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7월의 다섯 주일은 성령강림절후 절기다. 필자가 따르고 있는 교회력의 성서일과는 주로 그리스도인이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다룬다. 세상에서의 투쟁적인 삶이라 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이다. 첫 주일의 본문은 롬 7:15-25절이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다. 둘째 주일은 창 25:19-34절이다. 에서와 야곱의 투쟁이다. 셋째 주일은 마 13:24-30절이다. 곡식과 가라지가 같은 밭에서 자라고 있다. 악과 동거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가리킨다. 넷째 주일은 마 13:44-52절이다. 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유, 즉 밭에 감춰진 보화, 값진 진주, 그물이다. 이 본문만은 성격이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이 전력투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함께 묶을 수 있다. 마지막 주일은 창 32:22-31절로,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했다는 이야기이다.

성령강림절후 절기와 그리스도인의 투쟁적인 실존은 잘 어울린다. 성령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내면에는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들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은 크게 상심하고 좌절하고. 본인의 신앙이 크게 잘못된 건 아닌지 불안해한다. 더 심하게는 자기를 학대하고 자학하고 의심하면서 살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이들은 그 모든 고된 현실을 손오공 구름 타듯 가볍게 처리한다. 믿고 성령 충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이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세상과 역사는 무거운 짐이 되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이 되고 만다. 양쪽 모두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다. 우리는 7월 한 달 동안 이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겠다.

 

7월3일/ 성령강림절후 셋째 주일

로마서 7:15-25/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5-25)

 

오늘 설교의 본문인 롬 7:15-25절은 학위 논문 주제로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율법과 로마의 문화에 정통한 한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영적 실존에 대한 고민과 그 풀이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영적 실존은 명백하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7:19 참조) 천하의 바울이 이렇게 자조적인 말을 한다는 것은 뜻밖이다.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외치기도 했다. 그에게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바울이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한 실수를 반복했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 자기훈련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은 더 근원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본문이 포함된 롬 7장의 큰 주제는 율법과 죄의 관계이다. 본문도 이런 큰 틀에서 봐야한다. 바울은 앞부분에서 이에 관한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했다. 논리의 핵심은 7:8b절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이를 거꾸로 말하면, 율법으로 인해서 죄가 살아났다는 뜻이다. 엄청난 진술이다. 여기에 유대교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한 바울의 사상이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신학적인 맥락을 설교자가 정확하게 뚫고나가지 못하면 오늘 설교 본문도 헛돌고 말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즉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12절) 당연하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의 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삶의 진수를 경험했다. 이 율법은 로마의 실정법과 같다. 로마제국도 이 법에 의해서 지탱될 수 있었다. 율법이나 실정법이나 모두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규범(norm)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울은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죽인다고 보았다. 율법과 계명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죄에 이용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완벽한 법을 만들어도 그것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바울의 이런 논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현령비현령이라는 말처럼, 또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처럼 오늘의 실정법으로는 인간을 살릴 수 없다. 오히려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자기의 실존 경험으로 설명한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15절) 그는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자신을 보았다. 솔직한 고백이다.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것을 고치려면 법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율법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b절)가 그 뜻이다. 이것이 인간이 놓인 영적 실존이면서 딜레마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강제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도 없다. 탈출구가 없는 상황이다. 왜 그런가?

그 답은 죄다. 죄의 힘이다. 바울에 따르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다.(17절) 죄를 존재론적인 힘으로 본다는 뜻이다. 결국 그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 이른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 이런 상황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율법과 죄의 악순환에서 어쩌란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상투적인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과 죄의 악순환에서 빠져날 수 있다고 말이다. 원칙적으로 옳은 답이지만 이전투구 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여기서 자칫하면 이 현실을 부정하는 열광주의로 빠지거나 아니면 타협적인 세속주의에 빠진다. 오늘 설교자들은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갈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의 차원을 신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답을 찾으려면 8장을 보아야 한다. 거기서 그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구별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람이 확장시킬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영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육이 영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영이 육을 살린다. 따라서 생명을 얻으려면 당연히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여기서 핵심이다.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동안 비록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롬 8:39) 즉 생명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7장은 8장 이전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존은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반복해서 말했듯이 죄의 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그래서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탄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삶의 길을 제시한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두 가지 법 사이에 끼어 있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이다. 그걸 억지로 하나로 만들 수는 없다. 모순된 삶을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일치되는 때는 죽거나 종말이 왔을 때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두왕국론’(Zweireichlehre)은 일리가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문제를 사회 윤리적으로 더 풀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자의 분발을 바란다.

