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다시 오는가?

 

11월은 교회력 2010-2011년 마지막 주일인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이면서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지키는 추수감사절이 있고, 또 2011-2012년 교회력 첫 주일인 대림절이 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이다. 많은 교회가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중요한 절기로 다루는 반면에 대림절은 외면하거나 아니면 체면치례 정도로만 취급한다. 까칠하게 말하면, 그 이유가 헌금에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교회는 절기 헌금에 지나치게 예민하다. 절기만이 아니라 부흥회나 사경회, 또는 특별새벽기도회에도 헌금이 빠지지 않는다. 과유불급이다. 헌금은 주일공동예배 시에만 드리는 게 좋다. 교회가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치고, 이제 한국교회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어른스러운 풍모를 갖춰나가야 하지 않을는지.

대림절을 소홀하게 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림절의 신학적 깊이를 모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대림절은 예수의 초림을 기억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부활체로 올림을 받은 초림의 예수가 재림하면 이 세상은 완성된다. 그 때에 우리는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세상과 생명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전까지 세상과 생명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거울로 보는 수준이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뤄질 세상과 생명의 완성보다 자신들의 세계 선교와 영혼구원 사업에만 관심을 보인다. 교회론의 과부하(過負荷)이다. 교회부흥이 블랙홀과 같다.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크다. 이런 교회는 예수의 재림을 불편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대림절 영성의 회복은 억지로 되지는 않는다. 그 세계가 눈에 들어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세상과 생명 완성에 대한 교리인 종말론을 공부하는 게 최선이다. 한 마디만 짚겠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이다.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사관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세속화이다. 마르크시즘 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나 그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유의 책들이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책을 읽기 전에 조직신학의 종말론 항목을 실질적으로 공부하는 게 좋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에 관한 문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설교자의 생각이 깊어져야 성서의 놀라운 세계가 조금씩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신앙인 재림 표상을 에두르지 말고 대면해보시라.

 

11월6일/ 창조절 열 번째 주일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위 설교 본문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단어들이 나열된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도 만만치 않다. 자는 자, 주의 부활, 데리고 오심, 주의강림, 주의 호령,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소리, 죽은 자들의 부활, 휴거 ... 이런 용어와 개념들은 묵시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마치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는 것 같지 않은가. 매우 무거운 단어들이 나열되다가 18절에서 갑자기 일상적인 문장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는 위로받지 않으면 안 될 어떤 급박한 처지에 빠졌다는 뜻이리라. 그 상황을 해명하는 것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는 게 좋다. 불트만의 제자인 마륵센(W. Marxsen)이 쓴 데살로니가전후서(국제성서주석 41권)에서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불어 닥친 신앙적 위기의 정체는 예수 재림의 지연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임박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경험할 것으로 믿었고, 그렇게 기대했다. 일종의 열광주의라 할 만한 그런 시기가 상당기간 유지되었다. 예수 재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교우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신앙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당시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서 재림을 맞는 것이 중요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당시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만이 아니라 유대교에도 있었고, 그 이외의 종교에도 유사한 신앙은 있었다. 재림의 지연과 교우들의 죽음으로 인해서 벌어진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신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바울은 위 구절을 기록했다. 그의 신학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다.

바울은 15절에서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이 논리가 핵심이다. 이 논리가 허물어지면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은 유지될 수 없다. 사람들의 단순한 연대기적인 시간 경험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말이 안 된다. 바울은 다른 결정적인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중이다. 그것은 예수의 재림이다. 그것을 의미하는 문장이 본문에 반복된다.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15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니리”(16절)가 그것이다. 예수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휴거를 받는다고 한다.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서의 이런 재림 표상을 이해하기 힘들고, 또 받아들이기는 더 힘들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알아듣도록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명백한 사실부터 풀어가야 한다.

예수 재림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구성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UFO가 오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니다. 예수 재림으로 우리가 우주의 어느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천국으로 변한 지구에서 영원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2천 년 유대인 복장을 한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다시 우리 눈앞에 나타나서 왕으로 군림하는 사건도 아니다. 예수는 이미 이 세상의 생명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부활체로 변화되었다. 이 세상의 생명형식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기대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우리는 예수 재림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가 없다. 성서의 묘사는 은유이지 실체가 아니다. 예수 재림을 단순히 영적 교훈 정도로 보자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제한적인 인식이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궁극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해서 쓸 수 없다고 했다.

예수 재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불가지론의 주장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묵시문학 표상을 통해서 성서기자들이 말하려고 했던 원래의 영적 리얼리티를 말하면 된다. 예수 재림은 예수 승천과 같은 차원의 사건이다. 하늘은 성서 시대의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이었다. 하늘로 올림을 받은 예수가 다시 오다는 말은 은폐된 생명이 완전히 노출된다는 뜻이다.

