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15일
그는 살아나셨다(29)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6)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은 그것이 허공에 뜬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듯이 부활 사건도 역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는 귀신처럼 혼령으로 부활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단순히 그리움으로 환생하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부활하신 겁니다. 그게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말의 일차적 의미입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 그가 몸으로 시간과 공간의 역사 안에서 부활하셨으나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더 이상 우리와 동일한 방식의 생명 형식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를 아무리 찾아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그런 예수의 변화를 승천이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계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얻으셨다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나, 하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질문으로 그것을 대신하겠습니다. 예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이미 부활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왜 예수만 부활한 분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이건 왜 예수만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 메시아만이 구원자이며, 생명 근원자입니다. 부활은 바로 구원이고, 생명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예수만이 부활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꾸로 대답하는 게 더 타당하겠군요. 예수가 부활한 분이기에 생명의 근원인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실제적인 삶의 리얼리티로, 구체화시켜 진술하기 위해서는
부활이 지금-여기의 생명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그러고보니 성육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Incarnation엔 '구체화'라는 뜻도 있던데,
예수께서 단지 '화석화'한 기독교 교주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대사회에 구체화하려면
인문학적 지평에 머물면서 예수는 누구신지 치열하게 물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단어는 일상과 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의 현학적인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에,
'생존(生存)'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한다면, 좀 더 복음이 일상적인 생명 문제와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존재론적인, 그리고 실존론적인 철학으로의 번역 작업에도 적합하지 않을까요?
특히 요즘처럼 생명이라는 말이 거의 생명공학적인 범주에 장악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풍조에서,
예수의 치병/축귀/오병이어/사죄/죽은자의 살림 등의 모형론적인 표상들로 구체화했던 부활 생명이
너무 거시담론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해석될까 우려하여 드리는 의문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 참으로 어렵고 신비한 말인거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혹시 역사에 관한 글을 쓰신적이 있으시면 링크 걸어주시겠어요?)
아직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중에 부활에 관련한 글귀가 있네요.
“죽은 자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책은 부활에 관한 이미지나 아이디어를 형성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했다는 것은 또 한번의 죽음을 앞둔 자로서 이 세상에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 예수가 마침내 죽음(죽어감이 아닌 죽음)을 뒤로 하고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이 이유 때문에 예수가 이 세상에 현존함을 의미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의 의미는 오직 우리가 ‘하느님’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 시작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에벨링, 신앙의 본질 The Nature of Faith (Philadelphia: Muhlenberg Press, 1961), p.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