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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결론인 22절은 이 사람이 재물이 많아서 낙심하고 예수 곁을 떠났다고 한다. 처음 예수를 찾아올 때는 뭔가 기대를 했겠지만 이제는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제자가 되지 못했으니 예수를 통한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이며, 그가 처음에 원했던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이다. 예수 제자가 되는 일은 이처럼 위태롭다. 어정쩡한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대개는 사이비 제자로 잠시 머물다가 기회가 생기면 떠난다.
부자로 살았던 사람에게 재물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가혹하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없는 건 아니지만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많거나 적거나 돈이 인간 영혼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줄기차게 말했고, 예수도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돈이 인간 영혼을 훼손시킨다고 해서 돈이 필요 없는 건 물론 아니다. 궁핍이 오히려 영혼 훼손의 원인이기도 하다. 돈이 있어야 신앙서적도 구입해서 읽고, 헌금도 마음먹은 대로 하고, 구제 활동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출가 수도사나 아주 뛰어난 영성가의 경우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돈에 묶이지 않을 수 없다. 가난과 무소유 자체를 미화할 수는 없다.
기독교인이 최소한 영적인 삶에 지장을 받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지는 객관적인 수치로 계산해낼 수는 없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말하면 돈이 너무 많으면 짐이 되고, 너무 없으면 생존이 위태로우니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는가.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분배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너무 가난한 사람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밥벌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여기서 목사들의 사생활과 목회에도 비슷한 원리가 작동된다.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때는
어떻게 물질없이 살아라는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은 이말씀이 물질에 얽매이지
말라는것으로 들리네요.
이것은 마치 넓은 평수의 집에서 돈벌 궁리하는
사람 보다 작은집이라도 존재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의 영혼이 평안함을 말하는것이네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