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2일
부의 문제
지난 설교 중간 부분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구원 받기가 더 힘들다는 사실을 제가 알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부자가 되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간혹 어떤 목사들은 ‘우리 교회에 매월 십일조 천만 원 드리는 사업가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또는 축복합니다.’고 설교 시간에 말하는데, 그들 교회 신자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몰라도 한참 모르는 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돈이 많으면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 않느냐,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게 돈으로 하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교회당 짓고, 선교사 돕고, 구제 사업을 하는 건 다 필요한 일이지만 그게 하나님의 일 자체는 아니다. 그런 일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부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부터 문제가 된 것이다. 가나안의 신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다. 오늘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동일하다. 그런 것이 생존경쟁의 구조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만든 것에,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불문하고, 매달리면 결국 영혼이 손상당하게 된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바알숭배와 치열하게 투쟁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는 목사와 교회가 자본이 신처럼 작동되는 이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불문가지다.
기독교인이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부 자체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들이다. 도구들이 너무 많으면 삶에 집중할 수 없고 사람이 오히려 그 도구에 치이게 된다. 옷이 너무 많으면 매번 옷을 입을 때마다 선택하느라 힘들어지는 거와 같다.
부자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고 보면 된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부자 기독교인들은 그 짐에 눌릴 것이다. 돈이 신처럼 숭배 받는 세상에 길들여지면 그게 짐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짧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부를 처리하는 데 소비되는 것만큼 불행한 삶도 없다. 영혼의 자유를 손상당하지 않을 정도의 부에 만족하고 사는 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