 

7월10일/ 성령강림절후 넷째 주일

창세기 25:19-34/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19-34)

 

창세기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족장사(史)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진다. 이들 중에 이삭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비해 비중이 낮다. 그의 역할은 아브라함과 야곱을 이어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삭 이외의 족장들은 대하서사로 불릴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야곱 전승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유별나다. 우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 뿌리를 둔다. 이스라엘이라는 명칭도 야곱에게서 시작되었다. 특히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다.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으며, 요셉도 늘 선한 방식으로 대처했는데 반해서 야곱은 다른 이들과 늘 경쟁적이었고, 더 나가서 기만적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의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요셉 덕분으로 애굽에 간 야곱이 “네 나이가 얼마냐” 하는 바로의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하고 대답했겠는가.

오늘 설교 본문인 창 25:19-34절이 전하는 에피소드는 야곱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험악한 세월의 전조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이야기가 얽혀 있다. 하나는 야곱의 출생 이야기다.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다.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한다. 물론 태아가 의도적으로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수는 없다. 성서기자의 글쓰기 전략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샀다는 이야기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한다.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장자의 명분은 판다고해서 팔리는 건 아니다. 더구나 팥죽으로 거래가 성사될 수는 없다.

성서기자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일까? 이스라엘 독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이 두 이야기에서 야곱의 인간성은 별로 인정받을만한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이나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는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의 명분을 샀다는 것이나 모두 비인간적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설화를 통해서 보더라도 야곱과 에서를 비교하면 에서가 훨씬 더 인간적이다. 둘 사이의 평화를 먼저 깬 이는 야곱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한 인물이나 민족에 대한 성서의 평가는 도덕성이 아니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은 일방적인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9장에서 다루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3, 말1:2)라거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는 진술은 하나님의 선택이 일방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더 심한 표현도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바울은 토기장이를 비유로 든다. 질그릇은 토기장이에게 불평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렘 18장 참조)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는 출애굽기 기자의 진술도 이런 맥락과 일치한다.

이런 말씀을 신앙적인 자기 합리화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을 무조건 선택하셨다는 식으로 말이다. 토기장이 비유는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기준을 넘어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무런 기준도 없이 독재자처럼 인간을 통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의 여부다. 하나님께 영혼을 기울이면서 사는가의 여부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것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가의 여부다. 에서는 배가 고프다는 현실에 마음을 빼앗겨서 장자라는 명분을 하찮게 생각했다. 거꾸로 야곱은 비록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장자의 명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물론 이것은 가부장적이고 혈연 중심으로 돌아가던 당시 세계관에 따른 해석이다. 장자의 명분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명분에, 다른 말로 이상에 무게를 둔다. 신앙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도와주지는 않는다. 배고픔을 면하게 하거나 병을 없애주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서, 또는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현실 문제보다 더 중요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도 마찬가지다. 교회 성장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 겉으로는 하나님이 절대적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현실만을 따른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세계는 그들에게 이미 전제되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삶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다. 설교자는 신자유주의라는 현실에 묶여 살아가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아듣도록 설파해야만 한다.

 

7월17일/ 성령강림절후 다섯째 주일

마태복음 13:24-30/ 악을 대하는 태도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위 본문은 소위 ‘가라지의 비유’다. 정확하게 말하면 천국의 비유다. 천국의 비유는 마 13장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천국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계이기에 아무도 실증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비유가 최선이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을 비유로만 말했다.

