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집 <말씀 등불을 밝히고>에 저도 한 꼭지를 맡아서 썼습니다.

이 책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설교문 중에서 한편씩 발췌해서 묶은 책입니다. 

자그마치 847쪽입니다. 가격도 단권 설교집으로는 기록적인 5만원이군요. 

출판사는 '꽃자리'이고 펴낸이는 한종호 목사님입니다. 한 목사님이 <기독교 사상> 편집장으로 일할 때

제가 설교비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설교비평 글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한 목사님의 역할이 반은 됩니다.

열세 명의 기독교 필자들이 김 목사의 설교를 다섯 편씩 맡아서 평을 올렸습니다. 

필진의 면면을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도 많고, 글의 수준도 고급집니다.

저는 느혜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설교를 맡았습니다. 제목은 "말씀의 여운"입니다. 

이미 2006년 9월호 <기독교 사상>에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17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그분의 설교 내용과 글 흐름과 영성의 깊이가 전혀 흔들림없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책읽기를 겁내지 않는 분들에게 이런 정도의 설교집 한권은 읽어두셔야 하지 않을까 하여 적극 추천합니다.

여기 제가 맡은 꼭지의 글을 올리겠습니다. 


말씀의 여운

정용섭 목사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최근에 김기석 목사님(이하 김 목사’)의 설교문 다섯 편을 읽었다. 감회가 새롭다. 17년 전 기독교 사상20069월호에 게재한 졸고 신앙과 문학이 만나는 자리는 김 목사 설교 전반에 대한 해설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김 목사의 설교에서 전달되는 느낌이 전혀 색바래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 그 졸고에서 몇 대목을 여기 발췌하겠다.

 

평자는 김 목사가 2005년 일 년 동안 청파교회의 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50편을 정독했다. 그리고 2006년의 설교는 부분적으로 설교듣기를 통해서 청취했다. 그의 설교 전문과 듣기는 모두 홈페이지에 올라있다. 그가 <기독교사상>2년 반 동안 연재한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는 평자가 애독하던 꼭지였다. 전체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김 목사의 설교 한편 한편은 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신앙 에세이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학이 그의 설교 무대에 함께 올라 신명나게 한바탕 춤추며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외딴 방의 작가 신경숙은 사춘기 시절 구로공단에서 공순이로 살아가면서도 짬짬이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대학노트에 축자적으로 받아 적으면서 소설쓰기를 공부했는데, 신학생들과 젊은 목사들도 김 목사의 설교를 반복해서 듣고 읽으면서 신앙과 삶과 설교를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영혼구원, 한국의 복음화, 세계선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설교자들과 달리 김 목사는 일상에 목회와 설교의 중심을 두고 있다. 그에게서 일상과 유리된 신앙은 기대할 수는 없다. 흡사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이 한뜸한뜸 바느질을 하듯이 그는 일상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놓는 사람이다.

모르긴 해도 김 목사는 수시로 가슴앓이를 할 것 같다.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에 가슴이 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삶과 세계를 파괴하는 괴물 앞에서 가슴이 저릴 것이다.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 숙명이 바로 그것이다. 괴물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에 도취되어 흥겨운 노래만 부르면 되고, 은총이 보이지 않으면 머리끈 동여매고 괴물과 투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두 눈 부릅뜬 채 직시하고 있는 김 목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다 울다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혼란을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아픔을 혼자의 가슴앓이로 숨겨둔 채, 오히려 의연한 태도로 이런 모순된 현실과 맞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낮은 자를 향한 극진한 관심과 배려이다.

삶의 신비를 알알이 풀어내며, 소외된 이웃과의 강력한 연대를 추구하는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김 목사처럼 진정성과 설득력을 담아내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의 전문적인 글쓰기가 설교의 깊은 맛을 더 해주고 있으니, 평자가 무슨 말을 여기서 더 보탤 수 있으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가끔 생각을 한다. 저분은 왜 시인이 아니고, 문학평론가일까. 한올 거추장스러운 검불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고자 애쓰는 참 시인인데 . 목사님, 하고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알몸으로 선 그를 느끼는 청파교회 신자로서 나는 늘 행복하다.”(홈페이지)라는 소설가 이명행의 고백에 평자도 이심전심으로 동의한다. 그의 설교를 듣고 읽는 동안 내 영혼이 부쩍 맑아지고 훌쩍 자란 느낌이다.

