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에페소에서 밀레도스까지(20:1-16)  3월6일

사도행전 읽기의 흐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이쯤해서 앞서의 전체 구도를 잠시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일정한 편집 목표에 따라서 진술되고 있다. 그 목표는 성령이 초기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사도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복음 선포의 성과가 크게 나타났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아주 강력한 속도로 확장되던 복음이 유대교와 헤롯왕의 박해를 받았지만, 그 박해로 인해서 복음은 훨씬 넓은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런 격랑기에 바울이 등장한다. 복음을 박해하던 바울의 회심은 이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율법과 복음의 자리에서 오직 복음의 자리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지역적으로는 이방인 첫 교회라 할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인물의 관점에서는 바울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의 시대로 들어선다. 그는 1,2차 선교에서 갈라디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지역에 복음을 선포했으며, 3차에는 갈라디아 서안의 에페소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오늘의 말씀은 이 에페소에서 한바탕 난리를 겪은 다음부터 진행된 바울의 여행 일지이다.

에페소에서 드로아까지
더 이상 에페소에서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서 개척한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기로 했다. 20장1절은 이것을 축약해서 묘사한다. “그 소동이 가라앉은 뒤에 바울로는 신도들을 불러 격려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 저자의 감정과 판단이 일절 중지된 문장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이 몹시 어려웠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의 선교는 늘 안팎으로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유대교로부터의 노골적인 박해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복음 공동체를 지향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어떤 근본적인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는 사실을 시나브로 깨닫고 있었을지 모른다. 에페소에서 일어난 소동은 그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이 에페소에서 당한 시련은 롬 15:30,31절, 그리고 고후 1:8-10절에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울은 다시는 에페소에 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자들을 격려하고 떠났다.
마케도니아 지역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 여러 유명한 도시들이 있는데도 누가는 구체적인 도시 이름을 거명하지 않는다. 바울이 도착한 아카이아(그리스) 지역에도 아덴, 고린도, 겐크레아 등의 도시가 있지만 역시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한 도시들, 그리고 그곳에 형성되어 있는 교회를 누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누가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 큰 싸움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현재 에페소에서 일어난 소동과 그 인근의 나쁜 분위기 때문에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가 하는 게 의심스러운 마당에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에서 활동한 내용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울의 쫓기는 심리가 3절에 드러난다. “거기에서 석 달을 지낸 뒤에 배를 타고 시리아로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자기를 해치려는 유다인들의 음모를 알아채고 다시 마케도니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의 항구 도시인 겐크레아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에 들렸다가 예루살렘을 거쳐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던 2차 선교여행과 비슷한 일정을 계획했지만 신상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걸 포기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그들은 두 패로 갈라섰다. 디모데를 비롯한 7명이 먼저 드로아로 떠났고, 누가를 비롯한 나머지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다음에 필립비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했다. 먼저 떠난 7명은 아마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선교비를 지참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어쨌든지 그들은 아주 위험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길을 통해 예루살렘까지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중이다. 그곳에서 다시 합류한 그들은 일주일 동안 함께 지냈다(6절).

드로아에서
드로아는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드로아는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상징성이 높은 장소였다. 갈라디아 지역에서 별로 이렇다 할 복음 선포의 기회를 찾지 못하던 바울이 드로아 항구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케도니아 사람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외치는 환상을 그곳에서 경험했다(행 16:6-10). 이런 점에서 드로아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비상하게 된 항구 도시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이제 바울의 선교 역사가 끝나는 바로 이 순간에 다시 드로아를 언급한다.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비전이 싹텄던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은 모든 선교 역사를 정리하는 신앙적 세리모니를 갖게 되었다. 7절 말씀을 보자. “안식일 다음 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 바울로는 그 이튿날 떠나기로 되어 모인 사람들과 밤이 깊도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식일 다음 날이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주일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중요했으며, 또한 그들은 수시로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그들은 오늘의 성찬식을 나누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의 성찬식은 원래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랑의 만찬으로서 모든 신자들의 공동식사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식사로 인해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에 관해서 바울이 경고한 적도 있다. 다른 하나는 세례 받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식(儀式)으로서의 성찬식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성찬식은 예배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으니까, 그것의 영적인 의미만 한 가지 짚도록 하자. 성찬식은 기본적으로 물(物)의 영성화가 그 핵심이다. 비록 빵과 포도주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그 사실은 이 세상의 물질과 영이 기본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물의 도구화, 몸의 도구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세계관은 이런 성만찬적 신앙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뜻하지 않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바울의 설교가 재미없었든지 아니면 유디코라는 청년이 하루 종일 노동한 까닭에 피곤했는지 모르지만 3층 창문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디코는 졸음을 참지 못해서 결국 창문 밖 밑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청년을 부둥켜안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살아 있소.”(10). 바울의 말대로 유디코는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누가는 왜 유디코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까? 바울이 떠난 다음에 사람들이 이 청년의 일로 인해서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는 표현을 미루어볼 때 이런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드로아에서 밀레도스까지
그들은 소아시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스까지 내려왔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아쏘까지 육로를 택했지만 그 뒤로 그들은 배를 이용했다. 누가가 여기서 강조하는 있는 것은 바울 일행이 서둘러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16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바울로가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페소에는 들르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바울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비교적 중요했던 에페소에 바울이 들리지 않은 이유는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단지 시간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에서 한번 지적한대로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주로 에페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본다면 시간문제라는 것도 틀린 건 아니다. 에페소에 들렸다가 공연히 시시비비가 붙으면 이미 빌립비를 거쳐 드로아에 오기 전에 무교절을 지낸(6절) 그들에게 오순절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보내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을지 모른다는 염려는 당연하다.
바울은 무슨 이유로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려고 한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그 이유를 해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누가 자신도 이후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으며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서만 언급할 뿐이지 오순절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표현은 아무래도 저자인 누가의 문학적 구성력이 다소 소홀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분석할 수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체를 놓고 볼 때 바울의 운명을 예수의 그것과 대조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당하신 것처럼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그런 운명을 말렸던 것처럼 바울의 제자들도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을 극구 말린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처럼 바울도 역시 그렇다. 이런 구조라고 한다면 예수가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처럼 바울도 그 유월절과 연장선상에 있는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구도는 자연스럽다.
어쨌든지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조급한 심정으로 올라가고 있는 바울의 마음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지금 무엇 때문에 올라가는가? 그가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하는 것만이 목적인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바울의 비장한 설교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국 체포당하고 피의자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 당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내면에 매우 심각한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 전체를 배경에 놓고 그 상황을 추정한다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일정한 부분에서 율법으로 결탁해 있는 유대교와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 온 몸으로 맞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발을 들여놓는 중이다. 예루살렘 교회와는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유대교 신학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 바울에게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 은밀한 사태를 폭로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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