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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아르케)라는 단어가 1절에 이어 2절에도 나온다. 똑같은 문장이다. 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고대인은 태초를 왜 생각했을까? 현대 물리학은 우주가 125억년 정도 된다고 주장한다. 태초는 125억 년 전의 어느 순간을 말하는가? 그 이전은 또한 무엇인가? 그 이전은 없다. 시간은 창조 이후에 시작된 것이기에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걸 우리가 어찌 안단 말인가.
우주의 태초는 너무 거시적인 차원이니 접어두고, 각자의 태초를 보라. 우리의 아르케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바로 그 순간이다. 60년 전, 50년 전, 20년 전에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난자와 정자는 더 먼 미래에 기원이 있다. 어디까지 갈는지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아는 별로 없다. 알아봤자 모르는 것과 큰 차이도 없다.
예수가 로고스로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미래가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대답을 찾는 게 신학공부가 아니겠는가. 그 대답도 실증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성서기자들은 일단 그 사실을 경험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게 해명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인식과 언어능력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보듯이 그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 어둠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요즘 그야말로 '로고스의 향연' 이네요.
'말씀의 잔치'라는 의미에서 향연이고요.
또 하나는 기존의 로고스=언어 의미를 뛰어넘어,
로고스에게 잃어버렸던 날개를 찾아 주신 것 같아서요.^^
만일 로고스가 말 할 줄 안다면 "고맙습니다." 했을 것 같아요.^^
제게도 언제부터인가 요한복음, 특히 1장을 읽다보면
첫 문장부터 이 로고스가 목에 턱턱 걸렸습니다.
헬라철학에서는 로고스가 단순히 언어의 뜻만은 아니었는데,
왜 성경에서는 모두 말씀, 말로만 번역 되었을까,
차라리 로고스를(번역하지 않고) 본래 뜻대로 보전하는 것은 어땠을까,
(사실, 저는 간혹 그렇게 시도해 보기도 합니다.)
이제는 로고스에 대해서 훨씬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성, 은총
그리고 그 분만의 고유한 비밀한 통치방식,
생명의 비밀, 구원의 비밀까지도
이 로고스가 넓고 깊게 품어주고 있다는 생각에서지요.
아울러 요한복음기자가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용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도 더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로고스 없이는 만물이 지어진 것이 없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담대하게 증언했나 봅니다.
로고스, 그 만물이 있기 이전에 이미 계셨던 이 로고스가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vere-Homo가 되셨다는 거지요?
아득해집니다. 너무 몰라 아득하고,
쬐끔 알듯하니 아득하고..
어서 여명이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