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 비판적 읽기 - 13

제 2 장 : 오스틴의 믿음, Case study

6. 믿음과 감기의 순진한 인과관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세아 4: 6-7)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중에 <We were soldiers> 가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을 그려낸 영화이다. 영화 초반부에 M16 소총이 처음으로 실전에 보급되는 장면도 등장하니, 제법 옛날 생각이 드는 영화다.
주인공과 특무상사가 M 16 소총에 관하여 “성능이 우수하다”, “껍데기가 플라스틱입니다. 공기총 느낌이었어요. 차라리 권총을 쓰겠어요”, “육탄전 때도 M16이 유리할까?” 등등의 대화를 나누는데,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 보면, 아, 정말 옛날이야기구나, 하고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렇게 미군들이 베트남에 진출(?)할 훈련을 하고 있을 즈음에, 군인들이 살고 있는 관사에서 벌어진 한편의 에피소드, 군인들의 부인들이 모여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토의를 하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관사에 설치된 세탁기가 전투복에 묻어있는 모래 때문에 고장이 났다고 고쳐주기를 건의한다. 사회를 맡은 부인이 장군에게 말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한 부인이 말한다.

순진한 백인, 그리고 무지한 백성.

“동네에 있는 세탁소는 괜찮아요. 거기에서 색깔이 있는 빨래는 못하게 해요.”
다른 부인들이 어리둥절해 하니까 그 부인이 덧붙여 말한다. .
”’White only’라고 큰 글씨로 입구에 써있어요.”
그러자 그 방의 분위기는 일순 싸늘하게 얼어붙어버린다. 그 방에는 흑인 부인이 한 명 있기 때문이다.
그 부인은 흑인이 있는 자리에서 인종문제를 꺼낸 것이다. 물론 본인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White only’라는 말의 의미를 다른 부인들은 다 알고 있다. 백인만 출입, 흑인은 출입금지라는 말이다. 발언한 그 부인은 그 말의 뜻을 모르는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있다. 다른 부인들은 다들 그 주제를 외면하려고 침묵에 잠겨있는데 그 흑인 부인이 입을 연다.
“그 말은 아마도 백인 전용이라는 말이겠지요.”
그 말을 들은 맨처음 말을 꺼낸 부인이 다시 말한다.
“그것은 말도 안돼요, 나라를 지키려고 군복을 세탁하는건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한다구요?”
그러자 흑인부인이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하여 다시 말을 한다. 
“나는 괜찮아요, 우리 남편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아니까요. 색깔이 있는 옷이든 없는 옷이든 깨끗해 지는 차이는 결국 가루비누의 차이 아니었나요?”
그런 센스있는 대답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고, 그렇게 그들의 회의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그들은 웃었지만 그 장면을 보던 나는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White only를 하얀 색 빨래만 가능하다고 해석한 그 순진한 부인의 얼굴에 오스틴을 따라가는 많은 독자들이 오버랩되었기에 그렇다.

그 부인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신조로 하며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동네에 있는 세탁소를 거론하며 거기에 가면 빨래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니 그렇다. 구김살 없는 성격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아주 교양 있는 사람이리라. 그러나, 그래서 그녀는 ‘white only’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더 나아가 흑인들이 겪어야 하는 그 처절한 고통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나누고 있던 이야기가 빨래였기에, 그 부인은 동네 세탁소에 써있던 white only 라는 표지판이 떠올랐고, 그 세탁소에는 하얀 색 빨래만 받기 때문에 세탁기가 고장나지 않았다, 고 천진난만하게 해석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 부인의 순진함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아니지만, 상황에 맞는 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 순진함은 오류를 만들고 말았으니, 결국은 잘못이다. 그러나 다른 부인들은 설령 논의되고 있는 주제가 빨래일지라도 White의 의미를 결코 그렇게 하얀 색의 빨래만 허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도 순진했으리라,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상황에 맞는 판단력,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혹시 우리들도 너무 순진한 나머지 white의 의미를 오직 하나로만 해석하는 그 부인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믿음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판단력, 분별력은 내팽개치고, 무조건 좋다고 달려드는 것이 너무 닮았지 않은가?
좋은 사례가 지난 호에 인용한 오스틴의 글이다. 믿음이라는 말이 등장하니 아무런 생각없이 순진하게 다 좋다고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잘못되는 아주 좋은 사례이기에 다시 한번 검토해보기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은 정반대로 할 때가 많다. 명심하라. 믿음은 좋은 쪽뿐 아니라 나쁜 쪽으로도 그대로 이루어진다. 나는 감기를 계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마트에 가면 자기 미래를 예언하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 벌써 감기철이군. 감기약을 미리 사두는게 좋겠어. 작년에 감기가 극성을 부렸잖아. 그때는 운좋게 넘어갔지만 올해는 어떨지 모르지.”
마치 반드시 감기에 걸릴 사람들 같다. 그들은 부정적 믿음을 넘어 실제로 감기약을 산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로 감기에 걸린다. 비록 부정적인 믿음이지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감기를 기대하고 계획한 탓에 정말로 감기를 불러들였다. 바로 그렇다. 좋은 믿음이든 나쁜 믿음이든 그대로 이루어진다.>
(<잘되는 나>, 295쪽)

지난 호에서는 오스틴이 사용한 좋은 믿음, 나쁜 믿음, 그리고 부정적 믿음이란 말이 성경에서 사용된 사례가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그의 글이 잘못된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굳이 성경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 속에는 우리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문제 안에 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우리 상식에 반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나 살펴보기로 하자.

