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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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삶이 힘겨워질수록 예수를 더욱 붙들게 된다. 예수를 믿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실현하는 일에 예수처럼 지극정성으로 참여하는 일임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꿈은 불(태양), 흙, 물, 공기를 원(圓)으로 둘러싸고 있는 생명의 영원한 순환을 상징하는 켈틱 십자가가 보여주듯이, 거룩한 신비 가운데 줄기차게 진행되는 생명의 역사 속에서, 특히 예수가 온몸으로 살아낸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지배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 속에 드러난다. 예수운동은 우리가 운명이나 지배체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며, 또한 이기적 욕망과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나, 그 우주적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웅장한 영혼과 풍성한 생명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다. 즉 지배체제와 자기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생명의 주체가 되도록 우리의 거룩한 원(願)을 크게 품는 일이다. 태평양을 가로질러 건너는 바다거북, 대륙을 오가는 철새들, 남극지방에서 겨울 내내 태양도 뜨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슴에 알을 품고 그 굶주림과 혹한을 견디는 수컷 펭귄들만이 아니라 온갖 벌레들이며 풀 나무들까지 모든 생명체들은 이처럼 생명의 장엄한 행진에 발맞추어 정성껏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꽃피우기 때문이다. 물론 시지푸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웅혼한 꿈과 인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기후붕괴와 대멸종으로 인해 지질학적으로 지난 6천5백만 년 동안 생명을 가장 풍성하게 꽃피워왔던 신생대를 끝장내고 있으며,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꿈 자체를 파괴하는 시대다. 기후 과학자들은 지금 추세로는 70년 후에 지구평균기온이 섭씨 4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여 대멸종과 문명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파멸의 벼랑 끝을 향해 질주하고 있으며, 역사상 자손에 대한 보호본능과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되었을 만큼 집단최면에 걸려 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들은 절박한 당면 과제를 분별하고,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위한 마지막 투쟁에 지혜와 힘을 모으고 있다. 특히 종교인들은 이 우주의 신비한 진화과정 안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창조를 계속하는 사랑과 생명의 영을 우리의 몸 안에 모시는 일, 그리고 그 창조적인 영이 이끄시는 풍성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분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따르는 일은 우리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온갖 고통과 절망, 억압과 착취, 폭력과 전쟁의 비극적인 상극(相剋)의 세상에서, 우리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한 모태(母胎)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로서, 모두가 더불어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서로 한 마음으로 보듬는 상생(相生)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보다 약한 생명체들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며 또한 가능한 한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지배체제에 맞서 힘껏 저항하는 것이 가장 인간답고 아름다운 삶의 원리라고 믿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이 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적 삶의 원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해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가 먼저 그 우주적인 존엄의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간 것을 본받아, 우리도 다시 감히 용기를 내어 그 거룩한 길에 참여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사회적 진보를 거부하는 영원한 수구적 정신의 온상”(김상봉)으로 작용하는 근본 이유는 성서의 전근대적인 신화적 세계관 때문에 당면 과제조차 하나님 손에 떠넘기고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지 못하는 경향 때문만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할수록,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특수계시의 절대성과 유일회성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권위주의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외부 집단”에 대해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주의 신학자 로날드 사이더 교수(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2005)가 여러 통계자료를 통해 보여주듯, “성령세례를 받고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아내 구타, 이혼율, 인종혐오에서 미국의 평균치보다 훨씬 높을 만큼 폭력적이며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기독교가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종교가 되었을 정도로 잔혹하고 폭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여성혐오와 억압, 십자군 전쟁과 종교 전쟁, 종교 재판, 마녀 사냥, 유대인 혐오와 학살, 노예무역, 제3세계 식민지 정복이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가 아무리 “내부 집단”의 결속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들”을 그처럼 대량학살하는 만행들을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자행할 수 있었는가?
물론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 예수의 복음은 황제의 복음과 타협하여 정통주의라는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 그 획일적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고 처형하는 한편, 기독교 세계라는 패권주의적인 지배체제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라는 명분으로 불의한 사회 구조를 합리화시켰으며, 선교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자신들의 정통주의와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를 내세의 천국 혹은 내면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리고, 선악 이원론으로 세상을 단순하게 재단한 자신들의 교리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지배체제의 이런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의해 세뇌되고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교리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악마의 도구가 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모든 만행들은 결국 제국에 의해 학살당한 비폭력적인 예수를 패권주의 체제가 폭력적인 승리주의적 그리스도로 둔갑시킴으로써 초래한 비극들이었다.
교회사에서 획일적인 교리 절대주의에 기초한 제국주의적 승리주의가 초래한 이 모든 비극적 아이러니를 무수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 문자주의와 교리주의에 근거한 근본주의 신학이 파시즘적인 승리주의와 패권주의를 조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 교리들, 특히 예수의 재림을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을 학수고대하는 근본주의자일수록 폭력적이며, 타종교인들을 멸시하고, 특히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지지하며, 생태계 파괴 사태를 “예수 재림”의 징조로 환영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왜 성경을 열심히 읽을수록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생명과 정의와 평화운동에 헌신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며 폭력적이며 몰상식한 사람이 되기 쉬운가? 크로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