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경험(2)
물맛이 어떤지 설명하라고 하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설명이 쏟아질 것이다. 밋밋하다거나 달콤하다거나 혹은 쓰다거나 시원하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짜게 느낄 수도 있고,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이유는 일단 물이 종류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다는 사실과 물을 마시는 순간의 상황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물을 마실 때 어떤 상태였는지가 이런 데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땀을 많이 흘리거나 짜게 먹은 다음의 물맛은 꿀보다도 달 것이다. 소화불량에 걸려 헛배가 부른 사람에게 물맛을 없다 못해 쓰다. 같은 물인데도 그 안에 성분이 어떤가에 따라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따라서 이렇게 물맛이 다르다는 말은 곧 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일정하지 않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물은 그대로의 물이지만, 그리고 인간은 늘 그대로의 인간이지만 물과 인간 사이에 개입된 그 어떤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그 관계가 다르게 맺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맛에 대한 설명은 물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맛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지 실제로 물맛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물맛의 경험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맛은 직접적인 것이지만 언어는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물맛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도대체 물맛이 달콤하다거나 시원하다는 게 말이 될까? 우리의 혀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그 물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언어로 설명한다는 말인가? 경험은 경험으로만 전달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해명될 수는 없다.
하나님 경험도 이와 비슷하다. 아니 비슷하다기보다는 훨씬 근원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을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또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니다. 이게 우리 설교자들에게 놓여 있는 딜레마이며, 설교자들이 스스로 빠져드는 함정인 셈이다. 하나님 경험이 없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 묶인다는 것이다. 물맛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묘사해놓은 것만 전달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체에 대한 경험 없이 설명에만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성서는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경험에 대한 해명이다. 물맛에 대한 묘사만 읽고 물맛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성서텍스트만 알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하나님 경험이 없으면서 설교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게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물을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사람이 그럴듯하게 설명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들도 물맛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듯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경험 없이 다른 설명만 난무하면서 그게 곧 하나님 경험인 것처럼 착각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그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흡사 물맛 경험처럼 단 하나의 경험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시원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하게 경험되듯이 하나님도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어떤 사람에는 절대의존감정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궁극적인 관심으로 경험된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 경험은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 거 아닌가, 하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경험은 분명히 주관적이지만 단지 우리의 심리나 감정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것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경험이 과연 실제적인 하나님 경험인지 아니면 주관적인 자기만족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럴 능력은 나에게 없으며, 어느 누구에도 없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비추어 그것을 검증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단을 분간하는 기준도 역시 성서와 기독교 역사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기준마저 폐기한다면 인간의 주관적 경험이 오히려 진리를 재단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의 결과가 곧 사이비 이단의 출현이다. 우리는 실제로 물맛을 본 사람일까?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 경험을 한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설명에 떨어져 있을까?
목사님, 하나님 경험이 처음에는 각각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경험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로 통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경험이라 해도 이 '하나'로 통일된 경험들이 한 경험안에 이미 축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냐면,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자가 사랑을 알게 되고, 또 절대 의존감으로, 또 궁극적인 관심으로 이어지는 거 같아서요. 그리고 또 이 경험은 개인적인 하나님 경험이지만, 또 통일성을 갖고 있기에, 오늘날 역사와 전통의 맥으로 이어 지고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그러기에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은 '내 자랑'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게 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