가라지의 비유는 간단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씨를 밭에 뿌렸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하는 바람에 알곡과 가라지가 뒤엉켜버렸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가라지를 솎아내고 싶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솎다가 곡식도 뽑힐까 염려되어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라고 한다. 추수 때 가라지를 불사르게 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일단 천국의 속성을 읽을 수 있다. 그 나라는 심판을 통해서 구현된다. 그 심판은 진리와 거짓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사건이다. 생명과 거짓 생명이 구분되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일치되는 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직 추수 때가 아니기 때문에 가라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비유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들 안에 가라지와 같은 부류가 들어왔다. 원수의 짓이다. 복음을 변질시키는 세력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들을 배제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 비유는 이런 분파주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분파적 행동으로 인해서 결국 곡식으로 분류될만한 신자들도 떨어져나갈 수 있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곡식과 가라지 사이에 겹쳐서 신앙생활을 한다. 복음과 비복음의 차이를 분명하게 가르기도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악과 더불어서 살아간다. 그게 세상이며 현실이다. 악이 선명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흐릿해 보이기도 한다. 악과의 투쟁을 너무 앞세우는 것은 악에 속하지 않은 많은 이들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열 명의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억울한 이가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경구가 여기에 해당될지 모르겠다. 근원적으로 개인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가라지와 알곡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겠나? 완전히 선한 것만을 따라갈 수도 없다. 이 문제는 복음의 본질인 칭의 개념과도 어울린다. 칭의는 실제로는 여전히 악의 지배를 받거나 악을 행하기도 하지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있는 한 내면의 가라지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이 말이 개인과 사회의 악 앞에서 무반응으로, 타협적으로, 냉소적으로 살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사족으로, 설교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문제가 부분을 전체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는 해석학적으로 순환되는 것뿐이지 서로 대체될 수 없다. 위 본문은 성서 전체의 한 부분에 속한다. 그 부분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부분이 전체는 아니다.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그냥 두라는 말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는 말씀까지 무효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설교자는 이런 잘못을 넘어서기 위해서 전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성서 전체가 말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가리킨다. 그것이 조직신학이다. 설교자는 탄탄한 조직신학적인 인식에서만 성서의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긴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위 본문으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로 악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도 악은 실재한다. 그 어떤 나라와 그 어떤 공동체에도, 심지어 수도원에도 가라지는 자란다. 악의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악의 준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악이 괴멸될 마지막 때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7월24일/ 성령강림절후 여섯째 주일

마태복음 13:44-52/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44-52)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설교 본문이다. 여기에 잘 알려진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밭에 감춰진 보화, 진주 장사꾼, 그물이 그것이다. 각각의 특징이 있다.

첫째 비유에서 천국은 밭에 감춰진 보화다. 감춰진 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냥 들어오지 않는다.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들어올 뿐이다. 진리의 속성은 바로 이 은폐성이다. 생명의 속성도 은폐성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생명의 한 면에 불과하다. 생명의 현상일 뿐이다. 현상 자체만을 생명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바람 자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성도 감춰진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교 엘리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보화가 묻힌 밭을 샀다고 한다. 천국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설교자는 이 사실을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그게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종교적 교양이나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구도의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둘째 비유에서 천국은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이다. 이 사람도 첫 비유에 나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진주를 샀다. 이 이야기에서도 진주는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대상이다. 이 진주도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 진주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기울였는지에 대해서 설교자는 너무 많은 상상력을 펼치지 말아야 한다. 성경 이야기의 행간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럴 경우라 하더라도 본문을 훼손하지 않아야만 한다. 장사꾼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은 그의 수고라기보다는 거꾸로 우연의 결과일지 모른다. 어쨌든지 장사꾼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진주를 샀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셋째 비유에서 천국은 그물이다. 이 비유는 앞의 비유와 구별된다. 첫째 비유에서 천국은 보화였고, 둘째 비유에서는 장사꾼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런 맥락으로만 본다면 셋째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물고기, 아니면 어부가 맞다. 그런데 별로 역할다운 역할이 없는 그물을 천국이라고 했다. 이 비유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한 그물에 들어 있다는 점만 본다면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솎아내지 말라는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와 가깝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전승되던 비유가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서 한 묶음으로 처리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문제까지 설교 현장에서 논한 필요는 없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모두 아는 이야기다. 여기에 신앙적인 교훈을 붙이면 한편의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특히 앞의 두 비유에서 소유를 다 팔아서 보화나 진주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영적인 도전이 가능한 설교가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세 비유를 동시에 다룬다. 이 세 비유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비유들은 천국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세 비유에서 천국은 근본적인 변화를 그 속성으로 한다. 땅에 감춰진 보화가 드러나는 것이나 극히 값진 진주가 발견된 것이나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분리되는 것은 모두 그것을 가리킨다. 즉 천국은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되는 세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은 알리라.

