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너는 누구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새번역 성경, 6:39)

 

목사직의 위기

인공지능(AI)과 로봇이 결합한 4차 산업혁명이 여러 직업군을 해체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온 지 오래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이미 그런 조짐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자동차 조립공장에는 로봇이 많은 작업을 대신 맡고 있다. 은행 지점이 속속 문을 닫는 중이다. 자율 주행이 본격화하면 택시 기사들의 숫자는 크게 줄 것이다. 의료계에서 온라인 진찰이 현실화하면 의사 숫자도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전방위적으로 일어난다. 인류에게 위기라면 위기이고, 기회라면 기회다. 옥스퍼드 대학교 발로 나온 어느 보도에 따르면 없어질 직업의 1위는 텔레마케터이고, 유지될 직업의 1위는 놀랍게도 레크레이션 치유전문가다. 레크레이션 치유전문가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 직업이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창조성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닐는지. 많은 직업군 중에서 성직자는 사라질 직업이 아니라 유지될 직업군에 속한다. 14위는 중등교사, 15위는 성직자, 16위는 간호사다. 목사라는 직업이 이런 정도의 성적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더 크고 본질적인 위기가 폭풍 전야처럼 이미 우리 앞에 당도했을지 모른다.

2년 이상 계속된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서 대다수 교회는 좋든 싫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 사회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여러 교단의 총회나 노회 차원에서 대안들을 모색하리라 본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의 상수는 교인들이 현대인의 감각에 딱 들어맞는 온라인 예배의 맛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손에 넣은 상황과 비슷하다. 눈이 밝아질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더는 머물 수 없듯이 온라인 예배의 맛을 본 그리스도인도 현장 예배에 묶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나안 교인이 늘어나고 있었기에 이런 추세에 가속력이 붙으리라는 건 명약관화다. 당장 온라인 예배가 대세로 자리 잡지는 않겠으나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이미 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 10명의 목사가 활동하던 교회는 5명으로 충분할 것이며, 5명이 활동하던 교회는 3명이면 된다. 줄어든 숫자 중에서도 반은 목사가 아니라 유튜브 영상 기술자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온라인 시대에 목사 자리는 위기다.

지방 대학교 음대 교수로 있는 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런대로 지방에서는 잘나가는 대학의 피아노과 교수다. 이전에는 경쟁률이 높았다. 모집 인원인 40~50명을 충분히 채우고 남았다. 작년에는 20여 명만 등록했고, 올해는 10여 명만 등록했다고 한다. 학생이 없으니 교수 자리도 위태롭다. 신학대학의 상황도 비슷하다. 신입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듯이 한국교회 신자들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준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인구의 자연 감소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냉담자의 증가다. 특히 두 번째 현상에서 주목할 대목은 20~30대가 기독교에 보이는 냉소적 태도다. 지금 나는 이에 관한 실증적인 데이터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아서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으나 현장에 있는 목사들은 대개 동의할 것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부모의 손에 억지로 끌려서 교회에 나왔으나 대학생이 되면 그들이 교회를 떠난다. 고등학생 때까지도 사실은 입시에 매달려서 신앙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30년 후에, 그러니까 지금 60세 이상 신자들이 죽은 다음 시대에 한국교회는 몇 명의 목사를 필요로 할지를 생각한다면, 목사직의 위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의 정체성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그리스도인 숫자가 줄어드는 현상 자체를 기독교의 위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그동안 쌓였던 거품은 제거되는 게 차라리 낫다. 굳이 남은 소수자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물량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신앙의 토대로 삼고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완성된다고 믿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아닌가. 그러니 교인 숫자가 준다거나 목사직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현상에 대해서 일희일비할 필요는 전혀 없다. 더 근본적인 위기의 실체는 목사의 정체성에 관한 인식이다.

