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리더십에 반하다.-2
 <’반하다’는 말을 혹시 오해할지 몰라 한자를 덧붙입니다. 이 때의 ‘반’은 反, 또는 叛 입니다.>
 
2. 공자, 노자도 리더십 주창자?
 
논어는 근본적으로 철학이다. 그러니 공자를 처세술로 읽어가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마치 우물에 가 숭늉 찾는 격이다. 먼저 철학으로 읽어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사람이 된 다음에 처세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논어를 처세술로, 더 나아가 리더십의 안경으로  읽어가는 것은 수박의 속은 맛보지 않고 껍질만 핥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 일찍이 공자를 리더십의 소재로 삼아 갖은 변설을 늘어 놓는 책들을 많이 보아 왔지만, 노자(노자마저?)를 리더십의 근거로 삼아, 리더십을 논하는 책을 보고는 더 이상 수수방관 할 수 없어, 그간 갈무리 해 놓은 자료를 떠들어 보았다. 왜 그렇게 리더십에 목을 메고 있는지?
 
지난 번 글에서 본 바와 같이 리더십 주창자들은 이제 공공연히 노자를 들먹이고 또한 공자를 들먹인다. 이제 장자도 분명 그러한 대상에 들어갈 날이 (아니 벌써 그럴지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그 분들이 사람들더러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라고  그토록 애를 쓰며, 평생을 바쳤던 것일까? 노자, 공자가 리더십 운운 하였을까?
 
기세춘은 도올의 논어 강의를 비판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런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도올의 노자는 …..한군데도 취할 곳이 없다. 그의 목적은 2천여 년 전의 공자와 노자를 자본주의 사상가나 성공한 경영자로 각색하는데 있는 것 같다. 굳이 그의 공헌이라면 엄중한 역사적 학문적 자료인 논어와 노자를 비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인 처세훈으로 둔갑시켜 시장의 취향에 영합하여 상품화에 성공한 것을 들 것이다.> (노자, 기세춘, 11쪽)  
 
먼저 공자의 글 하나를 살펴보자. 공자도 오늘의 시점에서 리더십 운운하며 자기의 생각을 처세술로 바꿔버릴 것을 예상했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論語, 憲問 -25)
(자왈 고지학자는 위기러니 금지학자는 위인이로다)
 
위의 글 해석 두가지를 소개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충실을 위해 하였으나, 지금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한다.”>(논어, 김학주, 247쪽)
 
<공자왈, 옛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배웠고, 지금 배우는 사람은 남을 위하여 배운다”>.
 
위의 두 가지 번역의 문제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대개의 번역은 두번째 번역을 취하고 있는데, 한문을 직역하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남을 위해서’ 배우는 것이 무엇이 문제일까, 싶은데 '남을 위한다'는 말은 '위한다'는 말이 아니라 ‘남에게 잘 보이도록’이란 뜻이다. 그래서 공자의 이 말씀은 김학주의 번역으로 읽어야만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근사록(近思錄)에 이 구절의 깊은 뜻을 음미하고 있는 글이 보인다.
 
古之學者는 爲己나 其終至於成物하고
今之學者는 爲人하다가 其終至於喪己하나니라
 
해석해 보자면 이렇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학문을 하였으나 결국은 남을 성취시키기에 이르렀고,
오늘 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학문을 하다가 결국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순자(荀子) 역시 공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군자의 학문방법을 말하고 있다.
 
“군자가 학문하는 방법은 귀로 들어 마음에 새기고 온 몸에 가득 펴서 모든 동정에 아낌없이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마디 말이나 한가지 거동에 절도가 있어 모든 사람의 법칙이 된다. 그러나 소인의 학문하는 방법은 귀로 들으면 바로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에는 겨우 네 치 정도에 불과한데, 일곱 자나 되는 몸뚱이를 무슨 수로 아름답게 꾸밀 것인가? 옛날의 학자들은 오로지 자기 몸을 위하여 학문을 하였건만 오늘 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학문을 한다(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군자의 학문은 그것으로 자기를 아름답게 하지만, 소인의 학문은 그것으로 자신을 짐승으로 만들 뿐이다.”
(순자, 최대림 역, 15쪽)  

정약용도 이점을 분명히 했다.
“六經四書로써 修己하고, 一表二書로써 天下國家를 다스리니 本末이 갖추어진 것이다.”
      (시문집, 권 16. 18a – 다산의 논어해석연구, 김영호, 35 쪽)

다산도 육경사서(六經四書)는 자기 자신을 닦는 책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탄식한다. “子曰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마치 지금 21세기에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는 듯이.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공자가 말한 시점이 오늘 현재의 시점이 아니다. 몇천년 전 일이다. 그러니 오늘 일이 아니라, 그때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고, 어제 오늘 만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런 일은 꾸준히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맞다.
 
몇천년 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앞에 있는 듯 여겨지는 공자 말씀, 그래서 공자의 그런 경구가 지금껏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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