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0일
버림받음
막 9:50절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라고 했고, 마 5:13절은 여기에 덧붙여 ‘ ...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다. 두 본문의 배경은 약간 다르다. 마가복음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 임할 지옥 이야기이고, 마태복음은 그 유명한 팔복 이야기다. 배경은 다르지만 중심 메시지는 같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하며, 그걸 잃게 되면 신앙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지난 설교에서 맛을 잃는다는 것과 버림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오늘은 버림받음을 보충해서 설명하겠다. 이런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잘 안다고 여기겠지만 모를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다. 버림받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대다수 신자들이 이런 정도까지만 생각한다. 도대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할 말이 별로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거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환원되고 만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이렇듯 환원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 있다. 궁극적인 문제에서는 이런 환원주의적 해명을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기는 하지만 가능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버림받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생명이기 때문에 버림받음은 이런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이다. 궁극적인 생명은 부활이다. 부활로부터의 단절이 버림받음이다. 부활은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은폐의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설교에서 말한 기쁨이다. 버림받음은 기쁨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기쁨에 밀착된 삶을 살아간다. 그 기쁨은 존재론적이다.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어떻게 그런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가? 또는 어떻게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는가? 대답은 모두 알 것이다. 다만 그런 대답을 실제로 경험했냐는 다른 차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