‘믿음’과 ‘질병 예방, 위생’은 배치되는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질병 예방에 관한 것이다. 오스틴은 그의 글에서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 마치 잘못된 것인양 말하고 있다. 감기가 극성일 것이라고 보건 당국이 말하면 시민들을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무시해야 하나? 감기쯤은 믿음(?)이 있으면 무시해버려도 되는지? 감기가 유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면 거기에 대처하는 것이 문명인의 자세가 아닌가? 그런데 오스틴은 그런 문명인의 반응을 아주 부정적이라고 매도한다. 그런 오스틴의 태도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런 글을 읽는 독자들은 위에 말한 영화 속의 white를 하얀색 빨래라고 해석한 부인처럼, 믿음이라는 말에 혹해서, 그런 판단력, 분별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그의 글을 다른 각도로 분석하며 읽어보자. 

<나는 감기를 계획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어불성설! 감기를 계획하다니? 어떤 사람이 감기를 계획하는가? 그리고 감기를 계획한다고 감기에 걸릴 수 있는 것인가?

<마트에 가면 자기 미래를 예언하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벌써 감기철이군. 감기약을 미리 사두는게 좋겠어. 작년에 감기가 극성을 부렸잖아. 그때는 운좋게 넘어갔지만 올해는 어떨지 모르지.”>
 
마트에 가서 오스틴이 들었다는 말, 그 말은 예언이 아니라, 문명인으로서 당연한 대처방안이다. 감기약 정도는 비상약으로 집집마다 하나 정도는 비치해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오스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경고를 귀담아 듣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다 누구나 비상약을 비치해 두어야 한다. 그러니 감기철이 돌아왔다는 텔레비전 광고가 방송될 때마다 두려움을 안고 약국으로 달려가서는 곤란하다.> ( <잘되는 나>, 295쪽)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마라. 경고를 귀담아 듣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다 누구나 비상약을 비치해 두어야 한다”라고 말하려면, 그전에 “부정적인 믿음이지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감기를 기대하고 계획한 탓에 정말로 감기를 불러들였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바로 그렇다. 좋은 믿음이든 나쁜 믿음이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결론의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놓은 다음에, 살짝 한 걸음 물러서는 아주 교활한 글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예언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예언가로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는 실제로는 예언가라기보다는 의사였다. 그래서 흑사병이 유행할 때에 그는 의사로써 흑사병을 치료했고, 예방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다. 그런 때에 교회는 어떻게 했는가? 영화 <노스트라다무스>에 등장하는 ‘병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 소개한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를 붕괴시킨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일 만큼 당시에는 큰 재앙이었고 그래서 길거리에는 사람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사이기도 했던 노스트라다무스는 사람들에게 위생을 강조함과 동시에 장미꽃잎으로 제조한 자신의 환약을 주려고 했지만, 성직자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고 의학에 의지하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에 어찌 자네가 손을 대는가? " 라고 반문한다.
이 때 노스트라다무스를 이단으로 몰던 성직자가 페스트에 감염되고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를 치료하던 중, 우선 감염을 막기 위해 먼저 그의 옷을 태워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신성한 성직자의 옷을 태운다는 그의 생각은 기존의 기독교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게다가 페스트에 감염된 성직자는 "십자가에 입을 맞춰 보시오. 당신은 악마요. 그러니 당신의 입술은 타버릴 거야. 만약 당신의 입술이 타지 않는다면 나를 치료해도 좋소! " 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스트라다무스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그를 치료해준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tv15x&logNo=90149596280 >

영화는 영화일뿐이라고?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가혹했다. 영화는 빙산의 일각을 다루었을 뿐, 현실은 더 참혹하고 냉혹했다. 그 처럼 당시 교회가 믿음이라고 내세운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역사적 사실을 오스틴은 과연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적어도 위와 같은 발언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반드시 감기에 걸릴 사람들 같다. 그들은 부정적 믿음을 넘어 실제로 감기약을 산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로 감기에 걸린다.>

감기에 걸린 것은 감기에 걸릴만한 여건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결코 부정적인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믿음- 물론 이 말도 성립되지 않는 말이지만 – 과 감기 걸린 것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는지?

<비록 부정적인 믿음이지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감기를 기대하고 계획한 탓에 정말로 감기를 불러들였다.>

감기를 기대하거나 계획한다니? 기대와 계획은 생각의 요소이지, 결코 믿음의 요소는 아니다. 이 ‘기대’와 ‘계획’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오스틴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정적 믿음, 나쁜 믿음이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생각’임을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오스틴의 발언은 현대 문명이 이루어놓은 의학발달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며, 의학에 무지한 믿음이 얼마큼 해악을 끼쳤는가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알지 못하는 발언이며, 또한 ‘생각’ – 그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주장하지만 – 과 ‘일어난 사건’과의 인과관계를 전혀 상관치 않는, 그야말로 마구잡이 발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애지중지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래서 호세아 선지지가 전한 경고의 말씀은 안타깝게도 현재진행형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세아 4: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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