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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리더십에 반하다.-3
<’반하다’는 말을 혹시 오해할지 몰라 한자를 덧붙입니다. 이 때의 ‘반’은 反, 또는 叛 입니다.>
3 . 공자는 처세술을 가르쳤는가?
공자 노자가 처세술을, 리더십을 가르쳤는가?
일단 논어 그리고 노자가 지은 책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요즈음 출판된 많은 수의 책들이 공자를 처세술의 교사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실제 공자가 그러한 사람이었던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1) 공자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지난 호에 말한 바와 같이 남에게 보여주려고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는 무어라 했을까?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그는 남의 평판을 개의치 말라 한다,
그래서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러워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유붕자원방래면 불역락호아 인불지이불온이면 불역군자호 아) (학이 -1)
<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때로 이를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화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글을 처세술로 이해하는 학자도 없지 않다. 신정근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는 구절은 일종의 처세술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논어가 전형적인 학문이라기보다 세상살이의 지혜니 현명한 처세술의 창고로 보인다. 물론 학문의 정의가 달라지면 그것에 따라 이야기도 달라질 것이다.> ( <논어의 숲,공자의 그늘> 신정근, 373쪽)
그러나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계속 말한다.
子曰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학이 -16)
(자왈불환인지불기지요 환불지인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치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다.>
(자왈불환인지불기지요 환불지인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치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다.>
이 말은 이인편에서도 발견된다.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이인- 14)
(자왈 불환무위요 환소이립하며 불환막지요 구위가지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설 곳을 근심하라.>
(자왈 불환무위요 환소이립하며 불환막지요 구위가지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설 곳을 근심하라.>
공자의 결론은 남이 자기를 알아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군자의 학문은 그것으로 자기를 아름답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중용] 11장에도 같은 의미의 글이 보인다,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군자는의호중용하야 둔세불견지이불회하나니 유성자아능지니라)
(군자는의호중용하야 둔세불견지이불회하나니 유성자아능지니라)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숨어 있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오직 성자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2) 노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노자의 책 [도덕경]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오강남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경은 일차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위한 지침서라는 주장에 수긍이 간다.> (도덕경, 오강남, 57쪽)고 하니 오강남은 도덕경을 사람을 다스리는 즉, 리더십의 지침서로 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박영호는 말한다.
<사람들은 노자를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처세(處世)의 글로만 여긴다. 그러나 그 먼저 노자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각도(覺道)의 글이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따라서 알게 된다.> (박영호.서문중에서)
기세춘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노자는 인생이 무엇인가,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장(老莊)은 세상을 등진 은퇴철학이다. 은퇴철학이란 국가. 사회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기세춘, 노자, 46쪽)
그렇게 도덕경의 참 의미를 찾는 분들은 인간의 실존을 논하는 노자를 보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노자의 글을 처세술로 해석하고 있으니, 그 차이가 무릇 기하이뇨? 리더십으로 보고 있는 그들의 오묘한 기술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따라서 공자, 노자 할 것 없이 리더십과는 상관이 없는 분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노자를 리더십의 교사로, 처세술의 선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의 마이더스적 기술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2013.10.03 07:32:30
라라님, 정말 오랫만입니다. 잘 계셨지요?
가을, 독서의 계절인데,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하는데, 그 고전이 지금 분탕질을 당하고 있네요
처세술 분칠을 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정작 공자, 노자는 어디로 가버리고
맥스웰, 코비가 거기 들어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 리더십 리더십 운운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음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도처에 리더십과 처세술이 득세하니 교회도 슬그머니 그 추세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연원을 밝히면 교회에서 영적리더십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고전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리더십 처세술 분탕질하는 책 외에
뜻밖에도 고전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책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그러한 책들이 우리 교계에도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강남 교수님은 다양한 책을 쓰셨는지라,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그가 쓴 도덕경에는 하여튼 그런 내용이 보입니다.
건강하시고, 종종 뵙기 원합니다.
오 목사님, 오랜만에 인사드리지요?
오늘은 정말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꼭 불러보고 싶은 날입니다.^^
오늘, 여기 인근 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 강의가 있었어요.
백제 부흥이야기인데요,
맛깔스런 주제거니 했는데, 교수님이 댑따 어렵게 '발표'하시네요. ^^
그래서 저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야 했어요. 졸려서 말이지요. ^^
목사님, 저도 올 여름, 지독히 더운 여름에 도서관에서 읽었던 몇 권의
책 중에 노자, 장자가 있네요. 어려워서 감히 읽었다고도 못할 형편이지만,
위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노자, 공자를 처세술 가르치는 선생으로
이해하는 건 저 같은 사람 눈에도 한참 곁길로 나가 보이네요.
그 분들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본질, 절대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리고 그 심오함의 경지는 감히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요.
거의 그렇게들 말씀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에이..오강남교수님 실망이네요.^^
우얗든..
목사님,가을이 너무 예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