하나님, 세상, 인간, 문학, 예술, 사랑에 대해서 한 수 가르침을 받을만한 분과 동시대에 설교자와 글쟁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자는 중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알려진 챗-지피티(Chat-GPT)가 앞으로는 설교까지 맞춤형으로 제공할지 모른다. 설교자에게는 위기다. 설교자가 챗-지피티보다 훨씬 수준 떨어지는 설교에 만족하는 바보가 되든지, -지피티가 제공하는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가 되든지, 완전히 창조적인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창조와 진리와 부활의 영인 성령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현대 기술의 발전 앞에서 주눅들 필요는 없다. 영혼의 깊이에서 말씀을 읽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대화형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생명 충만한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김 목사의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생명 충만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미 17년 전에 할 말은 다 한 셈이라서 이번에는 나에게 주어진 다섯 편의 설교를 각각 나눠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자유인의 초상(에스더 3:1~6)

김 목사는 <에스더> 이야기에서 자유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뽑아냈다. 나는 설교를 작성하기보다 제목 정하기가 더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내 생각이 그만큼 어딘가에 갇혀있거나 경직되었다는 의미이다. 김 목사의 제목 정하기는 정말 발군이다. 제목이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문학적인 향기가 배어난다. 그만큼 김 목사의 영혼이 자유롭기도 하고 어떤 근원에 닿아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뒤에 이어지는 설교 제목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폐허를 딛고 서서’, ‘끊어지면 안 되는 사랑의 고리’, ‘그들은 나를 이겨내지 못했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그렇다. 이런 기막힌 제목을 주보에서 본다면 청중들은 어떤 설교가 나올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김 목사는 제목으로 이미 설교의 승부를 본 셈이다.

에스더를 중심으로 하는 그 서사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역설적으로 그 깊이를 놓칠 수 있다. 설교자는 텍스트가 다 담지 못하는, 더 정확하게는 행간 안에 숨겨둔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그걸 청중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에스더와 모르드개 서사가 당시 역사와 더불어서 입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 서사에 끼어든 인물이 하만이다. 하만의 음모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극과 연결된다. 청중들은 아래와 같은 김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역사에서 벌어진 그 아슬아슬한 장면을 실감했을 것이다. 히틀러 시대에 에스더와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세계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라는 상상력도 덤으로 받았을 것이다.

 

하만은 왕을 설득해서 유대인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왕의 통치하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 가운데, 왕이 세운 법과는 다른 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회통합의 걸림돌일 뿐만 아니라, 왕의 존엄을 해치는 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만은 이런 사적인 감정에 기대어 엄청난 학살극을 준비하면서 왕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칩니다. 왕은 하만의 충성심에 감복하여 그가 원하는대로 전권을 위임해줍니다. 바야흐로 유대인들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아달월 십삼일이 되면 페르시아 지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다 학살하라는 왕의 조서가 각지에 내려졌습니다.

김 목사에게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미뤄두고 오히려 믿음을 지키는 결단과 의지라고 역설한다. 그것이 곧 내적 자유. 그 자유를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와 내게 한 번만 절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럴싸하지요? 하지만 사탄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준다는 것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키십니다. 한 번이라도 믿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소한 이익은 잃을지 모르지만, 더 큰 내적 자유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리를 통해 얻는 참된 자유로 말미암아 환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씀이 바로 김 목사가 말하는 내적 자유. 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는 자기 혼자 고고한 자유로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자기의 이해타산에 기울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이다. 영혼의 자유가 실천을 담보하며 실천을 통해서 자유가 선물로 주어진다.

 

폐허를 딛고 서서(느헤미야 2:11-18)

올해 일흔 살이 된 나도 김 목사와 마찬가지로 평생 설교자로 살았다. 앞에서 짚은 에스더와 지금 다룰 느헤미야를 설교 본문으로 삼은 적이 나는 한 번도 없다.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는 물론 다뤘으나 주일 공동예배 설교 본문으로는 다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런 본문에서는 케리그마(kerygma)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김 목사의 설교를 읽으면서 이런 내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김 목사는 보통 설교자들이 설교 본문으로 삼기 어려운 본문에서도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해명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이후 역사를 다루는 느헤미야를 본문으로 그는 폐허를 딛고 서서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담담하면서도 역동적으로 풀어내면서 영적일 길을 열어주었다. 역시 그는 성경의 세계를 훨씬 더 깊이, 그리고 아주 멀리 내다보는 영적인 고수다.

