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17일
무덤에 묻히심(5)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15:47)
다시 여성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장된 무덤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던 자리에서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더니, 이번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이번에는 두 명의 이름으로 나오는군요.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살로메가 보이지 않는군요. 바로 뒤에 예수님의 시체가 안장된 무덤을 찾아가는 여성 제자 명단에 살로메가 다시 등장하는 걸(막 16:1) 보면 비록 이번 명단에 들어있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는 있었다고 보는 게 좋겠지요.
이 여성 제자들이 무덤을 본 이유는 예수님의 장례를 바르게 치러드리려는 생각에서였겠지요. 어제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씻지도 않고 기름을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여성 제자들이 눈여겨 본 것입니다. 밖으로 확 드러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분들입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에서 모든 걸 살핍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넘쳐나는지 살핍니다.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살핍니다. 이런 사람들의 영혼은 온전히 신령한 것에 집중됩니다. 그런 영성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뒤에서 살피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거꾸로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만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전체의 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남 앞에 나서지 않는 구석진 자리로 자기를 낮출 줄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인정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에게 매달려 있는 거겠지요.
누가 영적으로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은 남이 하지 않으나 필요한 것을 살피면서 그 일을 감당합니다.
많은 설교가들이 신앙인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훈화적인 느낌의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자들이 해야 일들을 시시콜콜 지적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발성은 시간이 왠만큼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그럼 다시 교회들은 사람을 훈련시키고 세워야 된다고 야단법석 가운데 이것저것을합니다. 그러나 또 시간이 지나면 재촉가운데 움직이는 열심(?)과 열정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쯤이면 하나님의 깊은 영성으로 들어가 우리의 신앙의 자발성이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