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4일
기원후 70년
4월3일 설교 앞 대목에서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한 사건이 초기 기독교의 운명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짚었다. 그것은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사건이다. 만약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어느 한 사건만으로 역사가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함락이 유대교의 성격을 바꾸었고, 그 바뀐 유대교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지만 기독교의 운명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지정학적 상황, 헬라 사상과 로마 정치, 바울의 등장 등등, 여러 가지 사안들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결정되었다.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당시 기독교 인물들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래도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은 초기 기독교의 운명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원전 587년에 발생한 바벨론 포로 사건이 구약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거와 같다.
기원후 70년의 그 사건은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는 더 오랫동안 원만하게 지속되었을 것이다. 유대교가 신생 종파인 나사렛파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박해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기독교가 그대로 경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에 훨씬 많이 의존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역사가 2천년이나 흘러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더 이상 가까워지기 힘들게 되었다. 마치 공동 조상을 둔 인간과 침팬지가 오랜 진화를 거친 다음에는 더 이상 가까워지기 힘들게 된 모습과 비슷하다. 역사는 신비다.
거칠게 말해서 사도행전은 문전 님이 말한대로
베드로 이야기를 임의대로 배치한 겁니다.
사도행전은 기원후 80년 이후에 기록된 문서거든요.
80년 이후의 상황에 근거해서
초기 이야기를 묘사하다보니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순간에 '어, 그러면 성경은 픽션인가?' 하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역사학은 과거의 현재의 대화라는 말처럼
(E.H. 카라는 사람이 말했나요?)
교회의 모든 문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따라서 성서도 당연히 '역사비평'을 거쳐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거지요.
한국교회는 역사비평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매도하면서
거의 축자적, 기계적 문자주의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역사의 능력과 신비가 죽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당연히 바울과 동행했던 그 주치의가 아니라
훨씬 후대 어떤 인물입니다.
그는 바울과 동행했던 그 주치의가 남긴 문헌도 참고하면서
이미 유대기독교와 이방기독교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바울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겁니다.
비록 그의 이야기에 객관적 사실성이 떨어진다 해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설명이 세계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고 '듣보잡'으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ㅎㅎ
설교 도입부에서 산헤드린의 심문을 받는 베드로를 언급하시면서
이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이가 원만하다가 기원후 70년을 전후로
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셔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입부의 서술만 보면 베드로가 심문을 받은 사건이 70년 이후에 일어난 거라는 느낌이 드는데
베드로가 그렇게나 오래 살았나하는 궁금증이 생겼고요.
그게 아니라면 70년 이전에 심문을 받았을 텐데 말씀하신대로 70년 이전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원만했는데 심문 받을 이유가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사도행전 기자가 임의대로 베드로라는 인물과 상황을 배치시킨 건지요?
그러고 보니 사도행전은 바울의 주치의인 누가가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다비아에서는 바울을 추종하는 한, 두 세대 후의 인물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어느 것이 더 정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