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5일
섬뜩한 기분으로서의 불안(1)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몇 번 했다. 오늘과 내일, 두 번에 걸쳐서 색다른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하이데거의 인간 이해에서 불안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세계-내-존재인 인간은 불안을 숙명적으로 갖고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세계 안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불안이 어떤 때는 ‘섬뜩한 기분’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박찬국 교수의 설명을 직접 인용하겠다.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섬뜩하다(unheimlich)고 느끼면서 일상적으로도 ‘섬뜩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섬뜩함에서 우선 개시되는 것은, 현존재가 불안 속에 있을 때의 특유의 무규정성, 즉 불안해하는 대상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섬뜩함이란 동시에 마음이 편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섬뜩하다’라고 번역한 독일어 unheimlich에서 Heim은 ‘집’ 내지 ‘가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unheimlich라는 말은 집을 떠나서 낯선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불안이라는 기분에서 친숙한 세계로서의 일상세계가 무너지고 세계 전체가 낯설게 자신을 드러내게 되면서 현존재가 이를 무시무시하게(ungeheuer) 느낀다는 것이다(251쪽).
하이데거가 말하는 섬뜩함의 경험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거룩한 두려움)와 비슷하다. 칼 바르트의 용어로 바꾸면 ‘절대타자’ 경험이다. 익숙했던 세상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면서 심리적인, 정서적인, 인식론적인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이게 무슨 경험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서도 시간이 좀더 필요한 것이다.
ㅎㅎ
지금 은빛 님은 철학의 근본 주제를 직면했네요.
'왜 존재자는 존재하고, 무는 없다는 말인가?'
색과 공이 일체이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며,
창조와 종말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사건이고,
한 알의 밀알에 우주가 담겨 있으며,
우리 몸은 흙으로 돌아가야하고,
하나님 나라는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게 아니며,
하나님은 역사 전체로서 자기를 계시한다(판넨베르크)는 주장들이
다 있음과 없음의 신비에 맞물려 있어요.
그런 순간을 얼핏이라도 느꼈다면
미쳐가는 게 아니라 제정신이 드는 중입니다.
이런 생각없이 이 세상의 것들에 매달려 사는 게
사실은 미친 거에 가까운 거지요.
근데 이런 생각을 더 깊이 하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치기는 할 겁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거라서요.
그렇게 미쳐서 죽은 사람도 많으니
부디 조심하세요. ㅎㅎ
목사님께서 지옥에 대해서도 글을 써 주셨는데, 정말 아무도 속시원히 대답해줄 수 없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 큽니다.
위의 댓글에 쓰신 것처럼 창조와 종말이 하나인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처럼 지금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겠죠.
언제나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써주시는 목사님의 글들이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러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구분이 안 되겠구나,
나라는 개체가 완전히 분해되어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겠구나,
그렇다면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이며
왜 없지 않고 있는지 왜 있지 않고 없는지.
혹시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싶어서 무섭더군요.
무시무시하다는 저 표현과 섬뜩하다는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