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8일
애매성
하이데거의 관심은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의 드러남에 연루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존재의 드러남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계시다. 그의 철학은 유신론적 신학을 거부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신학적이다. 앞에서 말한 빈말과 호기심이 현존재가 존재의 드러남에 연루되는 일을 방해한다.
세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애매성이다. 빈말과 호기심에 기울어진 채 살아가면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애매한 데 머문다는 뜻이다. 예컨대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거나, 연봉이 높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들이 다 애매한 거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평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의 본질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연봉 1억 원을 받는 사람과 3천만 원 받는 사람들이 각각 연봉에 비례해서 행복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말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정확한 게 아니라 애매한 것이다. 그런 것에 지배당하면 결국 현존재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박찬국 교수의 설명을 몇 대목 인용하겠다.
현존재는 빈말과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삶을 살면서도 그러한 삶을 생생하고 진정한 삶으로 착각한다. 그런 삶에서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이해되고 파악되며 언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애매성은 사람들 간의 공동존재 자체도 철저하게 지배한다. 다른 사람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관해 말하는 것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개시된다. 세상 사람이라는 존재양식을 가진 공동존재는 서로 떨어져서 무관심하게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하게 긴장하면서 서로를 살피고 남몰래 서로 엿듣는다. 사람들은 호의라는 가면을 쓰고 반목을 연출한다(236,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