이런 신학적인 해명으로 설교를 끝낼 수는 없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사실로 돌아가면 된다.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서로 위로하라’(4:18)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설교 본문 뒤 구절에 나오는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5:6)이다.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이 완전히 드러날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생명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더라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며, 영적으로 긴장감을 잃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영적인 긴장감이 무엇인지 설교자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가 생명이니까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거기서 생명의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것이 영적 각성이다. 설교자는 이것을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토대에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해명해야 한다.

 

11월13일/ 창조절 열한째 주일

마태복음 25:31-46/ 마지막 심판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5:31-46절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이야기다.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건 위험하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지막 심판을 설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 여파가 심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 마지막 46절에 따르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영벌’에, 구원받은 사람은 ‘영생’에 들어간다. 영벌이라는 말이 긍휼과 자비가 끝없으신 하나님에게 가능한 일인가? 2) 악인과 의인의 경계선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3)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행위가 구원의 절대적인 기준인가? 설교자가 이런 몇 가지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깊이와 무게를 도외시하고 문자적인 차원에서 본문을 청중들에게 강요하면 심각한 신앙 왜곡현상이 일어난다.

1) 어떤 설교자들은 ‘영원한 불’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위협적으로 전한다. 생각이 짧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이런 설교에 겁을 먹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감만 일으킬 뿐이다. 2) 어떤 설교자들은 악인과 의인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을 듯이 설교한다. 전형적인 이원론적인 인간이해, 세계이해이다. 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선악의 관점에서 선을 긋기 힘들 정도로 중층적이다.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믿음과 불신은 동시적이고 다층적이다. 믿음이 있는 순간과 없는 순간이 겹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한다. 3)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구제와 봉사가 강조되긴 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케리그마의 하부에 속할 뿐이지 케리그마와 병행될 수는 없었다. 설교자가 이 본문을 근거로 영생을 얻으려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돌봐야 한다고 설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문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우선 종말, 또는 재림 표상은 자연과학자나 신문기자가 다룰 수 있는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여기서 사실의 차원은 표피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궁극적인 사건을 사실적인 언어로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다. 마태복음 기자는 당시의 유대교의 배경에서 예수에게 일어난, 더 나가서 일어날 어떤 궁극적인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 궁극적인 사건은 생명의 완성이다. 그것이 부활이고, 재림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절)는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배경에서 나왔다. 양과 염소의 구분은 곧 생명이 완성되는 그 순간에 대한 비유다. 마태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풀어서 전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마지막 심판에 일어날 생명의 완성은 우리의 예상을 뛰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임금의 오른편으로 분류된 의인들은 자신들이 임금을 언제 어떻게 섬겼는지 알지 못했다. 왼편으로 분류된 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타종교인들을 적대시한다. 그런 것을 암시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성경은 선택적 구원만이 아니라 만인구원의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자는 이런 대목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만인 구원의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필자의 기억에 바르트는 하나님이 지옥을 비워놓으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둘째, 생명의 완성은 예수와 직결되어 있다. 예수가 마지막 심판의 주가 된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위 대목과 상호적인 관계에 있다. 생명의 완성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예수에게 속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즉 예수와 관계에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립하지 않는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익명적 그리스도인도 가능한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신학적 착상에 근거해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설교자는 그것을 너무 계량화(計量化)하거나 표준화하지 않는 게 좋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은 각자 다르다. 목사들은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하려는 선한 욕심을 버리는 게 좋다. 마지막 심판의 중심을 바르게 전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영적으로 각성될 것이며, 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령이 고유한 방식으로 알려주지 않겠는가. 성령의 능력을 믿는 설교자가 되시라.

 

11월20일/ 창조절 열둘째 주일(추수감사절)

신명기 8:11-18/ 하나님을 기억하라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기는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에서 특별하다. 형식적으로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는 34장을 제외한 33장 전체가 모세의 연설이며, 내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생활을 끝내고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취해야 할 신앙적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런 형식과 내용이 실제와는 차이가 있다는 게 성서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신명기의 내용에는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나온다. 연설자도 모세라기보다는 익명의 예언자들이다. 이런 역시비평적인 문제를 설교에서 크게 다룰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청중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벌어진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예언자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문제의 핵심은 ‘교만’이었다.(14절) 이스라엘이 교만해진 이유는 소유가 풍족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12, 13절) 이게 사람의 한계다. 힘들 때는 겸손하다가 풍족해지면 교만해진다. 교만이 늘 밖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의 실체를 놓친다. 신명기는 17절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자기 능력의 과시가 교만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왕정국가를 이루었으니 말이다.

설교자는 신명기가 말하는 교만의 문제를 일단 이스라엘 역사에서 정확히 분석하고, 더 나가서 교만에 대한 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개념과 연결시켜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후자만 보충해서 설명하겠다. 전자는 약간만 세심하게 본문을 살피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어거스틴은 죄를 ‘휘브리스’(교만)라고 말했다. 교만이 사람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교만은 자기 능력에 매력을 느끼는 영적 태도이다. 그게 경우에 따라서 폭력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비폭력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칠게 나타나기도 하고, 세련되게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지 교만은 자기연민이라(나르시시즘)는 특징을 보인다. 그게 성서가 말하는 죄다.

