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바울의 고별연설 (20:17-38) 3월13일
                              
성령의 지시
누가는 지금 바울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였다는 사실을 자기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외치는 중이다. 바울의 회심부터 시작해서 그에 의해 열린 소아시아와 유럽 선교의 역사는 시나브로 끝나가는 중이다. 물론 누가의 보도가 바울의 활동을 모두 담아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흐름을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 활동에는 시련이 그치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은 접어둔다 하더라도 행 20:3절에 진술되어 있는 대로 유대인들과 갈등은 아주 심각했다.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지경인데도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별로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지금 바울이 여행의 목적지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유대교 열성분자들과 바울에게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본산이다.
바울은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려는 것일까? 20:22절 말씀을 따른다면 바울은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바울 서신을 참고한다면 그는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에서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러가는 중이다. 그것이 곧 성령의 지시라는 것일까? 만약 그것만이 여행 목적이라고 했다면 바울의 비장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그곳에서 투옥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는 진술은 순교를 의미한다. 바울이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할 목적이 단지 구호금 전달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포괄적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내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임무”(24a절)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의 임무가 이렇게 포괄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이 텍스트가 누가의 바울 해석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해준다. 누가는 지금 바울이 초기 기독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가에 대해서 변증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가 맡겨준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누가가 말하려는 핵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누가의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가의 바울 해석이기는 하지만 바울의 실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는 나름으로 그 당시의 바울 전승을 상당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며, 사도행전이 경전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은 곧 그의 이런 해석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이 유대교와 예루살렘 교회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타파하기 위한 바울의 단호한 의지의 발현이었다는 지난 시간의 결론과 이런 정황 자체가 결국은 누가의 바울 해석이라는 오늘의 논의가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전자에는 바울의 주관적 의지가 중심이지만 후자는 누가의 해석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점들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모순이지만 신학적 해석이라는 틀에서 보면 큰 문제는 없다.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복음에 천착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교의 전통인 율법을 극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바울이 이런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런 바울의 입장을 누가는 자신의 바울 일대기에서 구체화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너무 디테일한 쪽으로 흘러간 것 같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와서, 바울의 이 고별연설이 과연 바울이 직접 한 말일까, 하는 질문을 짚고 넘어가자. 앞에서 말한 누가의 바울 해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혹시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울의 어록집이 그 당시에 남아있었다면 모를까, 그런 게 없었다면 오늘의 이 연설은 누가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을 알고 있는 누가가 그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바울을 변호하기 위해서 바울의 직접적인 언급에 가까운 연설문을 대신 썼다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텍스트를 읽을 때 저자인 누가와 주인공인 바울의 신학을 함께 담아내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누가의 ‘삶의 자리’
바울의 연설은 사도행전 앞부분에 나온 베드로나 스데반의 설교와 달리 별로 길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상당히 복잡하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단지 바울의 신앙만이 아니라 바울이 죽은 다음인 1세기 말의 교회 현황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6절을 보자. “앞으로 여러분 가운데 누가 멸망하게 되더라도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는 바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에페소 장로들에게 주는 연설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단과 배교에 대한 염려를 한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린다. 29,30절 말씀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내가 떠나가면 사나운 이리떼가 여러분 가운데 들어 와 양떼를 마구 해칠 것이며,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자기를 따르라고 할 사람들이 생겨날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교회에 닥치는 시련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언급은 저자 누가 당시에 초기 기독교가 크게 영향 받았던 영지주의에 관한 설명이라고 한다. 물론 바울 당시에는 이런 이단 사상은 교회 안에서 활개 치지 못했다. 누가는 소아시아 교회에 벌어진 이런 시련의 책임이 바울에게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고별연설을 통해서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오늘 텍스트에 묘사된 것을 그대로 따른다면 바울이 에페소 장로들에게 이단사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 것이며, 저자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를 강조한다면 바울이 이단출현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양자 중에서 무엇이 성서읽기의 중심인지는 간단하게 결정할 수 없다. 오늘 텍스트에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초기 기독교부터 신자들의 신앙과 삶을 오도하는 가르침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할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며, 신앙의 선배인 바울의 “훈계”를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바른 가르침을 기억한다는 것은 서로 연관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당연히 과거의 전통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오늘 우리의 신학계와 교회의 신앙풍토를 이 문제와 연관해서 한번 짚어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전통을 문자의 차원에서 수구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통 자체를 해체하려고 한다. 수구주의자에게는 깨어 있음이 부족하고, 해체주의자에게는 기억이 부족하다. 하여튼 우리는 아직 은폐된 성서 텍스트가 우리에게 말을 걸 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선의 준비를 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으며, 또한 이런 점에서 성서의 창조적(진리론적) 해석은 여전히 요구된다.

예수의 경구
고별연설의 마지막 단락인 32-35절은 주로 약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바울의 권면을 담고 있다. 35절 말씀을 보자.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35b).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경구가 복음서에는 없다. 도대체 이것이 어디서 왔을까? 바울은 예수의 생전에 예수를 친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사도들과도 별로 사이가 돈독할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경구를 어디에서 얻어들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경구는 예수의 가르침으로는 그렇게 빛나는 말씀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도덕군자들이 내뱉었을만한, 우리의 속담에도 나올만한 이런 경구를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예수의 경구로 거론한다는 것은 그렇게 보기에 좋은 건 아니다.  여기에는 또 다시 우리가 모를 속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다.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은 예수의 경구가 여기에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예수 전승에 관한 형편을 약간 들여다볼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가장 전통적인 문서로 일컬어지는 Q자료만이 아니라 수많은 단편들이 회람되거나 소문에 소문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직접 예수에게서 사도들이 들었던 말들도 있겠지만, 직접 들었다고 허풍 치는 사람들의 말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생각을 충분하게 담고 있는 말들도 있을 것이다. 말이란 한번 전해질 때마다 전하는 사람의 해석이 소량이라도 담기게 마련이어서, 실제로 예수의 고유한 말이 그대로 간직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경전으로 삼고 있는 복음서에 역사적 진실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의 책임 있는 학자들이 충분한 학문적 과정을 통해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사건을 거의 정확하게 전달해준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들의 문학적 이해가 우리와 달랐다는 점만은 우리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지금 누가의 관심은 필자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한 것처럼 바울이 위대한 사도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본을 보여” 온 인물이다. 누가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바로 이 바울의 본을 따라 예수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본은 곧 재정적으로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수고해서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33,34절 말씀은 이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인해서 장만하였습니다.”(참조: 고후 11:9, 살전 2:9, 살후 3:8, 고전 4:12, 9:15). 누가가 고별연설에서 이런 대목을 거론한 이유는 아마 누가 시대에 이런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웠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고별연설이 끝난 후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들은 많이 울었으며, 구약성서의 형식에 따라서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8절)는 표현은 25절의 반복이다.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표현은 이 사실이 반박될 수 없다는 게 확실할 때만 강조해서 반복된다고 한다. 즉 이 구절은 바울이 죽었다는 걸 암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초기 기독교 역사는 진행되고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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