그가 느헤미야를 본문으로 풍성한 설교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영성이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에 밀착해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 교리가 품고 있는 삶에 관심이 있다. 느헤미야가 처한 삶의 자리가 폐허인 것처럼,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도 폐허라는 사실을 뚫어본다. 거기서 원망하고 자책하는 사람이 있으나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위 설교는 코로나19 판데믹이 본격화하는 2020년 여름에 행한 설교로 보인다. 그야말로 폐허 시절이다. “7월이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우리의 낙관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어둠이 스멀스멀 우리 가운데 스며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아야 하겠습니다.” 24백 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으나 우리는 폐허를 똑같이 경험했다. 우리 사회에 말이 거칠어졌고, 원망이 많아졌다. 김 목사는 청중들에게 거창한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말의 폐허를 넘어서자고 호소한다. 아래는 이 설교의 결론 부분이다. 그 자리에 내가 청중으로 앉아 있었다면 영혼 깊은 곳에서 아멘이 솟아났을 것이다. 언젠가 나에게 느헤미야를 본문으로 설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김 목사 설교의 이 대목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먼저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끄러운 말, 사람들을 가르는 말, 냉소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대화의 용기를 내야 합니다. 암담해 보여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희망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꿈은 바로 우리의 그런 노력을 통해 이 땅에서 영글어 갈 것입니다. 투덜거림을 멈추고, 우리 주변에 널린 폐허의 잔해를 치우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난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결국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선물로 주어진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이 희망을 파종하는 기쁨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끊어지면 안 되는 사랑의 고리(잠언 17:9-17)

잠언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도 쉽지 않다. 유대의 지혜가 자칫 초등학생들을 위한 교장 선생의 훈화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잠언 본문의 시작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이다. 허물을 덮어 주는 삶은 굳이 설교자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말할 수 있다. 영적인 긴장감이 떨어질 수 있는 그렇고 그런 뻔한 설교로 들릴 수 있는 이 주제가 김 목사의 설교에서는 생생하게 빛을 발했다. 이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영적인 감수성이 있기에 이런 설교가 가능한 게 아니겠는가. 영적인 감수성은 삶에 대한 그의 고유한 열정이고 인식이며 참여이고, 희망이며 믿음이고 사랑이며, 결단이고 기다림이자 기쁨이고 고뇌이다. 내가 비슷한 주제로 설교했다면 담아내지 못했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설교에는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드러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김 목사는 여기서 잠언만 붙들고 설교하지 않았다. 신구약 성경을 끌어들임으로써 잠언의 가르침을 성경 전체와 이어주었다. 설교 본문에 거론된 성경 본문은 아래와 같다. 1:8, 1:13, 9:23, 8:11, 2:15, 3:13~14, 15:14, 3:35. 이런 성경 구절로 인해서 잠언의 가르침이 입체적으로 전달된 것이다. 다른 설교자들도 자신의 설교에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성경 구절을 마치 상품 진열하듯이 인용하는 것과 본문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김 목사의 성경 인용은 그 어떤 한 구절도 어긋나지 않게 잘 맞아떨어져서 마치 흑백 영화를 컬러 영화로 보는 듯하게 했다.

다른 설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위 설교를 읽으면서 나는 삶에 대한 김 목사의 접근 방식이 놀라우리만치 개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혁이라는 관념과 현실이라는 실체가 그의 설교에서 농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번 설교에서 그는 흑인 신학자의 아버지라 할 제임스 콘과 스위스 종교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이면서 칼 바르트에게 영향을 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글을 인용했다. 이 두 사람은 북미와 유럽에서 각각 하나님 나라의 사회 변혁적 지평에 자기 삶을 바친 이들이다. 상투적인 교훈에 머물 수도 있는 잠언이 그가 인용한 이들의 글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영적인 지진으로 전달되었다. 그가 인용한 채현국의 글도 마찬가지다. “난 도운 적 없어요.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죠.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예요.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죠.“(이진순,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문학동네, p.296)

성경 텍스트는 문자다. 문자는 근원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다(不立文字). 설교자는 문자인 성경 텍스트 안에 은폐된 고유한 생명의 세계를 청중들에게 불을 밝혀 알려주는 사람이다. 이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설교자가 먼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청중들의 귀에 들리는 말로 전해야 한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김 목사는 이런 설교자의 역할을 다른 설교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낫게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수행했다. 평범했던 성경의 세계가 비상한 세계로 들린다. 빛바랜 옛날 스냅사진이 동영상으로 보인다. 이번 설교 마지막 단란에서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앞의 내용을 다 들은 청중이라면 이런 호소 앞에서 가슴이 뭉클하는 감동을 왜 받지 않았겠는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이 척박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연결고리를 든든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에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사랑의 고리를 든든하게 만드는 보람을 맛보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그들은 나를 이겨내지 못했다(시편 129:1-8)

김 목사의 설교가 왜 생동감이 넘치는지를 이번 시편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읽고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성경 텍스트의 보이지 않는 깊이를 들여다보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성경이 붙들고 있는, 또는 숨기고 있는 삶의 자리에는 절절한 우여곡절이 많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를 그는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표현했다. 아래의 말은 설교를 전업으로 삼는 사람이 곱씹어볼 만하다.

