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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없어야 한다. 일상에서 분별심을 무조건 없앨 수는 없다.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기업도 있고 나쁜 기업도 있다. 좋은 설교도 있고 나쁜 설교도 있다. 가능한 개인과 사회는 가치가 높은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 가치 판단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사태 앞에서는 이 분별심이 무의미하다. 예컨대 한 달 후에 지름 5킬로미터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고 하자. 또는 빙하가 완전히 녹아서 해수면이 100미터 높아진다고 하자. 아니면 지구 중력이 갑자기 반으로 줄거나 배로 증가한다고 하자. 이로 인해서 인간 문명이 사라지거나 인간 자체가 멸종에 이르게 된다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학자나 촌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분별심은 어느 범주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서 그걸 넘어서는 범주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말은 분별심이 개입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사건을 전제한다. 그것은 종말 생명을 가리키는 부활이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난다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 변화는 질적인 것이라서 지금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는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바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부활은 존재 유비가 불가능한 사건이다. 기독교인은 그 존재 유비가 불가능한 종말론적 생명인 부활이 예수에게서 발생했으며, 부활의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고 믿는다. 예수 부활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확인할 수는 없다. 신학적으로 여러 견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죽었던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나의 생명’이라고 고백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그는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