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
죄 사함
지난 설교 ‘부활의 증인이란?’에서 핵심은 부활 신앙이 죄 사함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산헤드린 법정에서 베드로가 말한 답변에 나온 이야기다. 하나님이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려고 예수를 높이셨다고 했다. 높이셨다는 것은 승천을 가리키는데, 승천은 부활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죄 사함이라는 말을 오해하거나 협의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받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소위 구원파는 이것을 강조한다.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한다. 용서받은 일시까지 기억하라고 다그친다. 이런 태도는 죄 사함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죄 사함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죄, 용서라는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죄는 그만두고, 용서라는 단어만 보자. 용서는 인간이 용서받을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무조건 받아준 것이지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다시 가출하고 부도덕하게 살면 용서 없다, 하는 식으로 타이르지도 않았다. 둘째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죄 사함은 인간이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게 쉽지 않다. 우리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성취에 대한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목사들도 목회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죄 사함의 사건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을까?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셨으니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죄 사함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삶에서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기서 핵심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그걸 알면 죄 사함을 받은 것이고, 그게 불안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회개를 전제로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용서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국가 간에도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닐는지요?
위안부 문제만 봐도 그렇지요.
일본이 참된 사죄없이 한국정부가 너무 쉽게 받아주니
결국 이런 사단이 나지 않았나요?
목사님의 말씀대로라면
이것도 혹시 한국정부가 자기를 위해서
일본을 용서했다고 주장한다면
아마 돌맞지 않을까요?
국가와 국가 간에 문제도 이러한대
하물며 잘못한 개인이 참된 참회없이 용서해 버린다면
그것을 과연 진정한 화해라 할 수 있을까 싶네요.
화해가 관계의 문제라면
글쎄요? 아무리 자기자신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참된 화해가 이루어질까요?
용서가 단순히 어떤 허물을 덮어주고 넘어가는 문제라면 가능하겠지만
관계의 차원에서 본다면
참회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용서가
참된 관계회복을 불러올 수 있을지
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완전한 대자유가 예수안에 복음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로 내가 쉴 수 있고, 어지러운 꿈을 꾸지 않고 깊고 편안한 잠을 자게 만들어주는 말씀이네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않은자를 의롭하신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
고딩때 교회에서 졸다가 우연히 듣고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다 나이가 좀 먹어가면서 깨달아지는 말씀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