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신비

조회 수 8229 추천 수 0 2009.04.12 07:43:39
 

존재의 신비


어쩌다 점심 후 오후에 의자에 앉아서 잠시 졸 때가 있다. 짧을 때는 10분, 길 때는 30분이 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별로 잠자기에 편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밤에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것보다 훨씬 깊이 잠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밤잠은 중간에 깨는 경우가 있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낮잠에서 깰 때는 순간적으로 현실 감각을 잃곤 한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나인가? 아니면 청년 시절? 아니면 죽기 바로 직전의 나인가? 그리고 지금 이곳은 어디인가? 아카데미 연구실인가, 집인가, 강의실인가? 그게 극히 짧기는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자기 정체성의 공백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자기의식이 돌아올 때 갑자기 무엇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큰 충격을 받을 때가 많다. 의식 안에 확고하게 서 있을 때는 내 주변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이렇게 무의식과 의식이 교차하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 문제가 무지하게 큰 힘으로 나를 압박한다.

<나>라는 인격이 왜 이 시간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을 것일까? 아파트는 무엇이고, 산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없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간에 의해서 변형되는 이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무나 짧은 순간에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질 뿐인 모든 것들을, 예컨대 여름 장마철 한순간 번쩍이고 사라진 번개를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번개의 찰라나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찰라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존재의 심연이 곧 생명의 신비이리라. 이런 세계를 어렴풋하게 느끼는 게 아니라 매우 생생하고 절실하게 느끼는 게 기독교의 영성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의 완성을 교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느끼고 살아갈 때만 기독교의 영성은 확보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하는 존재는 <무로부터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려면 <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극을 알고 있어야 우리는 창조 사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도대체 우리는 <무>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늘 <홈스위트홈>에 안주하고, <우리 교회>에 자족하고, <인간>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결코 <무>는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 소위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 경험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까? 단지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고 말만 할 뿐이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그런 경험은 십자가의 실패가 가리키는 실존적 좌절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예수님만의 절대적 고독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약간 방향을 바꿔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무>에 대한 경험과 비견할 수도 있다.

이런 무의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무>의 막막함, 혼란, 절망, 포기로부터 우리는 다시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창조만이 아니라 <종말>도 역시 기독교 영성의 받침대이다. 왜냐하면 종말은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초월하는 세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우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생명 형식들이 철저하게 변형되는 그 때가 바로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말하고 있는 종말이다.

이 종말을 의식하는 사람은 현재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의문을 갖는다. 왜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왜 인간은 이런 모습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왜 민들레와 인간은 대화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미 2천7백 년 전에 이사야는 어린아이와 독사가 사이좋게 노는 세상을, 양과 사자가 어울려 사는 세상을 상상한 바 있다.)

이런 영성이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상상력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개미는 아닐까? 인간은 지구에서 1천만년 정도만 살다가 멸망하고 그 이후 지구가 살아남아 있을 45억년 동안은 다른 생명체가 주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종말론을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의 이 잠정적인 생명체들을 완전한, 미래의 생명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한다.

만약 종말 이후에 시작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방식이 확대된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기하겠다. 병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슬픔도 없는,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고 있는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그런 세상이 영원하게 지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이야기가 원래 시작했던 곳에서 너무 멀리 흘러가 버린 것 같다.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종말로 왔지만 이게 그렇게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종말이 이르러야만 우리는 그 존재를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2천년 전 바울도 역사의 과정 속에 있는 우리는 모든 것들을 단지 거울로 보는 것처럼 불확실하지만 마지막이 오면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들은 완벽하게 잠정적이고, 그래서 일종의 과정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중간에 아무리 우리가 살펴보더라도 그 그림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림그리기가 끝난 후에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처럼 이 세상이 끝나는 종말이 되어야 존재의 신비가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은 무조건 역사와 절단되는 사건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 역사와 상호적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지만 무상하고 잠정적인 이 역사 안에 그 종말에 이루어질 그 마지막 사건이 신비한 방식으로 개입한다는 말이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선취>(先取)라고 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역사에서 그런 마지막 궁극적인 생명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런 생명에 대한 묘사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미처 맛보지 못한 그런 세계를 맛본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 안에 묶여 있지만 우리가 신비주의자의 영성을 확보한다면 종말에 일어나게 될 생명의 신비를 약간이나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신비주의자들의 영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따르게 되면 이 문제가 훨씬 복잡하게 되겠지만, 존재자이든지, 존재이든지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앞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의 신비는 우리가 평생토록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매 순간마다 이런 사유의 활동에 휩쓸리다보면 안개가 걷히면서 숲이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어떤 궁극적인 실체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낮잠을 자다가 헛소리를 한 건 아닐까? 



[레벨:19]이선영

2009.04.12 23:12:06

위 글에서 개미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어릴때 개미를 괴롭히며 놀던? 기억이 있는데

이런 생각  했었거든요. 개미위에서 사람이 이렇게 군림?하고 있듯이

사람도 상상치 못할 어떤 것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상하게도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지금은 그때의 생각을 하려해도 잘 되지 않는데 텅빈 우주공간에 나만 홀로 떠 있는

깜깜하고 무척 답답했던 기억이 나요.

무, 존재, 종말.. 어렵네요.

목사님! 오늘 뵙고 넘 좋았답니다.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멋지시던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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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4.13 00:03:38

선영 양,

오늘 자네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네.

공교롭게 오늘 대구샘터교회 예배 시간이 한 시간 늦춰지는 바람에

이야기 할 시간도 별로 없어서, 안 됐네.

뒤에 남아서들 재미있게 지냈는지 모르겠군요.

종종 보세.

무의 세계가 언젠가 친근하게 다가올 거네.

좋은 한 주간 보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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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9.04.15 22:55:20

낮잠 후에 찾아오는 정체성 공백의 공포를

목사님 글을 통해 읽으니

내맘 속 어둔 경험과 똑같은 쌍둥이를 만난 느낌입니다

순간이지만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공포라면

언뜻 거울 속에 비치는, 내가 있다는 느낌은 존재에 대한 무거운 부담입니다

있다는 느낌도 없다는 느낌도 모두 거북하니

정말 '나'라는 피조물이 너무 불안정합니다

생명 선취의 은밀한 빛이

이 불안정한 나를 온전히 덮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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