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체포된 바울 (21:27-40)  4월3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
사도행전 독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이미 20:17절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제 그 시련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결의식은 곧 율법 문제로 인해서 불거진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을 풀어보기 위해서 바울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누가가 서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진행을 따르면 이 정결의식이 오히려 바울에게 닥친 시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바울이 정결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시빗거리가 불거졌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본문 27절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난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로가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고.” 군중을 선동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에페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에페소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큰 선교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 대극장에 모인 군중들은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 하고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쳤다고 한다.(19:34). 사람들은 천성에 따라 살기도 하지만 문화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런 열광적인 도시 에페소에서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제 지난날 그들이 에페소에서 경험했던 그런 방식으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군중들을 선동하는 중이다.
원래 바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에 들어가 공개적으로 정결의식을 행한 이유는 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품었던 의혹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부정한다는 이 의혹이 이번의 정결의식으로 인해서 해소되었는지 아닌지, 누가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대신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등장시켰다. 왜 그랬을까? 누가는 바울과 사도들 사이에,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율법 문제로 인해서 벌어진 갈등 구조의 방향을 바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싸움으로 바꾸려 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헬라파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사이에 놓인 갈등이 아무리 심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건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별로 지혜롭지 않았을 것이다.
에페소 출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가한 비난은 이미 앞에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야고보와 원로들이 바울에게 충고한 내용과 다를 게 없다. 바울은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28절). 다만 에페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할례 대신 성전을 강조했다는 사실만 다르다. 이렇게 할례 문제가 성전문제로 바뀐 이유는 이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상대화한다는 소문만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힘들다고 보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실증을 앞세운 것이다. 29절에서 우리는 그들의 음모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바울로가 시내에서 에페소 사람 드로피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필경 바울로가 그 이방인을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죄는 이렇게 어림짐작으로부터 시작된다.

로마군 파견대장의 개입
에페소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에 따라서 예루살렘 온 도시가 소란해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전통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힌 사람은 죽여야만 했다.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 성전 문지기는 더 이상 성전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을 닫았다. 누가는 31절에서 거기에 모여들었던 군중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증거도 없으며, 최소한의 종교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는 건 약간 과장된 진술로 보인다. 특히 그 당시에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이 로마 총독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로 바울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미 앞에서 바울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쳐온다는 사실을 예고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그 예고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로마군 파견대장이 예루살렘 성안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백인대장들을 대동하고 직접 현장에 출동했다. 파견대장이 출현하자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린치는 그쳤다. 파견대장은 바울을 체포하고 쇠사슬 둘로 그를 결박했다. 거의 죽음 일보 직전에 이를 정도로 가혹행위를 당한 바울을 다시 두 개의 쇠사슬로 묶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조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누가는 이를 통해서 행 21:11절이 성취되었다는 걸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베드로도 감옥에서 두 명의 간수 사이에서 쇠사슬로 묶였든 적이 있다.(행 12:6).
폭동으로 비화할 수 있는 현장을 일단 제압한 파견대장은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군중들에게 질문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군중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며 소란을 피워서 진상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34절)고 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어떤 분명한 죄목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른 소리’를 내지르고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내의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되었을 것이다. 바울을 공격하는 그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단지 교회 공동체를 시끄럽게 만들 뿐이었다고 말이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으로 끌어가게 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난폭하게 굴어서 바울을 끌고 가던 군인들은 바울을 둘려 메고 난간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런 장면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군인들이 바울을 둘러멘 채 흥분한 군중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지금 그런 장면을 정확하게 기술하려는 게 아니라 그때의 분위기만을 전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자연스런 묘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중들이 뒤따라오며 “그놈을 죽여라!”(36절) 하고 외친 장면은 에페소 군중들이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라고 외친 장면과 흡사하다. 바울은 이렇게 비이성적인 집단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반론 기회를 얻는 바울
군중은 선동에 약한 법이다. 에페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서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미친 듯이 떠드는 군중을 뒤로 한 채 바울과 파견대장은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 병영 문 앞까지 끌러간 바울이 먼저 파견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한 말씀 드려도 좋겠습니까?”(37절). 그는 왜 로마 파견대장에게 로마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말을 걸었을까? 그는 출생 때부터 로마 시민권 소지자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가 헬라어를 구사한 이유는 그 당시에 라틴어보다는 헬라어가 훨씬 고급의 언어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이 대목은 바울의 학문과 지성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현대 신학계에서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차치하고 그가 당대에 최고의 석학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의 복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을 통한 신학화 작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곧 바울을 통해서 일어난 기독교의 헬라화가 기독교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인간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헬라와 로마 문명이라는 토대에서 해석하고 적용한, 그래서 논리화한 바울의 신학 작업을 기독교의 변질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바울의 고급 헬라어를 전해들은 파견대장은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오? 그렇다면 당신이 얼마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파견대장이 거론하는 이집트 사람은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이 사람은 펠릭스 총독의 재임 기간 중에(52년부터) 반로마 무력투쟁을 이끌었다고 한다. 본문에 자객으로 번역된 ‘시카리’는 ‘시카’, 즉 단도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예수의 제자 중에도 여기 출신이 있었다.
바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르소 출신의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39절). 바울의 이 대답이 실제로 바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으며, 또한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이 대답에서 누가의 신학을 읽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 바울을 무력혁명가와 비교한 파견대장의 말은 그 당시에 헬라파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로마 정부의 의혹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 또는 기독교를 적대하는 어느 집단이 퍼뜨린 소문의 일부일 수도 있다. 누가는 차제에 이런 의혹을 완전히 불식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반로마 무력투쟁의 두목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직할인 다소 출신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반(反)로마가 아니라 친(親)로마라는 뜻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어떤 관계였는가를 파고들려면 한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매우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수의 공생애와 원시 기독교와 교부들, 급기야 밀랑 칙령으로 기독교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로마 제국과 숙명적으로 얽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지 않았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부정될 때는 순교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투쟁했지만, 그것이 인정될 때는 지나칠 정도로 로마 제국에 협조적이었다. 어쨌든지 지금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반로마 무력투쟁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이다.
군중들에게 한 마디 하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을 파견대장이 받아들였다. 바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답지 않게 흡사 파견대장과 같은 권위로 군중들을 조용히 시켰다. 누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들이 아주 잠잠해지자 바울로는 히브리말로 연설하였다.”(40절).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첫째, 로마는 기독교에 우호적이다. 로마의 권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둘째, 유대인들은 결국 바울의 영적인 권위 앞에서 잠잠해질 것이다. 바울의 복음 선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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