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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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3월 16일) 한겨레신문에 공감이 가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제가 길게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칼럼의 마지막 부분, '오로지 연어떼처럼 죽음의 땅으로 역류하는 헌신의 행렬만이 인간 존엄의 빛을 희미하게 빛낼 뿐이다. 신은? 바로 그 결단에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긍휼에 매달리며, '인간의 연대'를 호소합니다.
[곽병찬 칼럼] 다시 신의 존재를 묻는 이유
2004년 서남아시아 지진해일 때 종교계는 다음과 같은 난제에 직면했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2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이유 없이’ 죽어간 사실을 신은 과연 용인했을까.” 지진해일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신실한 신앙인들이 밀집한 지역을 휩쓸었다. 불교의 타이와 스리랑카, 무슬림의 인도네시아, 힌두교의 인도. 유럽 기독교국가에서 온 여행객 수천명도 포함돼 있었다.
‘양심적인’ 종교인이라면 먼저 고백해야 할 물음이었다. 영국 성공회의 지도자 로언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일간 <텔레그래프>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명의 뜻하지 않은 죽음도 믿음을 뒤흔드는데, 대재앙에 직면해 ‘이런 엄청난 고통을 허용한 신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캔터베리의 제임스 주교도 그랬다.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있는 지역에, 그것도 성탄절 직후에 미증유의 대재앙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신의 존재에 대한 답하기 어려운 신학적 의문을 남겼다.” <아에프페> 통신은 이런 성찰적 논의를 이렇게 정리했다. “유럽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신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유대교 및 기타 종교 지도자들은 ‘지진이 신의 분노였다’는 말을 거부했다.”
예외가 없을 리 없다. 근본주의 개신교계다. 미국 남침례신학교의 앨버트 몰러 총장은 <시엔엔>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재앙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개신교계는 압권이었다. “쓰나미 희생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은 자들이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태국 푸켓에서 놀러 갔던 유럽인들이 많이 죽었는데, 예수 제대로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김홍도 목사)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예수의 불호령이 떨어질 법하다. 하지만 이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신이 있다면, 신은 이웃의 고통을 제 장삿속에 이용하려는 그런 자들부터 징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본 도호쿠 대재앙 앞에서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운운했던 조용기 순복음교회 원로목사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신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은 단지 신의 존재를 따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삶의 의미, 나아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따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철학이건 신학이건 서구에서 신이란 인간 존재의 의미의 원천이다. 인종학살 등 잔인한 살상이 되풀이될 때마다 철학과 신학이 절규하듯이 신의 존재를 물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왜 던져놓고, 짓밟는가! 인간이란 무슨 의미인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면, 신의 선택에 대한 물음은 나의 실존적 결단에 대해 스스로 던지는 물음일 터이다. 그 의미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종교의 본질은 이해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꿀 방법을 찾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 있다”고 윌리엄스 대주교는 말했다. 결국 헌신을 위한 삶의 결단에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1755년 11월, 포르투갈 리스본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희생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력에 대한 충격을 이렇게 토로했다. “리스본은 폐허로 널브러져 있고, 우리는 파리에서 춤을 추고 있다!”
일본 도호쿠 대재앙은 인간이 이룬 문명을 일거에 휩쓸었다. 해일은 노아의 방주 같았던 8m 둑을 삽시간에 무너뜨렸고, 원자로에서 새나오는 하얀 연기 앞에서 세계인은 숨죽인다. 이보다 더 무력하고 허망할 수 있을까. 오로지 연어떼처럼 죽음의 땅으로 역류하는 헌신의 행렬만이 인간 존엄의 빛을 희미하게 빛낼 뿐이다. 신은? 바로 그 결단에 있지 않을까.
지진요?
금세기 최대의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지진이 안 일어납니까?
우리 솔직하게 각자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저런 재앙이 닥친다면, (만약에 겨우 내 목숨만 살아남았을 경우) 그래도
우리가 슬픔과 고통을 뒤로한 채 모진 여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간직할
수 있을런지 말입니다.
그런 끔찍한 단말마적 상황이 오면 아마도 우리의 여생에 악몽으로 인해서 아무런
낙도 찾을 수가 없을 겁니다. 오히려 남 죽을 때 함께 가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저주처럼
생각될지 모를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각자 내 신앙을 점검할 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기진게 신앙인지가 고개가 갸우뚱해질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신앙양심적으로 솔직해져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솔직히 저 자신의 미완의 고민이기도 한 것을 모두에게 털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객관성이 필요치 않는 완전 주관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남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세상에서처럼 더이상 아무런 객관성도 요구되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정혜신 선생의 방에서 퍼 왔습니다.http://blog.naver.com/mindprism/80126390568)
부음을 듣는 순간
‘내가 한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는
문인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무수히 많은 주삿바늘처럼
심장을 찌르는 며칠입니다.
이웃 나라의 끝 간데없는 부음과 절망을 목도하며
함께 지진 지역인 것처럼 내내 한쪽으로 기우뚱, 하는 느낌입니다.
고은 시인의 선혈(鮮血) 빛 애도처럼
‘몇 천일지 몇 만일지 모를 일상의 착한 목숨들’은
이제 살아오지 못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과 절망과 공포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슬픔과 절망을 이죽거림의 소재로 삼는 일,
돌 맞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슬픔을 애도에 앞서 교훈의
소재로 환치하는 일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연재해 대비책이나 인간의 겸손함에 대한 교양적 계몽들은
애도와 위안과 배려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해도
되는 일들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피 철철 흘리는 부상자를 옆에 두고
응급구난 시스템이나 조급한 인간의 심성을 반성하는 토론은
적절하지 않으니까요.
내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슬픔을 깊이 애도하지 않고..
제대로 된 교훈을 얻는 경우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깊은 슬픔의 상태에 있는 이들에겐 진심 어린 애도와 위안,
현명한 배려와 격려가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지인은 대지진 후
피 토하듯 써내려 간 편지의 말미에 제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일본 직원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일본 국민과 일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부탁합니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손 모아, 간절히.
일본, 그대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원합니다.
-정혜신-
* 어쩌면 이리 내 마음과 같은지요..
제 마음을 대신하여 올려 드립니다.
때로는 두꺼운 책보다 한장의 사진이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해주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