오늘 한국교회는 청중들의 나르시시즘을 줄이는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고취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성서가 죄라고 말하는 것을 따라가는 형국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기에게 몰두하게 만든다. 그것이 무엇인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찬송가가 하나의 예다. 이것은 요염한 자태의 여자 탤런트가 자랑스레 내뱉는 ‘남편 사랑은 아내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카피와 다를 게 없다.

신명기가 제시하는 처방은 ‘여호와를 기억하라.’이다.(11,18절) 이유는 여호와가 모든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명제를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여호와를 기억하기도 어렵고 그가 능력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통치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통치가 대통령이 장관을 임명하듯이 실증적으로 드러난다면 아무도 그를 외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죽 했으면 예수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토로했겠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거듭해서 여호와를 외면한 이유도 하나님 통치가 별로 확실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하나님의 행위라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성서는 당연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성서기자들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현상이었다. 왕조시대의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버틴 것도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을 확인하는 데서 생명을 경험하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중심 개념인 경쟁력의 기본 원리이다. 국가적으로도 그렇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민주화를 이뤘고, 가장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교회도 그런 태도를 보인다. 우리 교회를 자랑하고, 우리 목사를 자랑하는 게 선교라고 말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교회가 이렇게 자신들의 능력을 확인하려는 이유는 그만큼 존재의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기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슨 의미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여호와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이뤄진 업적들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16절에 따르면 광야의 어려움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며 시험하여 결국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낮춤에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자기를 낮추기 힘들다. 늘 겸손한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교만과 겸손이 섞여 있다. 사람에 따라서 양쪽의 무게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세다. 교만의 무게가 늘어가는 사람이 있고, 겸손의 무게가 늘어가는 사람이 있다.

 

11월27일/ 대림절 첫째주일

마가복음 13:24-37/ 깨어 있으라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장은 문학적으로 묵시문학에 속한다. 묵시문학, 또는 묵시사상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역사관이다. 그들은 세상을 옛 에온과 새 에온으로 구분한다. 옛 에온은 악하고 새 에온은 선하다. 옛 에온은 무너지고 새 에온은 세워져야 한다. 지금 보이는 세상은 곧 옛 에온이고, 세상이 멸망한 뒤에 하나님이 직접 통치할 세상이 새 에온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 파괴, 재난의 징조, 환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등장, 인자, 천사 등의 표현들은 이런 묵시적 표상들이다. 설교시간에 묵시문학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런 묵시사상이 말하는 인자를 예수와 동일시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새 에온의 주체다. 예수를 통해서 세상은 완성된다. 그런데 예수의 초림으로 세상이 완성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신약성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아성(性)과도 연결되는 질문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왜 세상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을까?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자신도 그것을 불안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했는데, 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본다면 예수의 복음 선포가 실패한 것이다. 복음서는 메시아성의 비밀을 그 대답으로 제시한다. 세상 완성도 비밀이다. 예수의 초림은 실패한 게 아니다. 비밀한 방식으로 세상은 완성되었다. 즉 구원은 성취되었다. 그것이 실체로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예수 재림의 때이다.

이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궁금증은 그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냐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것을 위에서 말한 대로 13장에서 묵시문학의 틀로 설명한다. 이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들은 11월6일 설교 본문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수의 재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대가 지나가지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0절) 그런데 실제로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림을 기다리던 그리스도인들은 죽기 시작했다. 이런 곤혹스런 상황에서 복음서 기자가 제시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2절) 사도행전 기자도 비슷한 대답을 한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예수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대답이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이 무엇인지 설교자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사람의 인식론적 한계를 가리키는 하나님 행위의 초월성을 해석학적 근거에서 이해하고 해명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서용어와 신학용어를 개념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설득력을 잃는다. 하나님의 ‘초월’에 대해서만 한 마디 하겠다. 초월은 우리와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시적(通時的)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초월적인 존재이다.

때를 모른다는 사태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때에 대한 생각 없이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마가복음 기자가 짚은 것처럼 ‘주의하고 깨어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비유로 설명한다. 그 내용은 34,36절에 나온다. 이 대목에서 깨어 있으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된다. 마가공동체에서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깨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이게 설교의 핵심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자는 사람이다. 문지기는 피곤하기 때문에 자는 것은 자연스럽다. 더구나 주인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깨어 있으면 오히려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이나 구제와 봉사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또는 민중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깨어 있다는 의미일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깨어 있다는 말은 예수 사건에 대한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뜻이다. 예민하려면 예수 사건을 먼저 알아야 한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Winter Reise)에 예민하려면 가사와 운율의 깊이를 알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큰 깨우침을 가리킨다. 예수 사건을 생명의 완성으로 깨우치는 구도적 과정이다. 그 사건이 우리의 실존을 엄습하면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깨어 있는 삶이 바로 대림절 영성이 아니겠는가. 마라나타!(고전 16:22) (설교공부 2011년10월, 기독교사상 2011년 11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