띠로 신자들의 생각은 바울이 당하게 될 시련을 중심으로 성령의 지시를 이해한 것이다. 어디에 무게를 놓는가에 따라서 하나의 사건이 서로 상반된 결론으로 도출된 셈이다.
둘째, 우리는 성령의 지시를 직접적인 게 아니라 간접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 아무리 영에 밝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해외 선교사로 떠나는 게 바로 성령의 뜻이라고 설교하거나 그렇게 간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해석했다는 것이지 성령의 뜻을 직접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뜻을 분간할 수 있을까? 일단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의 해석인 기독교 역사를 바로 알고,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차원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심화함으로써 성령의 뜻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성령의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 판단은 역사적으로 가능하다. 바울의 신학이 정당했다는 사실이 바울 시대는 인정받지 못하다가 훗날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말이다.

전도자 필립보
바울 일행은 띠로 신자들의 간곡한 만류를 뒤로 하고 다시 배를 타고 다시 항해하여 프톨레마이스로 내려와 일박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결국 예루살렘의 관문인 가이사리아 항구에 입항했다. 이 가이사리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에는 몇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다.
가이사리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필립보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필립보는 원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6:5). 사도행전 기자는 이 일곱 명의 지도자를 집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제로는 사도 못지않은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열 두 사도만으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의 요구까지 해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히브리파와 헬라파 사이에 적지 않은 신앙적 긴장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일곱 명의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독교 분파가 형성된 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이 필립보였는데, 그가 스데파노 다음으로 거명되었다는 것은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필립보의 활동은 8장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케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8장에 서술된 필립보의 선교활동에는 그 어떤 사도들 못지않은 영적인 능력이 넘쳤다. “군중들은 필립보의 말을 듣고 또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는 모두 하나같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행 8:6). 누가는 필립보의 선교활동을 자세하게 언급한 다음에 그가 마침내 가이사리아에 이르렀다는 말로 그 이야기를 접었다.(행 8:40). 필립보는 아마 이곳 가이사리아에 공동체를 설립했을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이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필립보가 다시 등장했다.

필립보의 딸들
누가는 필립보를 거명할 뿐이지 그가 바울 일행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대신 누가는 필립보에게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딸들이 있었다는 사실만 지적한다. 그런데 그 딸들은 예언자였다고 한다. 예언자라고 한다면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과 연관해서 무언가 역할을 했을 법한데도 누가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몇 가지의 추정만 가능하다. 우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교회의 전승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지 모른다. 누가가 썩 괜찮은 역사가이며 문필가였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의 분량으로 본다면 글의 완성도가 부분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는 이 딸들이 바울에 관해서 예언했지만 그 당시에 처녀들의 예언이 별로 덕스럽지 않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내용을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후에 등장하는 하가보의 예언이 바로 이 딸들의 예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언은 둘째 치고, 우리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이 딸들을 중심으로 바울의 이 사건을 조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명의 딸들이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시중드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더구나 그들은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처녀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며칠 머무는 동안에 바울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수도 있고, 또는 앞으로 가이사리아 공동체에서 할 일에 대한 부탁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예언자였다는 누가의 보도를 감안한다면 바울의 운명과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영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가보
누가는 필립보와 그 딸들에 관해서 한 마디로 정리한 다음에 갑자기 등장한 하가보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전달한다. 이 사람은 유다에서 내려온 예언자였다고 한다. 하가보는 바울 일행 앞에서 무당들의 살풀이 같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손발을 묶고 이렇게 말했다. “성령께서 ‘이 허리띠의 주인을 유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하가보의 이런 예술적 행위가 사실적인가 아닌가 하는 건 여기서 질문할 필요가 없다. 누가는 지금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려는 것뿐이다.
누가에 따르면 하가보는 자기가 보인 상징적 행위를 곧 성령의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지금 누가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성령의 뜻이라는 점을 수차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서 성령의 뜻이 조금씩 발전해나간다. 밀레도스의 고별설교에서는 단순히 예루살렘 방문이, 띠로의 신자들에게서는 예루살렘 방문을 말리는 것이, 지금 하가보에게서는 구체적으로 바울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사실이 성령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
하가보가 바울에게 닥쳐오게 될 위험을 적나라하게 알린 탓인지 가이사리아 신자들만이 아니라 바울 일행도 덩달아 울면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말리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으로 묘사되는 이 여행일지에 동참한 사람들은 구호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부터 바울과 함께 여행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들까지 나서서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했다는 장면은 바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했던 장면과 오버랩 되어있다.

바울의 고난
누가는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품었을만한 바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주 예수를 위해서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묶일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도 되어 있습니다.”(13절). 이미 24절에서도 바울은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바울을 변호하고 있는 누가의 절절한 심정이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 우리는 약간 객관적인 태도로 이 문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예루살렘 방문이 생명을 담보해야 할 만큼의 실제적인 위협이었을까?
물론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일부 황제들에 의해서 순교의 피를 흘린 건 분명하지만 그런 게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보다는 정치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도 로마정권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는(고후 11:24) 진술을 보면 바울의 고난은 주로 유대인들에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도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누가는 지금 바울의 인생 전체를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상징적인 사건과 연결해서 극대화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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