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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살아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 질문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모두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동시에 우리 모두 곧 죽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도 일시적일 뿐이다.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말했다. 바울이 말하는 속사람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핵심이다. 속사람은 수명을 늘리거나 건강을 증진시킴으로써 확보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생명 경험이자 생명 능력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도 어떤 이들에게는 관념적으로만 들릴 수 있다. ‘살아있다.’는 말을 좀더 평이하게 설명해보자.
우리는 언제 살아있다는 경험을 하는가? 각자 다를 것이다. 살아있으려면 우선 숨을 쉬고, 무언가를 먹고 마셔야 한다. 몸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대사가 곧 살아있다는 사실의 기초다. 이것만 보장된다면 생존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지는 못한다.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의 크고 작은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법관이 되는 것이 그런 욕망의 실현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모두가 욕망을 원하는 것만큼 실현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욕망이 충돌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욕망을 실현할 수 없다. 욕망을 실현한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욕망으로 나아간다. 매 순간 자신의 욕망이 파괴될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면서 삶이 더 위축된다. 위축되는 걸 막아보려고 욕망을 더 자극시키는 악순환에 떨어진다. 이런 악순환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죄이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