 

저는 가끔 성경을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말합니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들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1절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천대받았던 기억, 광야에서 겪었던 시련과 유목민들의 억압,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민족들과 싸워야 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 애굽,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로 이어지는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찢기고 상처받은 기억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시련을 통과해야 했던 개인의 삶 또한 평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순례자들은 민족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이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며 걷고 또 걸었을 것입니다.

 

시편 129편에서 이런 시각이 열리면 설교의 반은 끝난 셈이다. 김 목사가 설교에서 설명했듯이 129편은 고대 유대인들이 성지순례를 나서면서 부르는 노래 중의 하나다. 민족의 고난을 몸으로 재현하는 성지순례에 담긴 영적 긴장감에 공명 된다면 고난은 극복될 것이다. 고난 경험이 곧 승리 경험인 셈이다. 오늘 현대인들은 고난을 외면하거나 아예 모르거나 회피하기에 참된 의미에서의 승리도 모른다. 그래서 김 목사는 이렇게 설교할 수 있었다.

 

순례자들은 자기들이 겪어온 시련의 역사를 밭을 가는 사람이 밭을 갈아엎듯 자기네 등을 갈아서 고랑을 깊게 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과 모멸감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모욕당하고 천대받는 이들 편에 서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 주셨다.”(4) 짧은 구절이지만 이 고백은 엄청난 파워를 보여줍니다. 악인의 사슬은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들을 해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시 아멘하고 화답했다. 이번 다섯 편의 설교를 읽으면서 거듭해서 아멘이라고 되뇌었다. 평생 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린 청파교회 교인들은 복이 있으리라(Μακάριοι, 마카리오이, 5:3).

 

헤아릴 수 없는 신비(욥기 9:1-11)

욥기를 본문으로 하는 대부분의 설교는 욥의 운명이 사탄에 의해서 괴멸 상태에 이르는 욥 1~3, 그리고 욥의 회개와 그의 운명이 회복되는 마지막 장인 42장을 본문으로 한다. 극한의 시련과 회개와 갑절의 축복이라는 서사는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맞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위 설교에서 지혜 문학의 대표자들인 친구들과의 논쟁을 본문으로 삼았다. 친구 빌닷의 충고에 대한 반론이다. 친구의 말도 틀린 게 없다. 욥의 친구 격인 빌닷을 비롯한 엘리바스와 소발, 그리고 후배 격인 엘리후의 논리는 그럴듯하다. 그래서 오해도 생긴다. 빌닷은 욥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이라 해도 욥을 향한 비난이라면 그걸 은혜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 아닌가. 욥기는 정말 조심해서 읽어야 할 말씀이다. 번역 문제로 인해서 욥의 주장이 오해되기도 한다. 23:10절이 한 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지금 욥의 고난이 훗날 오히려 욥의 신앙을 강하게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것은 욥을 비판한 엘리후의 논리다. 공동번역은 이렇다.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자기가 억울하다는 뜻이다.

김 목사는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벌어지는 이 본문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신비라는 제목을 잡았다. 죄가 없는 자의 고난을 유대의 지혜 문학이나 신명기 역사관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욥기는 말한다. 그게 곧 우리 삶에 개입된 하나님의 존재 신비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늘 속 시원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는 설교를 이렇게 맺는다. ‘말씀의 거룩한 여운이 느껴진다.

 

모든 고통이 다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주님의 뜻을 깊이 깨달을 수 없었기에 그 고통은 복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시선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불의와 맞서 싸우되 정신이 피폐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세계와 자주 접속해야 합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뜻을 여쭈어 보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듯 주님의 은총의 바람이 우리의 울울한 마음에 불어와 이웃과 더불어 생을 마음껏 경축하며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나는 김 목사를 오래전 직접 대면한 적이 몇 번 된다. 그 뒤로도 기독교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유튜브 방송으로는 종종 뵈었다. 김 목사의 책에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김 목사를 앞으로 어떻게 쓰실지 모르겠으나 그의 설교를 계속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노후에 영육 간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아래는 책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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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4월9일에 열린 '북콘서트' 포스터입니다. 저는 시간이 안 돼서 참석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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