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11일
그는 살아나셨다(25)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6)
부활은 생명의 질적인 변화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에 관해서도 많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경험했던 생명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걸까요?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에 어떤 연속성이 있을까요, 전혀 없을까요? 더 구체적으로, 부활의 세계에서도 역시 가족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인격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도대체 질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어디서 어디까지의 변화를 말하는 걸까요?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한다면 지금의 ‘나’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저는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모두 궁극적인 차원이라서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걸 실증적으로 알기에는 우리의 인식과 신앙이 너무 어립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겠지요. 그래도 우리가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이 세상의 보편적 진리 안에서 말할 수 있는 데까지는 말해야합니다. 바로 여기에 신학의 역할이 있겠지요.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계속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겁니다. 만약 부활의 주님이 계속 세상에 남아 계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지금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신다면 교회에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올 겁니다. 부활의 주님이 왜 세상을 떠나시어 하늘로 올라가야만 했을까요? 꼭 그래야만 할 필연성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짤막한 대답을 드립니다.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