목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목사는 왜 존재하는가?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에서 활동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실제로 희망하는가?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그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목사는 실감하는가? 거기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가? 흔한 표현으로, 지금 죽어도 영생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나? 그 영생에 관해서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나? 혹시라도 능력 있는 CEO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이 계몽적인 어투로 들릴까, 하여 송구하다. 에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거칠게 표현했다.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목사인 나는 누군가? 나는 실제로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나? 나의 하나님 경험은 확실한가? 나의 영혼이 예수의 하나님 경험으로 충만한가? 나는 성경의 세계를 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알고 설교하나? 나는 구원받았나? 매화에 머리를 처박고 꿀을 채집하는 벌을 보거나 오싹하게 추운 겨울 밤하늘의 총총한 별빛을 보면서 존재의 신비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나? 138억 년 전의 빅뱅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우주 역사 앞에서 아득해지는 경험이 있나? 설교 본문의 현묘한 깊이 앞에서 말문이 막혀본 적이 있나? 설교자로서 이에 적합한 말을 찾아내려고 몸부림쳐본 적이 있나? 땅에 묻힌 보화를 손에 넣으려고 안절부절못해본 적이 있나? 하나님의 신탁을 경험한 선지자인가, 약을 파는 데만 정신이 팔린 약장사인가? 교회 안에서 대접받는 데만 관심이 있는 안방 주인인가, 교인들의 발을 씻길 준비를 마친 종인가? 진품인가, 짝퉁인가? 제자인가, 구경꾼인가, 바람잡이인가? 목사, ‘는 도대체 누구냐? 뭐 하는 사람이냐? 소금의 짠맛이 남았나, 어중간한가, 아예 없나? 아직 목사입네!” 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의 아포리즘은 우리의 허위의식을 제대로 까발린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6:39) 교회 공동체의 영적인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에게 가장 큰 불행은 세속화와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종교심의 약화나 목사 수요가 주는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목사의 영적 눈이 흐려지거나 멀게 되었다는 내부적 요인이다. 자신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비극적이고, 동시에 거꾸로 희극적일지 모른다. 목사 중 일부는 눈이 멀었을지 모르나 대다수 목사는 영적인 시력이 확보되어 있어서 나름 소명감을 가슴에 품고 어려운 목회상황에서도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데, 당신은 너무 자조적으로 보는 것 같다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다른 문제는 접어두고 한국교회에 나타난 한 가지 구체적인 현상만 짚자. 여기에 대해서 책임 있는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눈멀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개교회주의와 맘모니즘

한국교회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개교회주의다. 극에 달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벌어진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한 교회가 한국에 있고, 가장 가난한 교회도 한국에 있다. 양극화 현상은 코로나 재난 시절에 더 심해졌다. 담임 목사직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해괴한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여기에는 교회법도 소용없다. 교단을 탈퇴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 거래한다. 거래가 통한다. 교회를 키우기만 하면 그 목사의 모든 행위는 용납되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온몸으로 겪기에 목사는 오로지 교회 성장에 목을 맨다. 그들을 뭐라 하기도 힘들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방식으로 모두 목회에 성공하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명의 성공한 목사가 출현하려면 열 명, 아니 백 명 이상의 실패한 목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 한 명은 영웅이 되고, 다른 목사들은 루저가 된다. 성공한 목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처럼 가속을 낼 수밖에 없고, 실패한 목사는 그나마 남아 있는 적은 수의 신자들을 닦달하면서 소왕국에서 안주한다.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향한 목사의 영성이 살아나겠는가. 나는 세상보다 더 노골적으로 맘몬(Mammon)을 숭배하고 각자도생의 원리로 돌아가는 한국교회를 지옥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대형 할인점처럼 아무리 많은 종교상품을 그럴듯하게 진열해놓았다 한들 예수가 없는데, 그리고 예수가 경고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6:24) 있는데, 어떻게 지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이번 기회에 단테의 신곡지옥 편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너는 지성의 진리를 상실한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보게 되리라.” “저들에게는 죽음의 희망도 없고, 그들의 눈먼 삶은 지극히 낮아서 모든 다른 운명을 부러워한단다.”

개별 목사나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별나게 세속적이며 비인격적이고 무식하여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피조물로서의 사람은 거기서 거기다. 독일 그리스도인이나 한국 그리스도인이나 수준은 비슷하다. 로마 가톨릭 사제나 우리 개신교회 목사나 실력은 비등하다. 문제는 그 공동체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천박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예속되었다. 개교회주의와 연동된 경쟁 만능주의에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한다. 그런 구조에 길들어 성경이 지시하는 거룩한 상상력(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참조)이 눈에 안 들어온다. 예를 들어서 같은 교단에 속한 목사는 대형 교회의 담임이나 부목이나 작은 교회 목사나 모두 똑같은 사례비를 받는 상상력 말이다. 어떤 이들은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수만 가지나 들이댈 것이다. 빨갱이들만 그런 주장을 펼친다고 다그칠지도 모르겠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한 아버지에 관한 비유를 굳이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돈벌이를 목표로 하는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교회라면, 교구에 속한 모든 신부에게 같은 사례비를 지급하는 가톨릭교회나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발령받은 초중등 교사에게 같은 연봉을 지급하는 교육청이 그러하듯이, 총회나 노회에 속한 모든 목사에게 같은 연봉을, 아니면 약간의 차별을 둔 연봉을 지급해야 마땅하다. 이런 사태를 못 보거나 외면한다면 눈이 먼 게 아닐는지. 케케묵은 사례비 문제를 언급해서 민망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에 대한 진단은 초점을 놓친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지성의 보루인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이런 주제를 신학 담론으로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들이 일반 대학교 교수들 못지않은 액수의 연봉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지만, 다르게는 이해가 안 간다. 자신들이 배부르니까 사도신조니케나-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가리키는 교회의 보편성을(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보편교회를 믿으며 ), 거짓 재단사에 속아 벌거벗고 백성 앞에 나타난 임금의 행차를 못 본 체한 덴마크 사람들처럼 애써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억측일까? 한편으로 아쉽고,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로 화가 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23:23) 신학계에서 이미 충분할 정도로 논의가 일어났다면, 나의 과문(寡聞)을 용서 바란다.