지난달 중순에 스티븐 호킹(69세)은 영국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천국은 없다.”고 발언했다. 이것은 우주 공간에 자리하는 천국, 또는 죽음 이후에도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명이 연장되는 천국을 전제한 것이다. 이런 천국 표상이 그리스도교 안에 널리 자리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천국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천국을 우주의 어떤 공간이라거나, 또는 지금 생명의 연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질적인 변화라는 속성을 말할 뿐이다.

천국이 질적인 변화의 세계라는 말을 설교자는 청중들이 알아듣도록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부활도 질적인 변화이며, 칭의도 질적인 변화이고, 하나님 나라도 질적인 변화다. 질적인 변화는 영적인 변화다. 질적인 변화의 세계를 점점 깊이 깨우치는 삶이 곧 영성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본문은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 즉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고 했다.

 

7월31일/ 성령강림절후 일곱째 주일

창세기 32:22-31/ 다리 저는 야곱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22-31)

 

야곱 전승은 7월10일 주일에도 다뤄진 것이다. 그때는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얻었다는 에피소드였다. 오늘 본문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이야기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탓으로 형의 분노를 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피신한다. 잠시 위기를 모면할 생각으로 갔던 하란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곳에서 외삼촌의 두 딸을 얻기 위해서 14년을, 양 떼를 치기 위해 6년을 보냈다.(창 31:41) 거부가 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형이 마중을 나왔다. 얍복 나루를 건너면 형을 만날 수 있다. 야곱은 20년 전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에 휩싸였다. 형이 자기를 동생으로 대할지 아니면 원수로 대할지 확신이 없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장면부터 시작된다. 야곱은 두 아내, 두 여종, 열한 아들을 먼저 건너가게 했다. 그리고 종들과 모든 가축과 모든 재산도 건너보냈다. 야곱 혼자 얍복 나루 이편에 남았다. 한 밤중이다. 어떤 사람이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다고 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줄이겠다. 설교자들이 알아서 실감나게 설명하면 좋겠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족장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사연이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여기서 야곱의 경험은 도대체 무엇인가? 야곱은 자기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이에게 ‘당신 이름을 알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고 대신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붙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을 대면했으나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날 때도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들판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자다가 꿈을 꾸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늘 지켜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잠이 깬 야곱은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로 지었다.(창 28장) 그 당시도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제 20년이 지나 고향 브엘세바로 돌아오면서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그는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성서기자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 32:31) 야곱이 다리를 절게 된 이유는 야곱과 씨름하던 사람이 허벅지 관절을 쳤기 때문이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상태에서도 야곱은 천사를 붙들고 늘어졌고, 급기야 축복을 얻어냈다. 이제 천사는 떠났고, 밤은 지났다. 야곱은 홀로 브니엘로 이름이 바뀐 얍복 나루를 건너 형 에서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야곱은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더 소중한 것을, 아니 절대적으로 소중한 것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과 운명을 새롭게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천사와 씨름을 했다는 것은 자기의 운명을 근본에서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이 일군 가족, 재산이 도대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었다. 자신의 야망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곧 닥친다. 아무 것도 없이, 아무도 없이 홀로 궁극적인 생명을 대면해야 할 순간이 말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긴 했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다. 하나님이 그를 불쌍하게 여겨서 손을 든 것처럼 말씀하신 것뿐이다. 어쨌든지 그는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대신 다리를 절게 되었다.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다리를 저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는 다리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상흔(傷痕, stigma)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지든지 경건한 율법주의에 빠진다. 설교자도 이런 방식으로만 처방을 내린다. 야곱을 보라.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내놓았다는 뜻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자기를 몰고 갔다. 거기서 장애를 얻었다. 대신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다. 원천적 생명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은 것이다. 바울은 갈 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을 지니고 있노라.” 우리에게 야곱의 장애가 있는가, 예수의 스티그마가 있는가?(설교공부 2011년6월, 기독교사상 2011년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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