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3일
종말의 선취
‘종말과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 우리에게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몇 달 전 어느 설교에서 나온 이 문장은 생명이 완성될 종말이 미래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비밀한 방식으로 선취(先取)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은 역사적이다. 어제가 있어야 오늘이 있고, 오늘은 또 내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교회도 역사적이다. 2천년의 역사가 이어진다. 역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통 역사가 앞으로 진보한다고 말은 하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결혼만 해도 그렇다.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는 그 과정은 비밀이다.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했는지의 필연성은 별로 없다. 지나놓고 보면 필연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다 우연이다. 인간이 지구에 출현하게 된 것도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우연적인 요인들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종말의 선취라는 개념은 역사를 과거의 원인에 의한 결과의 기계적인 연속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래가 현재에 개입될 수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역사를 종말까지 다 통치하는 하나님의 섭리나 예정으로 보는 관점이다. 교회에서는 이런 말이 상투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철학과 관련된 개념이다.
헬라철학이나 불교철학에서는 역사를 순환으로 보는 반면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직선으로 본다. 전자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게 시간이고 역사지만, 후자에게는 시작이 분명히 있고 종말도 있다. 시작은 창조이고 종말은 창조의 완성이다. 여기서 태초의 창조와 종말의 완성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말은 이미 현재에 비밀한 방식으로 선취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을 종말생명의 선취로 본다. 따라서 부활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요한이 말했다(요 11:25,26). 일단 설명은 이렇게 하지만 그걸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