한국의 개신교회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개교회주의는 너무 강고해서 예수 재림 이전에는 개혁이 어려우니, 자신의 영적 실존과 소명에 관심이 있는 목사들은 그 문제에 더는 매달리지 않는 게 지혜로울 듯하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임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따르더라도 어려운 형편에 놓였기에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사람이 예상하거나 계산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것이다. 거꾸로 교회를 크게 키워 대기업 대표자 못지않은 수준으로 대접받는 목사들의 영혼은 공허하고 빈약하다. 그들의 손에 들린 권위(ἐξουσία)와 영광(δόξα)은 원래 마귀가 사용하는(4:6)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 권위와 영광을 지키려면 그들은 반복해서 마귀에게 절할 수밖에 없다.

 

목사의 영적 실존- 눈멂

여기서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한다.”라는 말씀에는 목사가 먼저 눈멂이라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깊고 근원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가 모두 눈먼 자들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르더라도 이 사실은 옳다. 죄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우월하냐 아니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진리와 단절되었다는 뜻이다. 진리이며 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이가 죄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한다.(33:20절 참조) 이 문제는 인식론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인식론적인 한계 안에서 산다. 진리와 단절되어 있으니 선악과 이후로 표면적인 것에 관해서는 눈이 밝아지긴 했으나 빛 자체는, 진리 자체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C.S. 루이스 표현으로, 모든 인간은 그 내면세계가 파산 상태이다. 바르트 버전으로, 설교자의 딜레마는 하나님 말씀을 인식할 수 없다는(nicht können erkennen) 불가능성과 그걸 전해야 한다는 당위(Sollen) 사이에 놓인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성찰하는 목사라면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눈멀지 않은 자는 예수뿐이다. 예수만이 하나님을 본 자이기에 예수만이 우리의 목자다. 목사는 목자가 아니라 다른 교인과 똑같이 양이다. 목사는 선생이 아니라 학생이다. 좋게 말해서 우리의 역할은 반장 정도이다. 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반장이 선생 역할을 도맡으려고 나선다면 모양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다. 우리가 교인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예수 앞으로 함께 가자고 격려하는 외침뿐이다.

목사의 고유한 권위는 없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목사가 양에 불과하다면 교회의 질서는 어떻게 되느냐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서 목사를 월급 사장 취급을 한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목사의 고유한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전업 목사로서의 전문성이 대수롭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그 문제는 다른 주제다. 목사도 일반 교인들과 똑같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인도를 받아야 할 눈먼 자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자는 뜻이다. 그걸 부정하는 순간에 우리는 교주가 될 것이다. 겉으로는 펄쩍 뛰겠으나 내심으로는 교주가 되기를 작정한 목사들도 적지 않다.

교인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 앞으로 이끄는 역할이나마 목사가 제대로 감당하려면 최소한 예수가 누군지는 알아야 한다. 안개 낀 날에도 예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소음 가운데서도 그의 목소리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목사인 우리가 갖춰야 할 최소한이면서 최대한의 자격이다. 목사의 신학적 역량이자, 소양이며, 은사다. 그게 없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서로에게 좋다. 예수가 회중석에 앉아서 우리의 설교를 들은 후에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지 못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조심스럽지만, 여기서 성경 한 구절만 인용하겠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새번역 성경, 1:14) 말씀(Λόγος)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 그에게 외아들의 영광(δόξα)이 있었다는 사실, 그에게 은혜와 진리(ἀληθεία)가 충만하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모르는 게 아닐는지.

목사는 목회 실천이 아니라 신학과 영적인 내공을 쌓는 데만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렸을지 모르겠다. 더구나 목회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으로 들렸으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제 목사 생활 40년이 시나브로 끝나가는 나 사진을 향한 자책이었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무슨 열매를 맺을까 하는 염려는 일단 내려놓고, 즉 어떻게 목회 성과를 낼 것인지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거룩하고 떨리는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도 정진의 태도로 구할 때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겠다고 나대는 촌극만은 면하지 않겠는가.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복음과 상황> 2022년 4월호, 단테의 <신곡> 지옥편만 조금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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