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타자(2)

조회 수 8680 추천 수 0 2009.04.08 22:30:48
 

절대타자(2)


20세기 초반에 유럽 교회와 신학은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종교사회주의에 집중했다. 불름하르트 부자(父子)와 쿠터, 라가츠, 그리고 초기 칼 바르트가 이 운동에 중심인물이었다. 칼 바르트는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부터 공단지역인 자펜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1913년에 사회민주당에 당원으로 가입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에서 목사로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당원들 앞에서 연설도 했다. 교회의 종교사회주의와 정치적인 사회민주당 활동이 바르트에게서 함께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사회민주당은 공산주의를 가리킨다.

종교사회주의자가 어떻게 사회민주당 당원이 될 생각을 했을까? 바르트의 생애에 관한 이런 문제를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는 그 당시 종교사회주의 운동이 관심을 기울인 주제를 짚은 게 우리의 논의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그것이 정리되면 종교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관련성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사회주의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추구하려는 신학, 신앙운동이 바로 종교사회주의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주기도를 오늘 이 사회에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이다. 젊은 바르트가 목사의 신분으로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실현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어쨌든지 이들은 개인구원보다는 사회구원을 하나님 나라에 훨씬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전통은 50년이 지난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운동에서 되살아났다.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는 개신교 운동인 반면에 해방신학은 가톨릭 운동이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사회구조적 해방이라는 동일한 신학적 차원이 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민중신학이 그런 전통을 이어 받은 셈이다.

다시 칼 바르트로 돌아가자. 종교사회주의자로서 정치적인 사회혁명 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던 바르트는 얼마 있지 않아서 노조에서 탈퇴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운동과의 결별은 아니었다. 그의 신학이 중반 이후로 관념적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냉전 시대에 소련의 공산주의를 향한 비판에 공동의 보조를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바르트는 그들을 향해서 지금은 신학자들이 침묵을 지킬 때라고 말했다. 공산주의가 반기독교적인 세력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여전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노조를 탈퇴한 바르트는 사회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로마서 주석>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펜빌에서 목회하면서 쓴 성경공부 내용이다. 그 책이 1919년에 출판되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훗날 이 책은 “자유주의라는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까지 평가되었다.

그가 거기에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이 절대타자(totaliter aliter)라는 신학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아래와 같이 몇몇 경구로 정리해보자.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 자연과 하나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놓여 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온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혁명이 관건이다. 인간의 불가능성은 곧 하나님의 가능성이다.

위의 명제나 개념을 이원론적이라거나 관념적이라는 말로 재단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바르트 신학을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오는 치기에 불과하다. 바르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자기의 눈높이에서 판단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나는 하나님을 절대타자로 말하는 바르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절대타자이기에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기에 그는 이 세상을 완성할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완성할 것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요한 계시록의 묵시적 세계관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 하나님을 전혀 새롭게 이해하고 경험하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 하나님은 언젠가 하늘을 종잇장처럼 둘둘 말아서 새로운 하늘을 여실 것이다. 그렇게 열리는 하늘에 우리는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절대타자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글을 끝내가 전에 오해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한 마디만 보충하겠다. 절대타자, 새로운 하늘 표상을 에스에프 영화처럼만 보는 그런 고정관념을 떨치지 않으면 성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떤 상상력을 통해서도 그 종말의 세계를 그려낼 수 없다. 그것이 그려지면 이미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타자이며 창조자인 그분의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구원행위이다. 토기가 토기장이의 생각을 어찌 범주화할 수 있단 말인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00 베르디의 <레퀴엠> [2] 2021-10-31 1403
199 늙어가며... [8] 2018-10-17 4082
198 혼전순결 [6] 2017-12-11 7425
197 동짓날 [3] 2009-12-22 12491
196 사명 [13] 2009-08-28 16620
195 하나님 경험(5) [4] [2] 2009-05-09 12591
194 하나님 경험(4) [5] [1] 2009-05-09 10399
193 하나님 경험(3) [4] 2009-05-05 10733
192 하나님 경험(2) [3] [1] 2009-05-05 12376
191 큰 교회, 작은 교회 [4] 2009-04-24 13568
190 체험적 신앙에 대해 [5] [2] 2009-04-24 15184
189 천당 [2] [2] 2009-04-18 10395
188 천국 상급론 [9] 2009-04-17 19396
187 창조와 돌고래 [1] 2009-04-14 8484
186 존재의 신비 [3] [2] 2009-04-12 8229
» 절대타자(2) 2009-04-08 8680
184 일억 년 후! [2] 2009-04-01 8432
183 인간의 미래 [1] [1] 2009-04-01 7415
182 은혜 만능주의 [3] 2009-03-27 9913
181 요한계시록 읽기 [2] 2009-03-27 1061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