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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4일
바알
예레미야는 유대 선지자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다.’고 비판한다(렘 2:8). 선지자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는 게 아니고, 그 말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에서 나는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이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말했다. 오늘도 바알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회중들이 그런 설교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런 설교를 하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바알을 선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즉 기독교 신앙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회중들이 뭐가 뭔지를 눈치 채지 못한다. 둘째, 회중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산다.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 뭔가를 소유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런 이들에게 기복주의 설교는 귀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무익한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비판이 모든 이들에게 동의가 되는 건 아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있어야만 그 사태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의 시대는 영적인 감수성을 냉소적으로 보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비판이 오히려 공허하게 들린다.
어제의 묵상에서 혼합주의를 분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기쁨이라고 말했다. 물론 기쁨만이 유일한 기준은 아니지만 중요한 기준임에는 틀림없다. 무익한 것도 기쁨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기복주의라는 바알 신앙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만 유지되는 기쁨이라면 그것은 무익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