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없이 성경읽기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하나?
문장 해독률 제고를 위한 성경 읽기(2)- 딤전 2:8

마르크스의 묘지에는 그의 상반신 석조조각이 대좌에 올려져 있는데, 거기에는 “철학자들은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이영희<대화>, 618쪽)
그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이한다면, 이제까지의 철학이 세계를 해석해온 것이라고 한다면, 앞으로의 철학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굳이 철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제 해석을 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세상을 변혁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잘 못 해석되고 있는 성경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런 말을 했더군요. 지금까지 세계가 변혁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너무 적게 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해석이 웬만큼 되었으니까 이제는 세상이 변혁될 만도 한데, 그렇지 못한 것은 아직도 그 해석이 덜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성경에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아도르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말씀으로 세계를 변혁시키기 이전에 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먼저라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그릇되게 해석한다면, 그렇게 그릇되게 해석된 말씀을 가지고 세계를 변혁시키기는커녕 변질시키지 않을까요?
성경에 관해서는, 아도르노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너무 적게 해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해석들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루에 7시간 기도하는 사람

거기에 합당한 사례를 최근 발견했습니다. 최근 어떤 책을 한 권 읽었는데, 도저히 제가 가진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분은 하루에 7-8시간씩 기도한다면서, 그런 기도를 권하는 책을 썼습니다.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하루에 7시간을 기도하라 하는데, 과연 일반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준 역할을 다하고 하루에 7- 8시간 기도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 불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라.

그 중에 또 하나,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 등장합니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바른 자세에 의한 기도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손을 들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2, 박종훈, 122쪽)

기도할 때에 두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디모데후서 2장 8절,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는 바울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도할 때마다 손을 들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팔을 들어서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팔의 부상이나 아픔이 없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같은 책, 123쪽>

[또 어떤 성도들은 제가 팔을 들어서 기도하니까 기도시간 내내 손을 올리고 하는 것으로 하는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어떻게 제가 팔을 올린 상태에서 7시간 동안이나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 팔을 올려서 기도하는 시간이 약 30% 정도이고 나머지 70%는 팔을 내리고 기도하였다.] <같은 책, 124-125쪽>

그런 주장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분이 하는 것처럼 기도할 때에 30% 정도는 손을 들고 기도하고 나머지 70% 정도는 손을 내리고 기도해야 할까요?

저 혼자만 그런 의문을 갖는가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 비슷한 의견입니다.

[(딤전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면 그냥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순종할 의무와 특권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우리의 거룩한 손이 하늘 보좌를 흔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박종훈의 글보다 한 발 더 나간 해석이지요. ‘손을 들고 기도하면 그 손이 하늘 보좌를 흔든다’는 해석,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경인용은 온전하게 해야

그런데 박종훈은 유감스럽게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제대로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라고 한 구절은 그 말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는 문단 전체를 모두다 살펴보아 문맥을 고려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한 구절을 두고 해석할 경우에도 전체의 구절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지, 그 중 일부분만을 마치 전체 구절의 의미인양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문장을 해석할 때에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의 뜻을 비틀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는 부분만 인용해서 마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했는데, 그 부분이 포함된 전체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니 그 앞에 있는, 그 다음 말을 한정하는 기능이 있는 앞의 문장을 고의인지 실수인지 빼버린 것입니다. 만일 고의라면 그분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첫 번 째 의문

그래서 그분이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맞다 생각한다면, 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남자들은 손을 들고 기도하라”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 말하길, 기도할 때, 남자는 손을 들고 기도하라 했다면, 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건이라도 쓰고 해야 하나요? 왜 그 구절(딤전 2:8)에 남자에 관해서만 언급되어 있고, 여자는 언급되지 않은 것일까요? 그러니 이 구절이 진정으로 기도할 때의 자세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남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바울은 그런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기도할 때의 자세를 규정하려는 의도였다면, ‘남자는 손을 들고 하고 여자는 여차 여차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분명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을 보니, 바울은 이 구절에서 손을 들고 하라는 식으로 기도자세를 규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성경에 언급된 기도자세

성경을 찾아보면 기도의 자세가 비단 손을 올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도하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헨드릭센 (Hendriksen)에 의하면,
(1) 서서 기도함(창 18:22; 삼상1:26; 마6:5; 막11:25; 눅18:11, 13)
(2) 손을 펴서 하늘로 향함(출 9:29, 17:11-12; 왕상 8:6; 시 63:4, 134:2, 141:2; 사1:15; 애2:19, 3:41; 눅24:50; 딤전2:8).
(3) 머리를 숙임(창 24:26, 48;출12:27; 대하29:30).
(4) 눈을 하늘로 향함(시25:25, 121:1, 123:1-2, 141:8, 145:15; 요 11:41, 17:1).
(5) 꿇어 앉음(대하 6:13; 시 95:6;사 45:23; 단 6:10; 마 17:14; 막 1:40; 눅 22:41; 행 7:60, 9:40, 20:36, 21:5; 엡3:15).
(6) 얼굴을 땅에 댐(창 17:3; 민14:5, 16:4, 22, 45; 신 9:18,25;수5:14;삿13:20; 느8:6; 겔1:28, 3:23, 9:8, 11:13, 43:3, 44:4; 단 8:17; 마 26:39; 막 7:25, 14:35; 눅5:12, 17:16; 계11:16).
(7)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음(왕상 18:42)이다.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위의 일곱가지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

두 번 째 의문

그러니 박종훈의 책에 쓰인 논리를 그대로 이런 기도의 모습에 적용한다면, 기도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
‘서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하늘로 올리고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하며, 그뿐만 아니라, 꿇어앉아야 하며, 얼굴을 땅에 대며 또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그렇게 기도할 수 없으니, 대체 어떤 형태의 기도를 얼마 정도, 각각 몇 % 해야 맞는 것일까요? 기도하는 시간을 통틀어 100이라 한다면 서서 10 정도 기도하고, 또한 눈을 하늘로 올리고 기도하고 나머지 10%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고 등등. 과연 어떻게 해야 그분의 생각을 따르는 모습이 되는 것일까요? 난감한 문제입니다.

바른 해석은?

이 구절에 관하여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건전한 해석이라고 판단되는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기도의 자세가 꼭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는 손'이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을 행하거나, 기타 범죄를 짓고 나서 더럽혀진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손을 든다면 하나님께서 돌아서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몸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태도가 더 중요하다.>

<'각처에서'라는 말은 기도를 위해 일정한 장소, 더 나은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음을 보인다. 산에서도 빈들에서도 예배당에서도 집의 골방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단지, 우리에게는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하며 우리의 손이 거룩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까닭 없이 혹은 부정당하게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죄를 품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사 1:15; 59:2). 또 우리의 손이 남을 해치는 악독한 손 또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음란한 손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겠는가?>

성경 해석은 계속되어야. 단, 바르게.

그러니 이 구절(딤전 2:8)은 기도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글자만 보고 문자적으로 해석해 마치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기도하는 자세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지양해야 할 성경해석이라 생각합니다. 문장 전체를 보지 않고 그저 일부분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문장해석, 지양해야 할 방법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성경은 해석되어야 하며, 잘못된 해석들을 고쳐나가는 수정작업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른 해석만이 세상을 바르게 변혁해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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