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찬송
예배의 부름 뒤에 회중들은 일어나서 찬송을 부르고, 일어선 상태에서 공동기도와 사죄기도, 평화의 인사까지 진행된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찬송을 부른다. 우리는 이때 국악찬송가를 부른다. 국악찬송은 향린교회에서 발행한 <국악 찬송가>에서 선곡한다.
주일공동예배 시간에 국악 찬송가를 부르는 것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를 것이다. 국악찬송가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국악찬송가를 부른다고 해서 전통적인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국악 찬송가를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예배의 한 대목만이라도 한민족의 정서를 담아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토착화와 연관된다. 신앙과 예배의 본질은 그대로 고수하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해당 민족의 문화에 맞도록 바꾸자는 주장이 토착화 논의이다. 이런 논의는 주로 제 3세계 신학계에서 표출되었다. 어떤 화가는 흑인 예수나 한복을 입은 예수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고, 어떤 분은 예수 일대기를 창으로 불렀다. 목사 가운도 한복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제 1세계 신학계에서는 폴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이 이를 대변한다고 보면 된다. 그는 기독교 복음을 본질과 문화로 구분했다. 본질은 몸이고, 형태는 옷과 같다. 몸은 변할 수 없지만 옷은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
그런데 국악찬송이 모두 허용될 수는 없다. 가사와 가락이 신앙적인 품격을 갖춘 찬송가로 제한되어야 한다. 우리의 민요가락에 가사만 기독교적인 것으로 채워도 곤란하다. 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은 신학자나 목사가 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면서 음악의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의 몫이다. 한국교회가 범교파적으로 가칭 <국악찬송가 연구 및 보급 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구성하는 게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