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구원(45)

조회 수 927 추천 수 0 2018.03.03 20:51:41

(45)

이런 몸의 감각을 통해서 나는 세상을 공간으로 경험한다. 내 책상 위에 여러 물건들이 각각 제 자리에 놓여 있다.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다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무의미한 것은 없다. 립크림도 그렇고, 며칠 전에 받은 자동차보험증권도 그렇고, 고무 밴드나 중국산 카터기도 그렇다. 그 중의 하나가 보통 것보다 큰 책받침대다. 거기에 몇 가지 읽을거리가 늘 놓여 있다. 그것들은 내가 가까이 가야 읽을 수 있고, 손을 뻗어야 잡을 수 있다. 그게 공간이다. 손으로 성경을 거기에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내가 공간을 느끼지 못하면 그런 행위는 불가능하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안경이 있다. 서로 렌즈 도수에 차이가 난다. 책만 읽을 때는 약간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컴퓨터 화면을 볼 때는 낮은 안경을 쓴다. 안경을 바꿔 쓸 때마다 나는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손으로 집어서 사용한다. 이것도 공간에 대한 느낌이 정확해야만 가능한 행위다.

나는 손으로 책이나 안경이나 연필을 잡을 때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 아침에 식당에서 빵과 과일로 배를 채우고 따끈한 커피 잔을 들고 다시 2층 서재로 올라오는 순간에도 찌릿한 경험을 한다. 자칫하면 커피 잔에서 커피가 흘러낼 수 있지만, 그럴 실수는 자주 저지르지 않는다. 내 온 몸이 절묘한 균형감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손에 커피 잔을 들고 식당에서 복도식으로 된 좁은 통로를 거치면 피아노가 놓인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공간의 우리 집이 중심이다. 거기서 오른편으로 가면 방 두 개와 막다른 곳에 화장실이 나오고, 왼편으로 가면 식당이 나오고, 뒤로 돌아서면 현관이다. 거기서 정면을 바라보면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와 50센티 폭에 5미터 높이에 이르는 창문 뒤로 대나무 숲이 보인다. 커피 잔을 들고 그 모든 것들을 공간적으로 만끽하면서 18계단으로 된 층계를 노련하게 오른다. 그 순간에 많은 느낌과 상념이 나를 사로잡는다. 하나님이 창조함으로써 시작된 공간과 시간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손으로 물건을 잡는 순간의 느낌이 황홀하다. 묵직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무게를 느낀다는 것은 중력의 작용이다.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지구의 중력을 경험할 수 있으니, 어찌 황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커피 잔만 해도 그렇다. 커피 색깔과 잔의 색깔이 대비된다. 액체가 담긴 잔을 들 때는 넘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일정한 속도와 각도로 손을 뻗어 잔을 잡으면 잔의 질감이 손으로 전달된다. 그걸 들어서 일정한 속도와 각도로 입에 대야 한다. 이게 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만약 어떤 로봇 공학자가 로봇을 만들어 커피 마시게 하는 실험을 했다고 하자. 그 로봇은 나처럼 자유롭고 세련되게 커피를 마시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로봇이 인공지능을 탑재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 묶이지 실제 인간처럼 공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상공간과 실제의 공간은 완전히 개념이 다르지 않은가. 지금 여기서 내가 지구라는 공간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몸으로서의 구원에 가까이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때가 되면 이 몸마저 해체되어 공간 너머로 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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